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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여행은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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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2-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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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여행을 위해 돈을 버는 트럭운전사, ‘외로운 행성’ 장강환의 삶

사진/ "모든 나라를 다 다녀보고 싶다." 교보문고 세계 나라별 여행안내서 코너에서.(이정용 기자)
장강환(39)씨는 얼마 전 아프리카 여행기를 펴냈다. 그를 교보문고에서 만났다. 책이 매장 어디쯤에 있는지 살펴보았느냐고 물었다. “어디 있겠지요, 뭐.”

세계 나라별 여행안내서 코너에 서서 다시 물었다. 저기, 저 많은 나라를 전부 여행할 작정인가요? “죽을 때까지 다녀도 다 가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지구본을 휙 돌리듯 무심한 눈길로 빼곡한 여행서들을 쓱 훑어내린다.

여행지보다 흥미로운 여행가의 삶


그가 아프리카 21개국을 340일간 돌아보고 온 지 1년이 되었다. 95년에 타이와 아시아 몇몇 나라를 다녀오는 것으로 그의 큰 여행은 시작되었다. 두 번째는 인도, 그리고 아프리카. 나라 안은 틈나고 마음 내키면 수시로 다니고, 외국여행은 작정해서 하는 것으로 장강환의 여행 일정은 빼곡하다. 하지만 자신의 여행이야기를 펴내기는 아프리카가 처음이다.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으로만 연상하며 우리와는 너무 멀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곳에서의 재미난 경험과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여행지보다 여행가 그 자신의 삶이다. <트럭운전사 짱 아저씨의 아프리카 종단여행기>라는 책제목에서 보듯이 그는 트럭운전사였다. 버스도 몰았고 택시운전도 했다. 가스배달을 할 때는 오토바이도 탔다. 전남 영광에서 나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여러 일을 하면서 살았다. 동사무소 급사 일로 시작하여 영등포 스테인리스 공장에서 12시간 교대근무도 했다. 용산에서 카메라 세일즈도 했다. 그 일들은 모두 어른이 되었으니 자신의 삶을 책임지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다른 꿍꿍이도 있었다. “내 힘으로 돈 벌어 사막에 갈 거야!” 중학 시절 동네 푸르른 보리밭 둑길을 걸으며 품었던 꿈이었다. 가난한 집안형편으로 놓쳐버린 수학여행에 대한 미련은 굳이 거론할 일이 아닌 듯하다.

여행가와의 만남에 걸맞게 우리는 길 위에서도 얘기를 주고받았다. 사진기자의 제안으로 충무로의 한 카페로 가면서 장강환씨는 아프리카를 찍는 데 필름을 열여섯통(!)이나 썼다고 말했다. 주로 전문여행가들이 모인다는 카페 이름은 53-22. 심오한 뜻인가? “아, 여기 번지가 그래요.” 주인의 대답이다. 온통 흰색인 벽 위에 네팔의 눈산, 티베트의 고즈넉함이 사진으로 걸려 있었다. 여행가이며 사진가인 주인의 솜씨였다. 별안간 우리는 유목민이 된 듯했다. 말젖으로 만든 타라크를 마시듯 차를 마시며 물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붙박이 인생을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간다. 훌훌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용기나 배짱이 있는 것인가? 짱의 얼굴에 “또 그런 말이냐?”는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너 언제까지 그렇게 네 좋은 대로만 하고 살 거냐?” 그의 사촌형이 쉬지 않고 그에게 타이르는 말이다.

“용기? 그런 거 아니지요. 그냥 가는 거지요. 인생은 한번밖에 오지 않는 거잖아요. 그런 인생을 왜 남들하고 똑같게 살아야 합니까? 저는 한번뿐인 내 인생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기로 한 것뿐입니다.”

사람들은 여행을 레저라고 생각한다. 장강환씨는 여행을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집을 마련하고, 좀더 편안한 생활을 위해 돈을 번다. 그는 여행을 가기 위해 돈을 번다. 인도여행을 준비할 적에 그는 그 열망을 택시 백미러에 달아매고 하루에 12시간씩 일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그러니 돈이 많이 모이던데요.” 그의 표정에 머뭇거림이 없다.

“인도에 꼭 다시 가야 해요. 인도는 제게 숙제를 안겨줬거든요. 종교와 행복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봐야 해요. 그게 무엇인지, 정말 있는 것인지 말이죠.” 그는 보았고 나는 보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아프리카를 돌면서 그는 희망봉 절벽에 서서 대서양 파도를 굽어보았다. 바다 같은 빅토리아 호수에서는 풍랑을 만나 죽을 뻔했다. 대륙 아프리카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지요. 거기서 나오는 잡지를 봐도 역시 남녀문제로 고민하는 내용들이고 그래요.” 그렇지만 먹을 게 ‘없어서 못 먹는’ 실정은 정말로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수단사람들은 참 친절해요. 자기들 말로도 그렇다고 해요. 아프리카인들은 동양인들한테 비교적 관대해요. 아마 유럽 식민지 경험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동양인들에게 더 친절한 것 같아요.” 태권도를 가르쳐 달라는 아프리카 꼬마들에게 둘러싸이기도 했고, 더운 담장 그늘에 앉아 마음이 따스한 사람들과 뜨거운 차를 마시며 먼 나라 한국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말라리아약 대신 고추장을

