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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캐릭터 오디세이/ 글쓰기, 살아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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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8-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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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스파이 해리>의 해리엣, <내 책상의 천사>의 자넷, <바스켓볼 다이어리>의 짐

(사진/내 책상위의 천사)
작고 어렸던 시절, 새 동화책을 사는 날이면 영락없이 손에 상처가 났습니다. 빳빳한 새 책장에 가늘게 벤 손가락에 맺힌 예쁜 핏방울과 갓 포장을 뜯은 책의 새큼한 향기는 하나의 기억으로 뭉뚱그려져 지금도 코앞을 맴돕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테지만 다음 순서는 머릿속에서 직접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이었지요. 밤이면 잠들 때까지 뒤척이며 알고 있는 모든 동화를 뭉뚱그린 이야기를 꾸미고 그것을 백지에 옮겨 적을 때 가슴에 번지던 흥분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가끔씩 생각하곤 합니다.

일기를 써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겁니다. 글을 쓰는 동안 우리는 그 글이 재현하는 우주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것은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 권력의 황홀한 맛이지요. 모든 사람과 사물을 나의 의지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채 나름의 길을 계속 가도록 풀어두면서도, 결국 그들의 존재를 언어로 규정하는 것은 펜을 쥔 나의 판단과 감정이니까요. <꼬마 스파이 해리>의 소녀 해리엣(미셸 트라텐버그)은 그런 권력의 ‘단맛’을 일찌감치 깨우친 아이입니다. 해리엣은 자기만의 전망대에서 이웃 아저씨, 아줌마의 감춰진 습관들을 엿보고 급우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머리에 새겼다가 꼬박꼬박 기록하고 소중히 간직하지요. 어린 날의 우리가 당돌하게 꿈꾸었던 것처럼 소녀는 종알거립니다. “온 세상을 보고 싶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적어두고 싶어.”

수줍은 열정의 소유자에게 글쓰기는 세상과 자아 사이에 깊이 팬 골을 메우려는 몸짓이기도 하지요. <바스켓볼 다이어리>의 방황하는 소년 짐(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글쓰기는 어지러운 외계의 소음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시키고 자기 공간을 확보하는 독백입니다. 후일 글쓰기는, 그에게 있어 마약중독이라는 검은 소용돌이를 건너 창조적 삶의 기슭에 내려주는 돛단배 노릇을 하지요. 또 <내 책상 위의 천사>에서 내성적인 빨강머리 소녀 자넷은 어느 날 숙제를 하다 시의 마력을 발견합니다. “밤그림자는 하늘을 덮고”라고 써야 맞다는 언니의 충고에 “난 ‘하늘을 만지고’라고 쓰고 싶은 걸?”이라고 고집 피우는 꼬마의 모습에서 미래의 작가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지요. 시인의 꿈을 품고 어른이 된 자넷은, 가족의 잇단 죽음과 대인기피증으로 정신병원에 수용됩니다. 그러나 오진으로 말미암은 뇌엽절제 수술을 받기 직전, 그녀의 소설이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자넷은 소생하지요. 말 그대로 죽음의 그림자에 계속 생을 잠식당하던 한 여성이 문학이라는 천사의 은총으로 숨결을 되찾은 셈입니다.

글은 아무리 정성들여 잘 써낸다 해도, 그림만큼 선연한 이미지를 그릴 수 없고 음악만큼 강렬한 감정을 전할 수 없습니다. 첫머리에 던진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보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가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은 무의미한 파편의 무더기 같은 삶의 흐름이 글자로 옮겨짐으로써 의미를 부여받는 기적의 매혹이 아닐까 싶네요. ‘캐릭터 오디세이’는 영화 역시 궁극적으로는 삶에 관한 이야기라는 믿음 위에, 영화 속 세계와 우리를 이어주는 ‘창’과 같은 존재인 캐릭터들을 통해 영화의 의미에 다가서려는 작은 노력이었습니다. 물론 영화 뒤에, 허구의 인물 뒤에 숨은 한 사람이 띄워 보낸 소심한 편지이기도 했고요. 그 편지의 수신인이셨던 당신이 영화 속에서 생의 조촐한 비밀들을 발견하실 때마다 저는 마음의 답장을 받게 되겠지요.


(편집자 주) 캐릭터 오디세이는 이번호를 끝으로 마칩니다.그동안 성원해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필름누에verme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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