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사상 가장 과소평가받은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을 추모하며
또 한 사람의 ‘비틀’, 조지 해리슨이 세상을 떠났다. 존 레넌이 죽은 지 21년 만이다. 비틀스 해산 이후 그가 발매한 첫 솔로앨범의 제목처럼, <모든 것은 지나간다> (All Things Must Pass). 그 역시, 예외없이, 지나갔다. 그래서 이젠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 그렇게 두 사람의 ‘비틀’만이 세상에 남아 있다.
그는 왜 ‘조용한 비틀’이었나
그러나 지나간 것들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들 중에서 큰 것들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서 스스로를 재생산하여 나중에 신화가 된다. 신화는 사람 바깥의 드높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람 깊은 곳에 있는 공통된 어떤 것이 자기를 새기는 방식의 하나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신화는 생성되고 있는데,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그 진행형의 신화 중의 하나가 바로 비틀스의 신화다. 지난해 그들의 넘버원 히트송 모음집인 <One>이 발매되면서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확인했다. 유일무이한 비틀스. 신화는 퇴행의 것이어서 ‘하나’다. 나와, 그들과, 유년과 형이상학이 뒤범벅된 채 뛰어노는 ‘하나’의 세계. 비틀스의 <One>이 전세계를 휩쓰는 동안 우리가 본 것은 팝이 이제 그 ‘신화’를 상업화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신화의 일부인 조지 해리슨이 신화의 시간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12월3일 밤 6시, 영국 리버풀에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촛불 추모식이 있었고 9시30분에는 ‘전세계적 명상’이 있었다. 이 행사들에 참여하기 위해 수많은 팬들이 리버풀을 찾았다. 조지 해리슨과 ‘명상’은 잘 통한다. 비틀스 멤버들의 사이키델릭한 환각 체험의 일부가 인도 철학으로 ‘트리핑’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들 중에서도 조지 해리슨이 가장 적극적으로 인도적인 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인도의 기타라 할 수 있는 시타르에 심취하여 <리볼버> 앨범에 들어 있는 <Taxman>이라는 노래에서 시타르를 도입함으로써 일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당시에 히피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인도적’인 것이 얼마나 인도의 ‘정수’를 담고 있는지는 따로 따져봐야 하겠지만, 어쨌든 그는 상당히 진지하게 인도적인 것에 빠져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 다시 펼쳐보니 <All Things Must Pass> 앨범의 재킷에 있는 그의 사진은 마치 오랫동안 수행한 요기의 자태를 연상케 한다. 그가 생전에 ‘조용한 비틀’(Quiet Beatle)로 통했던 것도 이러한 그의 성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 별명을 얻은 것은 다른 비틀스 멤버들에 비해 그가 내성적인 성격을 지닌 탓도 있었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그의 작곡 실력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것이었으나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의 압도적인 개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된 감이 없지 않다. 후기 비틀스 시절에 가서야 그의 실력은 대중적인 평가를 받게 된다. <Here Comes the Sun>, <Something> 등의 명곡은 여전히 팝 사상 가장 뛰어난 서정성을 지닌 노래들 대열에 당당히 속해 있다. 또 그는 ‘대중음악 사상 가장 과소평가받은 기타리스트’로도 통한다. 비틀스 멤버들 중에 나이가 가장 어린 그는 이미 10대 중반에 당시의 리듬 앤 블루스 기타 주법을 마스터한 사람이었다. 사실 그가 초기 로큰롤의 단순한 리듬 플레이에서 에릭 클랩튼이나 지미 헨드릭스의 솔로 플레이로 넘어가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많이 평가되지는 않았다. 실제로 솔로 플레이어로도 그의 실력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특별히 주목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몇해 전에 발매된, 존 레넌의 데모 테이프에 비틀스 멤버들이 반주를 입힌 <Free As a Bird>에서 조지 해리슨이 들려준 슬라이드 기타 연주는 실로 그 아니면 해낼 수 없는, 단순하지만 그림같이 멋진 것이었다. 상당히 지속된 ‘인도 취향’
아마도 이러한 ‘평가절하’의 상황 속에서 그는 ‘허무’의 철학에 좀더 쉽게 빠져들었는지 모른다. 그는 ‘다른 비틀’(a different Beatle)이었다. 영리하고 발빠른 폴, 독설적인 존, 쾌활하고 낙천적인 링고 스타와 달리 그는 ‘그늘’ 속에 있는 듯한 비틀이었다. 다른 멤버들의 ‘인도 취향’이 그리 오래 가지 않은 반면 그의 그것은 상당한 지속성을 지닌 것이었다. 70년대 초반 그가 주도적으로 조직하여 성공을 거둔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도 인도지역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콘서트가 실제로 방글라데시의 기아를 해소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팝 스타들이 모여 제3세계를 돕는 콘서트를 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의 의의는 충분히 평가될 만하다. 또 그가 2억파운드에 달하는 자기 유산의 10% 넘는 돈을 ‘해어 크리슈나 종교단체’에 기부한 것도 그러한 점을 방증한다. 물론 대부분의 돈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올리비아와 그의 아들 다니에게 물려질 것으로 되어 있지만, 어쨌든 2억파운드의 10%라면 대단한 돈 아닌가. ‘해어 크리슈나 종교단체’는 조지 해리슨이 오랫동안 적극적으로 관여한 단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러한 종교적 이미지와 전혀 상반되는 이미지도 있다. 그의 아들인 ‘다니’라는 이름은 인도 계통의 어원에서 따온 단어이나, 원래 ‘부자’라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라고 한다. 유명한 비틀스의 일화 하나가 있다. 한번은 멤버들이 모두 중국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마침 돈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때 조지 해리슨이 자기 샌들 밑창을 뜯어내어 거기서 10파운드의 돈을 꺼내 지불했다고 한다. 돈이라면 전혀 무관할 사람 같아 보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에게는 폴 매카트니보다도 이재에 밝다는 평판이 따라다녔다. 그는 비틀스 멤버들 가운데 가장 성공한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가 활동한 사업 영역은 영화제작 분야다. 좋은 감독들이 만든 예술성 있는 영화에 투자하여 예술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둔 그는 영국영화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공로상까지도 받은 바 있다.
죽기 직전까지 비밀리에 음반 녹음
이러한 상반된 이미지들이 그의 삶에 공존했었고, 그 모든 것은 비틀스 신화의 일부로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리버풀의 버스 운전사의 아들로 태어나 비틀스라는 세기적 ‘현상’의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상상할 수도 없이 엄청난 돈과 명예, 그리고 ‘허무’의 철학을 쌓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늘 음악을 놓지 않았다. 죽기 전에는 암과 싸우면서도 <All Things Must Pass>의 발매 31주년 기념 디지털 리마스터링 앨범을 내놓기도 했다. 또 그가 죽기 직전까지 비밀리에 음반 녹음을 진행해왔다는 사실은 그의 ‘음악가 정신’ 앞에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그는 끝끝내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은 것이다.
이러한 음악적 저력을 지닌 것이 비틀스다. 그리고 그 저력이 바로 그들 신화의 가장 중요한 근거라 할 수 있다. 토니 블레어 수상이 그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하면서 “비틀스의 음악과 인격은 우리 생활의 백그라운드”라고까지 말한 것은 결코 헛말이 아니다. 유일무이한 비틀스, 전세계적으로 신화화된 비틀스는 그 옛날 인도와도 바꿀 수 없었다는 셰익스피어처럼 지금 영국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일지도 모른다.
글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

