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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나만을 위한 ‘기술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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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2-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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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개별화시키는 현대 과학기술… 이익추구 메커니즘으로 근본적 성찰 방해

사진/ 과학기술은 인간을 개별화시키며 구별짓는다.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는 대중교통의 효율성을 당하지 못한다.(한겨레 장철규 기자)
대개 사람들은 공기처럼 자신에게 가장 친숙한 환경을 잘 깨닫지 못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기술도 그런 환경에 속한다. 우리는 기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이 얼마나 많은 기술에 의존하는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더구나 사람들은 기술이란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고 효율성을 높여주는 유용한 도구에 불과하며, 기술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물질적인 측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초가집이 아파트가 되고 달구지가 승용차가 되기는 했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자체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과학기술이란 중립적인 것이어서 사람이 그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이지 기술 그 자체는 인간에 대한 어떤 규정력도 갖지 못한다는 해묵은 ‘중립성 신화’도 한몫을 한다.

기술을 성역으로 만든 ‘중립성 신화’

특히 알아차리기 힘든 영향 중 하나는 현대 기술이 사람들을 파편화·개인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미국을 자동차 왕국으로 만든 헨리 포드의 대중적인 모델인 ‘T-모델’은 자동차를 대중화하는 데 성공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열차와 대비되는 운송수단의 개별화의 길을 열었다. 마을에 수도가 가설되고 TV가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집 밖으로 나오기 싫어하게 되었고. 소니의 ‘워크맨’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도 나만의 물리적, 심리적 공간을 만들어 그 속에서 음악을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터넷과 휴대폰의 급격한 보급은 사회적 의사소통을 개별화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개별화의 경향이 수반하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는 사유화이다. 즉, 이러한 기술변화에 뒤지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내 것’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전회사를 비롯해서 기술 개발을 주도하는 기업의 측면에서는 매우 중요한 요소인 셈이다. 공동체보다는 가족, 그리고 가족보다는 가족 구성원 개인들로 기술을 개인화하는 쪽이 장사에 유리하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놀이문화에서도 기술의 영향은 두드러진다. 대학가의 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던 당구장은 차츰 모습을 감추고 그 자리에 PC방이 들어서고 있다. 여럿이 즐기는 놀이는 당구까지도 매력을 잃고, 학생들은 사람 대신 기계와 마주앉는 쪽을 선호한다. 아이들의 놀이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해져서 휴일이 되면 컴퓨터 게임을 위해 가족들과의 나들이를 거부하는 아이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TV를 비롯한 언론매체의 광고들을 조금만 주의깊게 살펴보면 ‘나만의 공간’, ‘자유’, ‘나는 이기적이다’ 등의 메시지가 강조되면서 공동체와 대립되는 사적인 특성들이 주요한 덕목으로 칭송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항상 좋은 것과 동의어로 간주되는 신제품 속에는 이런 메시지들이 점차 강한 농도로 배어드는 셈이다. 어쩌면 광고 속의 신제품과 신기술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은 모두가 원룸에 기거하고, 가능한 한 다른 사람과 얼굴을 맞대지 않고 기계를 통해 의사소통하고, 직접 몸을 움직이기보다 기계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파편화되고 무기력한 인간형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신제품을 들여놓으면서 이런 메시지들을 조금씩 더 친숙하게 받아들인다.

사유화로 치달아 공동체 효율성 깨져

사진/ 가난한 사람들을 구매자로 만드는 유전자 조작식품.
이처럼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면 현대 기술은 큰 맥락에서 개인화와 사유화라는 궤적을 그리면서 발달해온 셈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술 속에 이미 그러한 경향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흔히 첨단 기술은 당연히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늘날 ‘좋은’ 기술은 결코 효율성만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출퇴근 시간이면 도로를 가득 메우는 승용차들은 저마다 첨단 기술을 자랑한다. 하지만 아무리 효율적인 엔진을 사용한 승용차도 같은 인원이 탑승한 버스나 지하철의 효율성을 당하지는 못한다. 에너지 파동이 일어날 때마다 대중교통 이용을 강조하고, 승용차 함께 타기 운동을 목청높여 외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내 승용차’라는 사유화된 공간의 이데올로기가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별화는 현대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기술의 규정력을 극대화하는 중요한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개별화를 통해 기술은 빠른 속도로 사회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가고, 사람들은 불과 몇년 전까지 그런 기술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지만 더이상 그 기술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오늘날 전자메일이나 인터넷, 휴대폰이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개별화는 거대 기술의 힘 앞에 개인들을 파편화해서 무기력하게 만들고, 잘못된 기술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나 저항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

가령 생물공학 기술의 영역에서 최근 현실화되고 있는 산전, 또는 착상전 유전자 검사는 유전적으로 완전한 ‘내 아기’에 대한 환상을 불어넣으면서 부모들에게 조금만 유전적 문제가 있어도 아기를 낙태시키고 싶은 유혹을 부추길 수 있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불리한 유전적 소인을 갖고 있다는데 과연 그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 있겠는가? 많은 윤리학자들이 산전 유전자 검사가 기술을 사유화해 개인적 차원에서 우생학의 망령을 불러오는 사태를 우려하는 것도 바로 그 지점이다. 이 경우 모든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발적인 의지로 낙태를 선택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국 산전 유전자 검사 기술 속에 내재되어 있는 우생학적 경향이 힘을 발휘하는 것이고 부모들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생학의 확산에 일조하게 된다.

더욱 얄궂은 일은 이러한 메커니즘이 기술을 사회적으로 제어하고 잘못된 영향을 바로잡으려는 노력까지도 개별화하는 미묘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해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마련한 최대 조치는 표시제이다. 표시제란 소비자들에게 유전자 조작 여부를 알리고, 그 이후의 판단은 개인들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유전자 조작 여부에 따른 가격 격차를 불러오기 때문에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국가나 계층에 유전자 조작 식품 구매를 강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정말로 그런 기술은 필요한 건가”

사진/ 착상 전 유전자 검사는 우생학의 망령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액체 질소탱크에 보관된 인간 수정란들.(한겨레21)
또한 최근 유전정보의 잘못된 이용을 막기 위한 조치로 많이 채택되는 ‘고지된 동의’(Informed Consent)도 유전자 샘플을 특정 연구나 의료 목적에 이용하겠다는 사실을 알리고 개인에게 동의를 구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런 조치들은 무척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과연 우리 사회의 개인들이 독립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만큼 기술로부터 자유로운가? 병원 진찰실에서 샘플을 위한 동의서 작성을 받았을 때 그 용도를 꼬치꼬치 물을 수 있을까?

이처럼 현대 기술이 갖는 개인화와 사유화는 단지 자본의 이익추구를 위한 장치에 그치지 않고, 기술 그 자체를 사회에 관철시키고 기술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방해하고, 그 잘못된 영향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주변화하기까지 한다. 요금이 비싸다거나 애프터서비스가 잘되지 않는다는 정도의 푸념은 받아들이지만 “왜 그 기술이 필요한가”, “대안적인 기술은 없는가”라는 좀더 근본적인 물음은 허용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기술은 이렇게 교묘하게 반박한다. “너도 지금 사용하고 있잖아?”

김동광/ 과학저술가 kwahak@now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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