사진/ 아프리카 종단 여행기를 책으로 펴냈던 그는 이제 중동여행기를 준비하고 있다.(이정용 기자)
그는 자신이 아주 치밀한 사람이라고 자평한다. 일단 배낭을 꾸리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철두철미. 지난 일년간의 여행 중에 단 하나도 아차, 가지고 올 걸 하는 게 없었단다. 그는 또한 건강하기도 하다. 아프리카 여행에 필수인 말라리아약을 먹지 않고 버텼다. 그러나 고추장은 필수품. “고추장을 먹고 나면 힘이 막 솟아요.” 아프리카산 모든 야채를 고추장에 찍어먹느라 보름 만에 1kg 단지를 바닥냈다.

그는 여행주기가 2년이니 내년이면 다시 길을 떠날 것이다. 그 사이 운전을 하나? “운전은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요.” 그래서 막노동일을 한다. 새벽 용역시장에 가서 노가다판의 일을 받아간다.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영자신문을 보고 영어로 일기를 쓴다. 이상한 콤비네이션인가?

그는 영어공부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인 학력으로 어떻게 막힘없이 영어를 하며 여행하는지 궁금한가봐요.”

학교 졸업 14년 만에 영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타이여행 다녀와서 아, 여행하려면 영어가 필요하구나, 깨달았다. 벌이가 좋았던 장거리 트럭운전도 학원수업 빠지는 게 싫어서 다른 일로 바꾸었다. 요즘은 케냐에서 사온 단파 라디오로 방송을 듣고 있다. 모름지기 좋아서 하는 일을 무조건 쑥쑥 자라나게 마련이다. 인간 자발성의 위력은 상상을 불허한다.

그는 기분전환으로 자주 팝송을 듣는다. 국토‘방위’ 시절 퇴근하는 대로 그는 빨간모자를 쓰고(아마 목에 스카프도 둘렀을 것이다) 다방에서 디제이를 했다. 신청서에 담아오는 사연도 읽어주면서 팝송에 빠져 살았다. 그의 음악취향은 바흐에서 비틀스까지. 한때는 클래식 기타에 심취해 열심히 배웠다. 버스기사로 일할 때는 퇴근하고 연주회를 자주 다니기도 했다.

문득 아일랜드에서 만났던 버스기사 톰 하일랜드가 생각났다. 노총각인 그는 버스를 몰면서 틈틈이 동티모르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버스기사와 남의 나라 독립운동. 그때 나는 이상한 콤비네이션이라고 생각했지만 멋진 인생이구나 싶었다.

“저는요. 제가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누가 뭐래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으니까요.” 그는 정말 세련된 사람이다.

붙박이인 나는 그래도 자꾸 걱정이 된다. 무슨 대책은 세워두었겠지? 가령 노후대책, 순수하게 경제적인 의미로 말이다. “그런 거 생각하면 여행 못 가지요. 제가 버스 몰 때는요, 10일날 월급 받고 하룻만에 짐 챙기고 다음날 여행 갔어요. 돈 모은다, 그런 데 생각이 가면 길을 못 나서지요.”

그래서 그는 언제든지 시작과 끝이 간단한 일들을 하는가보다. 여행에 지장이 없는 직장. 그야말로 여행에 몽땅 바친 삶 아닌가? “허허 꼭 그런 것은 아니고요. 저는 여행을 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렇게 살았을 겁니다.” 어떻든 살아가야 하는 게 인생이 아니냐? 허를 찌르는 정직한 반문이다.

다음 여행지는 중동

다음은 어디로 길을 나설 것인가? “중동요.” 거긴 전쟁중이다. 좀 잠잠해지면 가야 하지 않을까. “여행하는 사람이 그런 거 가리면 아무 데도 못 간다”고 여행가는 우긴다. 어디서 난리가 났다고 해도 결국 한 지역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의 발길을 붙잡을 수 있는 세상사는 별로 없을 듯하다. 훌쩍 가보고 싶고, 가야겠다는 느낌이 오면 그는 배낭을 짊어진다.

시간을 거꾸로 가고 싶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지도 모른다. 해를 등지고 사막을 걷다보면 오래 전에 떠밀어버렸던 과거가 이마를 드러내고 나타날지도 모른다. 저 깊은 모래밭에 파묻힌 지 오래인 ‘내 인생’을 찾아가는 길. ‘외로운 행성’이 떠도는 길. 그 여정에 선 그의 얼굴은 충일감으로 빛나고 있다.

권은정/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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