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전제정치의 공포를 비추다
선왕·기득권에 저항하는 세자 중심의 이야기가 두드러지는 최근의 사극… 오늘날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정치 현실을 반영하는 걸까?
등록 : 2015-10-15 18:45 수정 : 2015-10-17 11:08
최근 사극의 두드러지는 경향 하나는 세자 중심의 이야기다. 지난해에는 최초로 광해군의 청년 시절을 다룬 KBS <왕의 얼굴>이 등장하더니 얼마 전에는 역시 처음으로 청년 이방원을 메인 주인공으로 내세운 SBS <육룡이 나르샤>도 방영을 시작했다. 지난 9월 종영된 MBC 판타지 사극 <밤을 걷는 선비>(사진)의 주인공 이윤 세자 또한 청년 정조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왕으로 더 익숙한 이들의 세자 시절뿐 아니라 사도세자, 소현세자처럼 기존의 낯익은 인물들도 재조명되고 있다. 지난해 방영된 SBS <비밀의 문>은 급진적 개혁가로서의 사도세자를 그렸고, MBC <화정>에서도 조선의 새 시대를 꿈꿨던 소현세자의 노력을 극 후반부 핵심 동력으로 삼았다.
눈여겨볼 점은 이 작품들이 취하고 있는 이야기 구조다. 세자 시절을 ‘좋은 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시작점으로 잡고 차근차근 영웅적 군주로 진화해가는 모습을 그리는 군왕사극의 성장서사와 달리, 최근의 세자 중심 사극들은 전제정치의 억압적 공포와 맞서는 투쟁기에 더 가까운 이야기를 그려간다. 그 억압적 주체는 대개 아버지 군왕이다. 이들은 정통성이 없는 왕이라는 출생의 콤플렉스를 공유하고 있으며, 이를 권력 집착과 전제정치로 풀어내려 한다. 기득권을 타파하려는 개혁적 성향의 세자들은 이들에게 아들이기 이전에 억압과 통제의 대상이다.
이들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아버지 왕 앞에 석고대죄하는 세자의 모습은 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밀의 문>은 틈만 나면 선위 파동을 일으키며 충성심을 확인하는 영조 앞에서 몇 번이고 엎드려 빌어야 하는 사도세자의 지친 모습으로 이야기 문을 열었고, <왕의 얼굴>에서도 아들 광해가 자신보다 뛰어난 성군으로 칭송받자 질시와 위협을 느끼고 폐위시키려는 선조 앞에서 석고대죄하는 세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화정> 역시 자신을 폐하려는 선조에게 밤새 석고대죄하는 광해 이야기로 시작해, 인조로부터 끊임없이 견제당하고 역모까지 의심받으며 엎드려 자비를 구하는 소현의 이야기가 결말부를 장식했다.
전제정치에 대한 공포가 더 뚜렷하게 나타난 사례는 판타지 사극 <밤을 걷는 선비>다. 이 작품에서는 백성의 고혈을 빠는 부패한 절대 권력을 말 그대로 흡혈귀라는 괴물로 형상화해 그에 지배당하는 조선의 공포스러운 현실을 그려냈다. 이러한 상징은 지난해 방영된 또 하나의 판타지 사극 MBC <야경꾼 일지>에서도 발견된다. 이 작품 역시 왕실 뒤에서 왕을 조종하고 광기로 몰아넣으며 조선을 지배하는 거대악의 존재를 묘사한 바 있다.
이러한 드라마 속에서 세자들의 최대 과제는 아버지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 극복 과정에서 사도세자, 소현세자처럼 죽음을 당하거나 광해, 정조처럼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는 군왕이 된다. 일견 상반된 결말처럼 보이지만 사도와 소현 또한 그들의 못다 한 꿈을 각각 정조와 효종에게로 이어 보낸다는 점에서 희망적 미래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사극이라는 장르가 본질적으로 오늘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은유의 드라마라는 점을 생각할 때 최근 작품들의 이같은 경향은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 현실에 대한 시대적 정서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국가정보원 개입, 언론통제 등 정부의 탄생 배경부터 정통성을 의심받는 상황마저 유사하다. 요컨대 세자 중심 사극은 제왕적 아버지 군왕을 통해 현실을 비춰내고, 그에 억압당하고 생존을 위협받으면서도 끝내 꿈을 포기하지 않는 세자의 모습을 통해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담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김선영 TV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