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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마이크로 머신’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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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2-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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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S 기술에 기반한 초미세공학의 미래… 초정밀 센서·컴퓨터 방호벽 등에 적용

사진/ MEMS에 기반한 미세하드웨어 방호벽으로 해커를 잡는 이미지.
첨단의료 장비에 의한 원격수술이 이뤄지는 한 병원. 수술실에 있는 의사는 수술복장을 하지 않았다. 평상복 차림으로 모니터 앞에서 환자에 관한 자료를 살필 뿐이다. 그런 다음 첨단장비로 이뤄진 먼지만 한 로봇을 원격조정해 인체에 투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로봇의 크기를 수천배 확대해 보면 소형 잠수정을 빼닮았다. 실제로 로봇은 잠수정처럼 혈액의 흐름에 따라 체내를 여행하면서 환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물질을 제거한다. 만일 환자가 동맥경화라면 잠수정 형태를 순식간에 자동굴삭기로 바꾸어 막힌 동맥을 넓힌다. 로봇은 혈관과 세포 사이를 자체 동력으로 돌아다니면서 암세포나 혈전 등을 집중 공격한다. 환자는 로봇이 인체를 들쑤셔도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인체에 투입된 로봇은 임무를 마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초미세공학의 놀라운 가능성을 예고하는 미래의 수술 장면이다.

나노기술의 중간단계로 의학적 가능성 높아

원자나 분자크기를 조절해 초소형 로봇을 만드는 ‘미세전자기계시스템’(MEMS: micro-electromechanical systems)은 이제 공상과학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주사터널링현미경(STM) 같은 전자현미경으로 초미세 상태를 다루는 나노테크놀로지를 실현하기 위한 전단계 기술로 급속히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나노는 10억분의 1을 나타내는 단위로 1나노m는 10억분의 1m(머리카락 굵기의 5만분의 1 정도)를 뜻한다. 양자역학과 재료공학 등의 이론적 토대 위에서 나노 세계는 현실로 드러난다. 하지만 아직은 미소한 입자와 분자를 조작하는 도구의 수준은 초기 단계에 있다. 마치 손에 권투장갑을 끼고 가까스로 플라스틱 블록을 조립하는 정도이다. 현재는 나노에 이르는 중간 단계로 마이크로(100만분의 1) 수준의 기술을 실용화하고 있다.


MEMS는 의학의 획기적 전기를 모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바이오기술에 MEMS를 접목한다면 마이크로 엔진을 장착한 로봇이 인체의 유해물질을 손쉽게 제거할 수 있다. ‘디엔에이 랩칩’(DNA Laboratory a chip)은 피부에 대기만 하면 순간적으로 소량의 혈액이 흡입돼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 원료물질을 미세가공한 초미세 내시경이나 주삿바늘 등을 인체에 삽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반 약물이 쉽게 전달하지 못하는 치료약물을 미세로봇을 이용해 전달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미세로봇의 추진력이 부족하다는 어려움이 있다. 마이크로 엔진을 소형화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탓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박테리아 속의 매우 복잡한 단백질 집합체인 편모 구동장치를 닮은 시스템을 개발하려고 한다. 세포가 편모의 이동시키는 생물학적 회전모터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려는 것이다.

마이크로 기계장치들은 컴퓨터 칩처럼 실리콘과 금속을 층으로 쌓아 만든다. 겉보기에는 미세한 실리콘 칩처럼 생겼지만 용도는 훨씬 광범위하다. 실리콘 칩은 자료처리 능력만 있어서 수동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이에 비해 마이크로 기계장치들은 ‘움직임’이 자유로워 실리콘의 치명적 한계를 뛰어넘는다. 초기의 MEMS는 실리콘이 굽혀지면 전기 저항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하이웰사는 비행조종 장치용 유압센서를 개발했으며, 자동차회사와 협력업체들이 연료분사 자동차의 엔진 흡입구 압력을 모니터링하기 위한 센서를 개발했다. 이런 제품은 현재의 MEMS 기술이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았지만 잉크젯프린터 헤드와 의료용 혈압측정계 등은 MEMS 원형 제품으로 인정받았다. 1980년대 중반에 MEMS는 단순히 굽히는 원리를 뛰어넘어 진동하고 회전하는 부품으로 영역을 넓히게 됐다.

