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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출사표 던진 사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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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1-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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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연의 창립기념토론회를 계기로 확산되고 있는 한국 사회민주주의 가능성 탐색

사진/ 사민연 발표자들은 "사민주의는 급진적 혁명의 가능성이 소진한 한국사회의 유일한 민주적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뭐 하자는 소린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사회민주주의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길로 바라보는 듯한데, 과연 한국에 좌파세력이 존재한 적이 있었습니까? 서구사회야 오랜 좌파 노동운동의 역사를 거치며 제3의 길이 나왔지만 여긴 좌익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무슨 제3의 길입니까?”(윤건차)

“한국사회도 이젠 일반 민주주의가 많이 발전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미국보다 한국이 더 민주화된 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중의 불만과 이익이 거침없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에 적합한 사회민주주의 이념과 정책을 선전하고 제안할 필요가 있습니다.”(유팔무)

왜 지금 사민주의인가


한국사회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11월19일 저녁 8시께 서울 프레스센터 19층 회의실은 이러한 물음을 따져보는 팽팽한 토론 열기로 뜨겁게 달궈졌다. 한국 사회민주주의연구회(이하 사민연)의 창립대회에 이어 ‘한국사회의 개혁과 사회민주주의적 대안’을 주제로 한 기념토론회가 열린 자리였다.

사민연은 박영호 한신대 교수(경제학)와 유팔무 한림대 교수(사회학) 등 사회민주주의의 길을 추구하거나 관심을 가진 일단의 지식인, 활동가들이 주축이 돼 1년8개월여의 준비를 거쳐 만든 연구모임이다. 그러나 한국적 사회민주주의 대안 연구와 교육, 홍보 등을 내걸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학술단체의 성격에 머무는 것만은 아닌 듯했다. 이날 창립총회에도 50년대 진보당에서부터 80년대 후반 사회민주주의청년연합까지 한국사회의 사민주의 정치운동에 참여해왔던 머리 희끗한 노년과 장년의 지식인 활동가들이 대거 참석했다. 60여 회원들이 참석한 창립총회에선 정태영 박사와 주섭일 <내일신문> 고문, 박영호 교수가 공동대표로, 유팔무 교수가 산하연구소 소장으로 인준받았다.

토론회에선 ‘지금 한국사회에서 왜 사회민주주의인가’의 문제가 핵심 쟁점이 됐다. 유팔무 교수와 윤도현 현도사회복지대 교수의 주제발표와 윤건차 가나가와대 교수(사회사상사), 정범구 의원(민주당),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주대환 민주노동당 마산합포지구당 위원장 등의 논평이 이어졌다.

사진/ 유팔무 교수는 "일반 민주주의의 과제가 크게 해결된 한국 사회에 적합한 사민주의 이념과 정책의 개발과 제안"을 강조했다.
유팔무 교수는 ‘총론, 왜 사회민주주의인가’에서 “한국사회는 그동안의 경제성장과 정치적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빈부격차 심화와 종속화, 안보의 미국예속, 보스정치 등의 후진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며 “그에 대한 여러 사회적 대안 가운데 사회민주주의야말로 가장 유력한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유 교수는 사민주의 이전의 기존 대안들을 3가지로 구분하고 이들 모두가 한국사회에 적확한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민중민주주의혁명론은 노동자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사이의 모순에서 발생한 옛 국가사회주의권의 문제를 답습했으며, 시민사회운동 역시 경제문제, 소유문제 등에 대한 대안을 결여한 채 작은 제도개선에만 매몰돼왔다고 그는 비판했다. 또 포스트모더니즘적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가 문제이며 서구 계몽시대 합리주의의 소산이라고 비판했지만, 결국 개인적 자유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규정했다. 윤도현 교수는 한국사회의 변화에 따른 혁명 가능성의 소진을 사민주의 대안의 근거로 들었다. “물질적 생활수준의 향상 등 자본주의 발전의 긍정적인 성과로 인해 한국사회의 변화방식에서 급진적 혁명의 의의는 사라지게 됐다.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광범위하게 형성된 임노동자층의 이익을 극대화하면서도 각계각층의 욕구와 갈등을 민주주의적으로 수렴해낼 수 있는 이념은 사회민주주의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민연의 주장은 첫걸음부터 거센 논쟁으로 이어졌다. 윤건차 교수는 “한국사회의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발전문제와 민족과 통일의 문제, 국제화와 국제연대의 문제를 실현할 수 있는 조직과 실천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보여줘야 한다”며 “오늘 사민연의 발표에선 지금까지 이뤄져온 다른 토론회와 내용상의 차별점을 찾기 어려웠다”고 비판했다. 그는 특히 이날 사민연 창립총회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가 낭독된 점을 지적하며 “왜 사민주의라는 인류 이상의 실현을 주장하는 이들이 국민의례에 담긴 국가권력의 문제에 대한 인식이 없는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질타했다. 윤 교수는 “일상에서 국가의 문제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이런 공식적인 행사에서부터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사민연쪽은 토론회 뒤 “프레스센터에서 ‘장소를 빌리려면 국민의례를 꼭 넣어야 한다고 했다’며 국기에 대한 맹세가 방송될 줄은 몰랐다”고 해명했다).

