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남해 먼 바다 거문도. 그중 동도(거문도는 서도·동도·고도 이렇게 세 개의 섬으로 되어 있다) 죽촌리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몇 해 먼저 태어난 언니 이름은 최모방이었다. 모서리에 덧대어 지은 방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둘째딸도 그 방에서 태어났는데 또 모방이라고 할 수는 없어서 아버지는 고민했다. 면사무소 호적계 직원이 수고를 대신해서 언니 이름과 비슷한 목례로 등록해주었다.
집에서는 뒤늦게 경엽이라고 불렀다. 공경할 敬에 잎 葉. 본인은 행정상 이름보다 경엽이라는 이름을 좋아했다. 그리고 평생 그 이름대로 살았다.
미래까지 짐작한 어머니가 한 말
미모가 뛰어나고 재치가 있는데다 성품이 진중해서 부모의 귀애를 받았다. 집안은 죽촌리에서 거의 유일한 기와집이었다. 가세가 곤궁하지 않았다는 소리이자 여자아이라면 다들 하게 되는 물질을 안 배운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학교엘 다니지는 못했다. 마을에 학교가 없었으니까. 서당은 있었지만 아버지가 보내지 않았다. 대신 열아홉에 맞은편 서도 덕촌마을로 시집을 보냈다.
남편은 일본의 어느 지방 스모 시합에서 우승을 한, 기운이 강한 사내였다. 그의 별명은 ‘소방수’였다. 동네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달려가 문제를 해결하는 버릇 때문에 생긴 거였다. 첫아들을 낳고 3년 뒤 딸을 낳았다. 일제강점기 말,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남편의 직업은 서일본기선회사의 ‘다까선마루’ 기관원이었다. 부산에서 여수, 거문도 거쳐 제주 다니던 배였다. 머잖아 그 배는 전시 임무를 띠고 차출이 된다. 일본 구레항에서 휘발유와 군인, 야포와 폭뢰를 싣고 사이판 마리아나군도까지 갔다. 도착한 다음에는 사이판섬 사이를 다니는 여객선이 잠시 되었다가 바라오 본청으로 소속이 넘어갔다. 바라오에서 짐을 싣고 인도네시아 바리코파발 다녀오다가 기뢰에 배 한쪽이 손상을 당했다. 함께 오던 배가 예인선을 부르러 갔다. 홀로 남은 배는 무인도에 바짝 대고 기다렸다. 밤에 미군 B25 폭격기가 다가와 폭탄을 세 개 떨어뜨렸다. 그중 하나가 기관실에 떨어졌다.
남편의 사망 통지서를 받고 일주일 만에 일본이 항복을 했다. 그리고 유복자인 막내딸이 태어났다. 24살. 세 자녀와 함께 먹고살아야 할 일이 눈앞에 닥쳤다. 섬에서 여자 혼자 돈을 벌려면 해녀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소라와 해삼을 잡고 전복과 미역을 땄다. 뒤늦게 시작했지만 천성이 성실하고 진지해 경험 많은 이들을 금방 따라잡았다. 하지만 네 식구 먹고 입고 자는 것은 빠듯했다. 인물 좋은 젊은 여자가 과부가 되자 접근하는 이들이 있었다. 우선 집주인부터 그랬다. 거절하자 괴롭혔다. 괴롭히는 방법은 많았다. 아이들이 무얼 어떻게 했다고 날마다 소리를 지르고 자신의 물건을 일부러 셋방에 쌓아두기도 했다. 자존심이 상한 그녀는 변소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이웃으로 이사를 했다. 친정 엄마가 찾아왔다. 엄마는 방 안에 앉아서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심지어는 미래까지 짐작하는 능력이 있었다. 한동안 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얼마간의 돈을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이것으로 쌀장사를 시작해라.” 물질과 더불어 그녀는 장사를 시작했다. 자신이 만든 것에 동료들 것을 사 보태서 장흥행 배를 탔다. 5일에 한 번씩 장흥에서 거문도로 화물선이 다녔다. 