이미 마이크로 기계장치들은 소리없이 일상 속에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미국 아날로지 디바이스사가 개발한 MEMS 가속도계는 에어백 조절장치 가격을 획기적으로 낮추었다. 이 센서는 실리콘 구조물을 사용해 자동차가 충돌할 때 발생하는 충돌가속도를 감지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가장 성공한 MEMS 기술로 꼽힌다. 톱니바퀴 하나가 수십만분의 1m에 불과해 미세한 움직임에도 즉각 반응하기에 자동차가 충돌할 경우 순식간에 에어백이 작동하도록 한다. 이 센서를 미소로봇에 장착해 군사작전이 이뤄지는 특정 지역에 ‘매복’하면 상대의 움직임을 소리나 기류의 변화 등으로 감지할 수도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 기계공학과 콤스 케니 준 교수팀은 실리콘 기판을 가공해 기존의 센서보다 1천배 이상 뛰어난 초고감도 적외선 열 센서를 개발하기도 했다. 이 센서는 실온에서 100m 앞을 걷고 있는 사람을 감지할 정도로 성능이 뛰어나다. 상용화되면 생화학무기나 지뢰를 탐지하거나 인공위성에서 대기오염물질 등을 관측하는 데 쓰일 예정이다.

사진/ 미세 기어(위)와 꽃가루 크기의 기어로 움직이는 전기모터(아래)
그동안 소프트웨어에 의존한 컴퓨터 방호벽도 MEMS가 대신할 날도 멀지 않았다. 사실 내로라 하는 해커들이 판치는 상황에서 소프트웨어에 대한 믿음은 허망한 게 사실이다. 미국 산디아국립연구소에서 개발한 ‘초소형 조합형 자물쇠’는 최고의 기술을 가진 해커가 침입한다 해도 손을 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MEMS 기술을 이용해 만든 이 잠금장치는 현미경을 통해서나 겨우 볼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한 하드웨어 방호벽이다. 직경 300마이크론 이하의 크기의 소형 톱니 기어로 이뤄졌다. MEMS로 방호벽을 설치한 사람은 1에서 100만까지에서 특정한 값으로 자물쇠의 조합을 설정한다. 전체 잠금장치의 크기는 셔츠의 단추 크기 정도인 9.4×4.7mm로서 수백개의 장치라 해도 6인치 실리콘 웨이퍼 하나로 만들 수 있다. 이 잠금장치는 장보의 방호벽은 물론 시간제어 보안장치로 응용될 수 있다.

이제 마이크로 기계장치들은 다양한 형태로 실험실을 벗어나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MEMS 기술에 기반한 가속도계와 잠금장치의 뒤를 이어 수백만개의 마이크로 거울이 들어 있는 우표 크기의 칩, 꽃가루 크기의 기어가 들어간 전기모터도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 이런 미소 기계장치들은 기존 기계장치들를 대체하기도 한다. 수백만개의 초소형 거울이 더욱 선명하고 밝은 화상 프로젝터를 제공하며 초소형 모터는 핵폭탄이 사고로 폭발하는 것을 방지하는 안전장치로 쓰일 예정이다. 국내에서도 삼성종합기술원이 마이크로엔지니어링센터를 구축해 MEMS 관련 정밀기계와 소자개발에 나섰다. 핵심 개발 제품으로는 마이크로 자이로스코프 가속도계 등의 센서류와 하드디스크용 구동기를 비롯한 마이크로 액추에이터, 광메모리 광통신 소자 등이 있다. 초정밀 원자현미경을 개발하는 PSIA사는 MEMS 공정을 적용해 극미세 탐침을 5nm 이하로 소형화해 영상이미지를 고속으로 얻을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현존 생산설비 대체할 친환경적 기술

앞으로 MEMS에 기반한 마이크로 기계장치들은 20세기의 반도체 기술에 버금가는 기술로 21세기를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각종 시스템의 초소형화와 집적화를 통해 기존 가공 기술로는 구현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선보이는 것도 시기의 문제일 뿐이다. 가공 오차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물론 반도체 소자보다 낮은 전력으로 훨씬 수준 높은 기술을 구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게다가 원자와 분자를 마음대로 조절하게 된다면 미소한 영역에서 제품을 손쉽게 만들어 현존하는 생산기술을 대신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작은 시설에서 저렴하게 고성능의 제품을 생산할 것으로 기대된다. 분자 수준에서 물건을 만들게 되면 유해물질을 배출하지 않기에 환경적으로도 유익하다. 공장에서 더이상 유해폐기물과 대기오염 물질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MEMS 기술은 상용화 10여년 만에 산업현장을 혁명적으로 바꿀 첨단공학으로 떠올랐다.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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