조희연 교수는 여백을 지닌 실천을 강조했다. “지금껏 사민주의 이념이 명확히 선언되지 않아서 운동이 도착된 것은 아니며, 기존 사민주의도 그 안에 인권과 환경, 외국인노동자의 문제 등 담지 못한 부분이 있었던 만큼 다른 대안들에도 가능성을 열어놓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는 “시민운동과 관련해서도 사민주의가 시장에 대한 공적 규제 등 시민운동의 진보적 지향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내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서유럽 수준의 조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진/ 브라질노동자당(PT)은 제3세계에서도 사민주의적 실천이 성공적으로 뿌리내릴 수ㅜ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제시된다. PT당수 롤라의 선거 포스터.
이날 토론회의 쟁점이 되진 못했지만, 사민연의 강령적 문건인 <한국 사회민주주의 선언>(사회와 연대 펴냄, 02-2238-9055, 1만9천원)에 담긴 일부 주장들도 앞으로 다른 견해들과의 부딪침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 책은 토론회 발표논문과 함께 서구 및 제3세계 사민주의운동의 역사와 이념을 짚는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서구사회만이 아니라 브라질과 타이 등의 사민주의 정당에 대한 평가를 함께 담고 있다. 특히 브라질노동자당(PT)을 새로운 개혁적 사민주의정당으로 규정한 송병헌 교수의 논문 ‘브라질노동자당-사회민주주의적 개혁정당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하여’는 한국적 사민주의 이념 및 실천의 형성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한국사회에서 사민주의 흐름은 90년대 초반 동구권의 붕괴 직후 잠깐 주목받았지만, 곧 포스트 담론과 신자유주의 담론의 폭발과 함께 사그라진 이력을 갖고 있다. 민중운동 다수와 급진 좌파이론 진영에선 여전히 “사민주의는 개량적 토대가 갖춰진 선진자본주의국가에서나 가능한 실천”이라며 폄하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송 교수는 사민주의운동의 성공에 꼭 서유럽 수준의 전제조건이 필수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는 “PT에서 보이듯, 일정수준 이상의 경제발전과 민주화, 제도화된 의회정치구조라는 최소한의 전제조건만 있다면 제3세계에서도 사민주의 정당의 발전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앞으로 사민주의의 현실화 가능성과 관련해 치열한 논쟁점을 형성할 만한 분석으로 보인다. PT를 “변혁방법론 및 정당모델 등의 관점에선 선거활동 이외의 대중참여적 운동을 중시한다는 대단히 개혁적 면모를 보이는 개혁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라고 규정한 부분도 “사민주의와 구분되는 민주사회주의의 전범”으로 PT를 이해하는 기존의 이론적 흐름과 부닥치는 지점이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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