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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잔인한 나의 공허 나의 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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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1-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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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 프로젝트 앨범과 포토에세이집이 보여주는 ‘인간’ 김윤아의 모습

‘있긴 있는데, 그게 뭘까?’

록밴드 ‘자우림’의 음악을 듣다보면, 문득문득 치솟는 궁금증이다. 1집의 <밀랍천사>에서 3집의 <새>에 이르기까지 리드싱어 김윤아(27)씨의 노래들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자의식의 깊은 세계가 느껴진다.

“너에게 죽은 새를 선물할께/ 나의 회로는 전부 폐쇄됐어/ 그래 이제 나는 다 망가졌어/ 불에 타는 심장을 선물할께….”

‘의사소통의 불능’을 붙잡고 있는 이유


<새>의 한 부분이다. 밝고 경쾌한 밴드 이미지와는 다른 이 수상한 냄새의 정체를 공연장에서는 물론이고 지난해 3집 앨범 발매 때 가졌던 인터뷰에서도 시원스레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김윤아씨 스스로 이걸 풀어줬다. 이번에 처음으로 낸 솔로 프로젝트 앨범 ‘섀도 오브 유어 스마일’과 여기에 묶인 160쪽의 포토에세이집에는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었던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솔직한 내면이 잘 담겨 있다.

‘네 웃음의 그림자’라는 앨범 이름처럼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우울이 나른한 발라드에, 재즈에, 탱고에 실려온다. 이미 싱어송라이터로 ‘독보적인’ 자리를 일궈낸 그답게 작사, 작곡, 프로듀싱까지 홀로 한 음악은 밴드음악보다 덜 ‘자극적’이며, 귀에 살며시 감겨드는 맛이 달콤하기조차 하다. 우울한 건 노래말이다.

“피할 수 없이 잔인하게 나를 비추는, 나의 공허, 나의 우울.”()

“우리 사이엔 낮은 담이 있어 내가 하는 말이 당신에게 가 닿지 않아요.”(<담>)

이게 겉멋든 멜랑콜리가 아니라는 건 책에 실린 그의 글들이 말해준다. 동료와 남자친구가 갑자기 죽어 사라졌던 경험들, “온전한 의사소통의 불능”이란 주제를 일관되게 붙잡고 있는 까닭들, 어렸을 적부터 탐닉해온 음악이며 영화며 책들, 자우림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 가족과 친구들 이야기…. 비범한 감수성이 물씬 느껴지는 섬세한 글쓰기가 정겹기도 하고 ‘이러니까 이런 노래가 나오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자우림은 저럴 거야’라는 편견에 많이 시달렸어요. 글을 주의깊게 읽으면 김윤아가 보이는 대로 보이는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직장에서의 얼굴, 집에서의 얼굴이 다르잖아요. ‘자연스런 인간 김윤아’로 컨셉을 정한 거죠.”

글이야 그렇다치고 솔로 작업을 한 건 왜 그럴까? 데뷔 5년째임에도 자우림만큼 탄탄한 우애를 자랑하는 밴드가 별로 없으니 이를 해체의 전조쯤으로 짐작하는 건 오해일 테고.

“드럼, 베이스, 기타가 다 없는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밴드는 당연히 건재하지요. 멤버들을 세션으로 요청하지 않은 건 그들이 백밴드가 아니라는 당연한 생각에서 나온 거고. 또 자우림의 음악 스타일이나 비주얼이 일상적인 건 아니거든요. 그 엽기발랄한 비일상성이 저의 전부가 아니라는 거죠.”

이제 그 일상으로 들어가보자. 그가 겪은 심상치 않은 죽음들이 어떤 의미였을까? 의외로 ‘쿨’하다.

“죽음이 나를 예민하게 만든 건 아니에요. 죽음은 그냥 인생에 동반하는 어떤 것이죠.” 동물을 무척 좋아해 여러 마리를 키우는 그에게 “정을 쏟아냈는데 먼저 죽어버리는 슬픔 때문에 동물을 못 키우는 사람들이 꽤 많더라”고 했더니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주저없이 말한다. “살아 있다면 죽어야죠. 슬프다고 피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발랄함과 투사의 이미지 모두 거부

그의 화두는 죽음이 아니라 인간 그리고 인간 사이의 관계라고 한다. 소통불능의 주제에 매달리는 것도, ‘블루 데블’이라고 명명한 우울증이나 “공허 바이러스”를 늘 옆에 두고 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냥 저 자신으로 내려가니까 우울과 마주치더라고요. 그렇다고 ‘전 우울해요’라고 넋두리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건 더더욱 아니에요. 소통불능이란 주제를 잡고 있는 건 계속 부딪히는 문제여서 그래요. 연애를 비롯해서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은 이상론에 치우쳐 있어서 힘들 때가 많아요.”