사진/ 조지 해리슨은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의 후광에 가려 '대중음악 사상 가장과소평가된 기타리스트'가 됐다. 전성기 시절의 비틀스. 오른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존 레넌,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폴 매카트니.(SYGMA)
그 신화의 일부인 조지 해리슨이 신화의 시간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12월3일 밤 6시, 영국 리버풀에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촛불 추모식이 있었고 9시30분에는 ‘전세계적 명상’이 있었다. 이 행사들에 참여하기 위해 수많은 팬들이 리버풀을 찾았다. 조지 해리슨과 ‘명상’은 잘 통한다. 비틀스 멤버들의 사이키델릭한 환각 체험의 일부가 인도 철학으로 ‘트리핑’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들 중에서도 조지 해리슨이 가장 적극적으로 인도적인 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인도의 기타라 할 수 있는 시타르에 심취하여 <리볼버> 앨범에 들어 있는 <Taxman>이라는 노래에서 시타르를 도입함으로써 일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당시에 히피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인도적’인 것이 얼마나 인도의 ‘정수’를 담고 있는지는 따로 따져봐야 하겠지만, 어쨌든 그는 상당히 진지하게 인도적인 것에 빠져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 다시 펼쳐보니 <All Things Must Pass> 앨범의 재킷에 있는 그의 사진은 마치 오랫동안 수행한 요기의 자태를 연상케 한다. 그가 생전에 ‘조용한 비틀’(Quiet Beatle)로 통했던 것도 이러한 그의 성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 별명을 얻은 것은 다른 비틀스 멤버들에 비해 그가 내성적인 성격을 지닌 탓도 있었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그의 작곡 실력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것이었으나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의 압도적인 개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된 감이 없지 않다. 후기 비틀스 시절에 가서야 그의 실력은 대중적인 평가를 받게 된다. <Here Comes the Sun>, <Something> 등의 명곡은 여전히 팝 사상 가장 뛰어난 서정성을 지닌 노래들 대열에 당당히 속해 있다. 또 그는 ‘대중음악 사상 가장 과소평가받은 기타리스트’로도 통한다. 비틀스 멤버들 중에 나이가 가장 어린 그는 이미 10대 중반에 당시의 리듬 앤 블루스 기타 주법을 마스터한 사람이었다. 사실 그가 초기 로큰롤의 단순한 리듬 플레이에서 에릭 클랩튼이나 지미 헨드릭스의 솔로 플레이로 넘어가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많이 평가되지는 않았다. 실제로 솔로 플레이어로도 그의 실력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특별히 주목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몇해 전에 발매된, 존 레넌의 데모 테이프에 비틀스 멤버들이 반주를 입힌 <Free As a Bird>에서 조지 해리슨이 들려준 슬라이드 기타 연주는 실로 그 아니면 해낼 수 없는, 단순하지만 그림같이 멋진 것이었다. 상당히 지속된 ‘인도 취향’

사진/ (SYGMA)

사진/ 비틀스의 해산 뒤에도 죽기 직전까지 조지 해리슨은 활발한 음악활동을 했다. 롤링스톤스의 믹 재거(오른쪽)와 함께 공연하는 모습.(SYGM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