그녀는 미역과 다시마를 이고 장흥 내륙 마을을 찾아다녔다. 그것을 팔고 그 돈으로 쌀을 샀다. 돌아와 그 쌀을 팔았다. 끼니를 잇기 어려운 집이 적잖았다. 특히 보릿고개 시절에는 외상으로 쌀을 구하러 오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내주었고 갚으라고 닦달하지 않았다. ‘빵원’으로 돌아오다 자식들은 성장해서 결혼을 했다. 방구석에 쌀자루 묶어둔 수준이 발전하여 잡화 파는 구멍가게가 되었다. 밭일과 물질, 가게 일에 전력을 다한 덕에 머잖아 땅을 사고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구멍가게는 슈퍼마켓이 되었다. 물건 구입을 위해 스스로 글자를 배우며 육지를 다녔다. 손자·손녀에게 그때그때 물어보고 연습하고 외웠다. 시간이 흘러 아들네 식구들과 함께 여수에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했다. 모아둔 돈이 모두 들어갔다. 손녀 넷이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뒷수발했고 짬짬이 공장으로 일하러 다녔다. 막내가 대학엘 들어가자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판단하고 섬으로 돌아왔다. 스스로 말한 대로 ‘빵원’으로 돌아왔다. 다시 밭일을 하고 쑥을 뜯고 염소를 키웠다. 술도 마시지 않았고 담배도 안 피웠다. 그저 일만 했다. 부엌에서 밥 지을 때나, 갯것 해온 것을 손질할 때 간혹 ‘잘 있거라 나는 간다’로 시작되는 <대전부르스>를 한 번씩 흥얼거리기는 했다. 울지는 않았다. 그녀가 울었던 것은 환갑상을 받은 날 잠깐 동안이었다(그때 나는 고1이었는데 이 정도에서 밝혀야겠다. 그녀는 내 외할머니다). 손자·손녀가 모두 열 명인데 애정이 누구에게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오해받지 않았고 원망 듣지 않았다. 손주들 결혼할 때는 일관되게 100만원씩 주었다. 그 외에도 자신의 재산이 어느 정도 차면 자식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되풀이했다. 할머니 돈은 재수가 좋다는 소문이 일찍이 있었다. 덕분에 노름꾼들이 돈을 꾸러오곤 했다. 네 명이 화투 칠 때 순서대로 모두 꾸러온 적도 있었는데 그때 누가 땄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내려오지 않는다. 아무튼 개중에는 아직 안 갚은 이들도 있다. 내 동료 작가들이 찾아왔을 때도 모두 복돈을 받았다. 그 덕에 문학상을 타게 되었다고 말한 이가 여럿이었다. 아직까지 그 지폐를 지니고 있는 이들도 있다. 할머니는 특징으로 그들을 기억했다. ‘밥 잘 먹는 것’은 유용주 시인, ‘짜잔한 사람’은 박남준 시인, ‘머리 없는 양반’은 송기원 선생(그는 스님처럼 배코를 치고 다녔다)이었다. 특이하게 안동 사는 안상학 시인만 ‘안동 아자씨’라고 불렀다. 그들은 무심코 내뱉는 할머니 표현에 감탄을 하곤 했다. ‘꽃 피면 온다더니 열매 맺어도 오지 않네’ ‘요즘은 토요일이 3일 만에 돌아온다(시간이 잘 간다는 뜻)’ ‘(방문을 열다가) 하, 이슬비가 소리도 없이!’ ‘(커다란 풋고추를 내놓으며) 내가 밭에서 이걸 웃으면서 땄어’ ‘(소보루빵을 가리키며) 이것은 우에다가만 쪼금 찌클어놓은 것이라서 벨로야’, 누군가가 ‘운다고 옛사랑이…’ 노래를 불렀을 때 그녀는 듣고 있다가 고개를 저으며 ‘울어도 안 와’ 대꾸한 적도 있다. 귤을 어떻게 매다는지 모르는 모양인데…
그녀는 세상 모든 대상에게 인성(人性)을 부여했다. 죽어가는 화초도 할머니가 매만지면 되살아나곤 했다. 귤나무 이야기는 내가 자주 한 것이다. 아직 못 들은 사람 있다고 치고 잠깐 해보면 이렇다. 할머니는 귤나무를 키워보고 싶어 했다. 친척 한 분이 제주에서 묘목 두 개를 구해다 주었고 그녀는 마당에 붙어 있는 작은 텃밭에 심었다. 그런데 몇 년 동안 꽃만 무성하게 피우고 말아서 할머니는 혀를 차야 했다. “어째 너는 꽃만 피우고 마냐.”
