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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출판기획의 고정관념을 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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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2-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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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종이박물관’프로젝트로 ‘올해의 출판인’에 선정된 사계절 강맑실 사장

서울 광화문 구세군회관 뒤편의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는 사계절출판사는 근사한 뒷마당을 가지고 있다. 붉은 벽돌로 감싸인 건물 뒤편의 담장만한 언덕을 오르면 바로 경희궁터가 펼쳐진다. 따뜻한 봄날이면 사계절의 강맑실(45) 대표는 출판사 식구들과 함께 도시락을 사들고 이곳 뒷마당으로 소풍을 나온다. 이곳은 종종 강씨의 집무실이 되기도 한다. 새로운 기획을 구상할 때, 작업이 예상보다 더디어져 머릿속이 부산할 때, 출간 기념 이벤트의 묘안을 궁리할 때, 그는 좁은 사장실을 슬그머니 빠져나와 이곳의 벤치에 앉는다. 그래서일까? <역사신문> <세계사 신문>, 그리고 <한국생활사 박물관> 등 출판계에 새로운 지평을 연 역사물 시리즈가 사계절에서 나온 건 강씨만의 독특한 집무실(?) 분위기와 무관해보이지 않는다.

‘역사책=지루함’도식 깬 <역사신문>

강맑실 대표는 성공한 국내 출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의 성공지표는 단순히 연 매출액 40억원이라는 숫자가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한탕주의적 일회성 기획이 난무하는 출판시장에서 그는 대규모의 장기 프로젝트를 뚝심있게 밀여붙여 성공한 ‘예외적인’ 출판기획자다. 95년부터 97년까지 6권의 책으로 묶어냈던 <역사신문>은 그의 기획력을 보여주는 한 예다. 통시적인 서술이라는 역사책 기술방식의 고정관념을 깨고 신문이라는 형식을 도입한 이 시리즈는 역사책=지루함으로 생각하는 청소년과 대학생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 지금까지 50만권 이상 팔려나갔다. 지난해 7월부터 발간돼 올해 5권까지 나온 <한국생활사 박물관> 역시 2003년 12권 완간을 계획하고 있는 장기 프로젝트. <역사신문> 제작이 끝난 97년부터 준비해온 이 시리즈는 편집작업에 참가하는 고정 인원만 30여명, 권당 제작비가 1억5천만원에 이르는 방대한 기획물이다.


“출판시장이 위기라고 울상만 지으면 뭐 하겠어요? 이럴 때일수록 독자들에게 읽히는 책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에 대해서 기획자들이 치열하게 고민해야지요. 박물관이라는 형식실험도 그 고민의 일환에서 나온 겁니다” <생활사박물관>은 멋으로 단 제목이 아니다. ‘특별전시실’ ‘가상체험실’ ‘야외전시’ 등 박물관의 공간적 구획을 도입한 이 책은 철저한 고증을 통해 재현한 그림과 틀을 깨는 입체적인 편집으로 하나의 거대한 ‘종이 박물관’을 만들어냈다. 이 시리즈는 “저자의 원고를 가공해서 출간하는 것이 아니라 출판사 안에 이 사업을 위한 상설 부서를 두어 자체 작업으로 진행한다는 점에서 기획출판이 부재한 우리 출판계에 모범적인 사례”로 인정받아 강씨는 지난 12월4일 한국출판인회의(대표 김언호)가 제정한 ‘올해의 출판인’의 첫 수상자로 선정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어릴 때 꿈은 교사였어요. 계몽사에서 나온 50권짜리 세계소년소녀문학전집을 1권부터 마지막권까지 표지가 해지도록 읽고 또 읽을 정도로 책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직접 책을 만들게 될 줄은 몰랐죠. 사계절의 편집장을 맡아 일할 때만 해도 이게 내일이라는 생각을 별로 안 들었어요” 강씨에게 맑은 골짜기라는 고운 우리말 이름을 지어주었던 국문학자 아버지가 권유하는 신학공부를 하기 위해 그는 사범대를 포기하고 한신대 신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민중신학자인 안병무 교수에게 수학한 그는 4년 내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하다가” 남편 김영종씨를 만났다. 82년 김씨는 자신을 포함한 직원 두명으로 사회과학전문출판사인 사계절을 열어 대학가에서 서서히 그 이름을 다져나갔다. 그러나 책 한권만 새로 내면 연례행사처럼 경찰서를 들락날락하느라 사무실의 자리는 비워져 있기 일쑤였다. 결국 남편이 87년 실형을 선고받아 사무실을 비우게 됐을 때 강씨는 대학원 졸업 뒤 일하던 한국신학연구소를 그만두고 사계절의 편집장으로 본격적인 출판기획에 뛰어들게 됐다. “90년대 초부터 손바닥 경제 시리즈나 교실밖 시리즈 등을 내면서 단조로운 기획에서 벗어나 영역의 다양화를 시도했죠.” 그러다 터진 게 93년 내놓은 <논리야 놀자> 등 ‘논리야 시리즈’ 3권이었다. 이 책은 때마침 수능도입으로 기존의 참고서 시장이 무너졌을 때 청소년들에게 대안적 학습서가 되어 100만질 이상 팔려나가며 인문서적 사상 최초로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 1위에 올랐다.