에세이에서 그는 연애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고 쓰고 있다. 마침 애인이라고 알고 있던 뮤지션의 이름이 앨범 제작진에 들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연애할 맘이 없어서 헤어졌어요. 지금은 그냥 좋은 친구죠. 연애 안 하니까 일하는 게 즐거워요. 전 상대방에게나 관계 자체에 집중하는 편이어서 바쁜 일정까지 겹치면 양쪽 다 힘들어져요. 결혼할 때가 됐지만 그럴 맘이 전혀 없어요. 다행히 어머니는 ‘능력만 있으면 혼자 살아라’라고 하시고. 제 이상적인 결혼상은 남편이 옆집에 사는 거예요.”

그는 자우림을 마냥 발랄하고 경쾌한 밴드로 보는 걸 싫어하지만, 어떤 ‘투사’쯤으로 여기는 것도 분명히 사양했다. 솔로 앨범이나 에세이를 보면 앞으로 개인적이고 서정적인 음악으로 침잠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듣다고 묻자 단호하게 말한다.

“자우림의 팬들은 활기찬 <매직 카펫 라이드>가 아니라 개인적 고통을 말하는 <새> 같은 노래를 더 좋아해요. 오래 전부터 서정적이고 어두운 음악을 해왔어요. 자우림이 본의 아니게 발랄하게 보이는 것도, 본의 아니게 방송금지판정을 받은 노래들이 많아 록정신을 말하는 밴드로 보이는 것도 모두 틀린 거예요.”

또 이미 밝혀온 대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다시 확인하면서 “그 단어 자체가 불평등을 인정하고 있는 듯해서 싫기도 하고,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방식에 100% 동의할 수 없어서”라고 말한다.

토론 분위기로 가는 듯하던 이야기는 밴드의 드러머 구태훈씨가 그를 묘사한 말들, 예컨대 ‘정리걸’, ‘의리파’, ‘쇼핑퀸’ 등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그런데 ‘정리걸’이라니?

“동료들이 이런저런 의견을 말하면 각각의 의견이 지닌 장단점을 정리하고 이를 도표로 만들어 보여줘서 투표로 최종 방침을 결정하도록 해요. 어떤 강박관념 같은 게 있나봐요. 자우림 노래 중에 제 곡이 많은 것도 정해진 기일 안에 확실히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아주 일찍 작업에 들어가기 때문일 거예요.”

정리걸·의뢰파·쇼핑퀸…

그는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요즘 너무 바빠서 <물랑루즈>와 <아멜리에>를 보지 못하는 걸 아주 안타까워했다. 그러고보니 그가 최근에 대중과 만난 건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에 삽입돼 크레디트와 함께 인상적으로 흘러나오는 노래 <봄날은 간다>다(백설희씨가 부른 <봄날은 간다>와 전혀 다른 노래다).

“현실세상에서도 자기 의견을 마구 주장하는 사람을 싫어하는데, 영화 같은 문화쪽에서도 마찬가지예요. <8월의 크리스마스>도 그렇고 허진호 감독처럼 조용한 목소리로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게 참 좋아요. 유지태, 이영애씨 같은 근사한 배우가 현실세계의 남자와 여자로 나오는 캐릭터도 참 반가웠고요. 일상 같은 가상현실이긴 해도, 마지막에 막 울었어요.”

홍대 앞 인디밴드에서 출발해 앨범을 낼 때마다 20만장 넘게 파는 스타가 된 지 꽤 오래됐지만 김윤아씨는 더욱 섬세하고 사려깊어진 듯하다. 에세이 끝자락에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자 보세요, 인생은 이런 것입니다. 손에 쥐었다고 생각한 순간, 모든 것은 달아나 버립니다. 특히 중요하게 기억해야 하는 것은, 여러분이 정말 원하는 것일수록, 원하면 원할수록,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은 시험에 나오니까 잘 체크하도록 하세요.”

글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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