어느 핸가(그땐 내가 육지에서 살고 있었다) 가을에 들어갔더니 커다란 귤이 하나씩 열려 있었다. “어, 드디어 귤 열렸네.” 내 말에 할머니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자세히 보니 명주실로 귤을 나무에 묶어둔 거였다. 그러니까, 샘플을 보여준 것. 네가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이것을 만들면 돼, 이런 뜻. 나는 웃었고 다음해엔 그 웃음을 취소해야 했다. 주렁주렁 귤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매사 이런 식이었다. 나무와 풀, 하늘과 바다, 장독대, 도구통, 심지어 귀신에게까지(현대의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가장 큰 게 이것이라고 나는 본다).
초겨울부터 늦봄까지는 쑥을 뜯었는데 떡 두 조각 가지고 와서 종일 그 일을 했다. 나는 그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곤 했다. 삼매지경에 들어간 듯했고 살아 있는 적막의 덩어리로 보이기도 했다. 나중에야 내가 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집에 가서 밥 묵고 가라믄. 밥그릇 라면도 있응게 묵고.” 밥그릇 라면은 컵라면을 이르는 할머니식 표현이다. 그녀는 손가락이 너무 굵어서 목장갑이 안 들어갔다. 나도 현장깨나 돌아다녔고 손가락 굵은 이들을 많이 만났지만 목장갑이 안 들어가는 경우는 할머니가 유일했다.
나와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물질 나가면 장작 들고 따라가 짐을 지켰고 산이나 밭에도 함께 다녔다. 나에게 물안경 쓰고 잠수하는 법을 가르쳐준 이도 그녀다.
“아이, 세상 살아보니 제일 좋은 것이 딱 시 개 있드라.” 언젠가 나에게 했던 말이다. 그녀가 지목한 세 가지는 가스레인지, 냉장고, 전기밥솥이었다. 그 말의 밑바탕에는 일제 치하, 봉건 잔재, 해녀와 홀어머니의 섬 생활, 숱한 노동을 통과해온, 어린 과부가 노파가 될 때까지 대한민국 변방의 여자 일생이 고스란히 깔려 있다.
고무신과 호미를 남겨놓은 채
지난번 산문집 내려고 원고 정리를 하다보니 그동안 내가 가장 많이 쓴 대상이 할머니였다. 그럴 만했다. 내가 소설가가 된 이유 중 하나가 할머니를 비롯한 섬사람들 삶을 기록해놓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스승으로 모신 사람이었으니까(정작 당사자는 몰랐지만).
말년에는 쓸쓸했다. 노년기 우울증도 좀 앓았다. 자신도 괴로워했다. 품위 있는 사람은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린다. 피폐해진 자신이 주변을 힘들게 하는 걸 못 견딘다. 보고 있기에 마음이 좋지 않아서 나는 돌아가시기를 바랐다. 사람은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죽을 때의 모습이 가장 큰 이미지로 남으니까. 그 전에, 품격을 유지할 수 있을 때 돌아가셨으면 했던 것이다. 내 품에서.