장기기획팀, <생활사박물관>을 탄생시키다

사진/ 2003년 12권 완간을 목표로 지난해부터 출간한 <한국 생활사 박물관>시리즈는 기획부재의 우리 출판계에 한획을 긋는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 성공이 모든 성공을 약속하지는 못했다. 새로운 투자들이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해 힘들었던 95년 대폭 확장했던 사업규모를 축소하면서 강씨는 사계절의 대표를 맡게 됐다. 그전부터 글을 쓰고 싶어했던 남편 김씨는 이참에 전업작가이자 중앙아시아 연구자의 길로 나섰다.

그가 부임한 뒤 상설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장기기획팀’은 사계절을 다른 출판사와 구별짓는 가장 큰 특징이다. 여기서 ‘신문 시리즈’와 <생활사박물관>이 탄생했다. “뛰어난 기획자 한명이 기획할 수 있는 단행본은 파이를 좀더 가져갈 수 있지만 팀작업을 통해 만들어지는 큰 기획물은 파이의 전체 크기를 키울 수 있습니다. 많은 출판기획자들이 이 점을 놓치고 있어요.” 장기기획과 함께 사계절의 강점은 장기적인 마케팅이다. 그는 책을 하나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라고 본다. “완성돼 나온 책은 아기고 기획자는 엄마인 거죠. 낳은 뒤에도 계속해서 보살피지 않으면 결국 책은 병들고 시장에서 죽게 돼 있습니다.” 사계절의 마케팅은 출간 직후 신문광고에 막대한 물량을 쏟아붓는 방식이 아니다. “책 못지않게 공을 들인 브로셔를 만들어서 관련학자들이나 전공 교사들에게 발송합니다. 청소년들에게는 1318북리뷰라는 신문형식의 홍보물을 만들어 동아리를 중심으로 배포합니다. 물론 일회성이 아닙니다. 적어도 2∼3년간 꾸준히 보내면 천천히 반응이 오지요. 천천히 데워진 만큼 그 불은 오래 갑니다.” 사계절의 책들이 베스트셀러보다는 스테디셀러에 오르는 이유에는 이런 장기적인 안목의 마케팅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를 위한 기획이란 없다고 봐요. 철저한 독자 모니터링과 사전조사를 통해 장기적으로 기획하고 또 꾸준히 마케팅하면 언젠가 비상의 순간이 오는 거죠. 마치 오랫동안 활주로를 달리다 이륙하는 비행기처럼요.”

그는 책장사를 결국 사람장사라고 본다. 인력이동이 잦은 출판계에서 사계절은 장기근속자가 많기로도 유명한 회사다. “책은 인간관계의 산물이자 관계 그 자체이기도 해요. 기획자와 저자, 경영자와 직원간의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고 독자와 제작자는 책을 통해 만나죠. 만날 으르렁거리고 권위를 강요하면서 만들어지는 책이 좋을 수 있겠어요?” 책을 만드는 일이 젊은 시절 사회운동을 하며 꿈꿔왔던 민주화를 실천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강씨는 생산물뿐 아니라 과정에 있어서의 민주주의를 무엇보다 중요시여긴다. 장기근속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요즘 청소년들 책 너무 안 읽어요”

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진출한 아동, 청소년물 기획에서 사계절은 업계 1,2위를 다투고 있다. 그러나 강씨의 고민은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청소년들이 책을 안 읽어도 너무 안 읽는다는 것. 특히나 인문학 서적은 교과서보다 더 지겨운 참고서 정도로 생각하는 게 아이들의 현실이다. 출판사 사장을 엄마로 둔 강씨의 중1짜리 아들 역시 마찬가지다. “틈만 나면 게임방으로 달려가고, 강제로 토론시간을 만들지 않으면 도통 책을 읽으려 들지 않아요.” 독서를 권장하기는커녕 가로막는 교육제도에 대한 불만이 많다. “그러나 어쩌겠어요?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가능하면 많은 아이들이 책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고민하는 게 출판기획자들의 몫이죠.”

강씨는 사계절의 책들이 5년 뒤, 10년 뒤에도 책꽂이에서 수시로 꺼내 볼 수 있는 책, 이사갈 때 슬쩍슬쩍 버려지는 책들 가운데 짐꾸러미에 살아남을 수 있는 책이 되길 바란다. 이런 바람의 결실인 <생활사박물관>이 완간되면 많은 독자들은 이사할 때 종이박스를 하나 더 준비해야 할 것 같다.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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