그거야말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시간이 좀더 흘러 지난 4월, 드디어 평온해지셨다. 고무신과 호미와 두름박과 빈 밭과 오래된 수건과 거문도 바다, 그 바람과 파도를 고스란히 남겨놓은 채.
한창훈 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남편의 사망 통지서를 받고 일주일 만에 일본이 항복을 했다. 그리고 유복자인 막내딸이 태어났다. 24살. 세 자녀와 함께 먹고살아야 할 일이 눈앞에 닥쳤다. 섬에서 여자 혼자 돈을 벌려면 해녀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소라와 해삼을 잡고 전복과 미역을 땄다. 뒤늦게 시작했지만 천성이 성실하고 진지해 경험 많은 이들을 금방 따라잡았다. 하지만 네 식구 먹고 입고 자는 것은 빠듯했다. 인물 좋은 젊은 여자가 과부가 되자 접근하는 이들이 있었다. 우선 집주인부터 그랬다. 거절하자 괴롭혔다. 괴롭히는 방법은 많았다. 아이들이 무얼 어떻게 했다고 날마다 소리를 지르고 자신의 물건을 일부러 셋방에 쌓아두기도 했다. 자존심이 상한 그녀는 변소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이웃으로 이사를 했다. 친정 엄마가 찾아왔다. 엄마는 방 안에 앉아서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심지어는 미래까지 짐작하는 능력이 있었다. 한동안 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얼마간의 돈을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이것으로 쌀장사를 시작해라.” 물질과 더불어 그녀는 장사를 시작했다. 자신이 만든 것에 동료들 것을 사 보태서 장흥행 배를 탔다. 5일에 한 번씩 장흥에서 거문도로 화물선이 다녔다. 그녀는 미역과 다시마를 이고 장흥 내륙 마을을 찾아다녔다. 그것을 팔고 그 돈으로 쌀을 샀다. 돌아와 그 쌀을 팔았다. 끼니를 잇기 어려운 집이 적잖았다. 특히 보릿고개 시절에는 외상으로 쌀을 구하러 오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내주었고 갚으라고 닦달하지 않았다. ‘빵원’으로 돌아오다 자식들은 성장해서 결혼을 했다. 방구석에 쌀자루 묶어둔 수준이 발전하여 잡화 파는 구멍가게가 되었다. 밭일과 물질, 가게 일에 전력을 다한 덕에 머잖아 땅을 사고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구멍가게는 슈퍼마켓이 되었다. 물건 구입을 위해 스스로 글자를 배우며 육지를 다녔다. 손자·손녀에게 그때그때 물어보고 연습하고 외웠다. 시간이 흘러 아들네 식구들과 함께 여수에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했다. 모아둔 돈이 모두 들어갔다. 손녀 넷이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뒷수발했고 짬짬이 공장으로 일하러 다녔다. 막내가 대학엘 들어가자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판단하고 섬으로 돌아왔다. 스스로 말한 대로 ‘빵원’으로 돌아왔다. 다시 밭일을 하고 쑥을 뜯고 염소를 키웠다. 술도 마시지 않았고 담배도 안 피웠다. 그저 일만 했다. 부엌에서 밥 지을 때나, 갯것 해온 것을 손질할 때 간혹 ‘잘 있거라 나는 간다’로 시작되는 <대전부르스>를 한 번씩 흥얼거리기는 했다. 울지는 않았다. 그녀가 울었던 것은 환갑상을 받은 날 잠깐 동안이었다(그때 나는 고1이었는데 이 정도에서 밝혀야겠다. 그녀는 내 외할머니다). 손자·손녀가 모두 열 명인데 애정이 누구에게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오해받지 않았고 원망 듣지 않았다. 손주들 결혼할 때는 일관되게 100만원씩 주었다. 그 외에도 자신의 재산이 어느 정도 차면 자식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되풀이했다. 할머니 돈은 재수가 좋다는 소문이 일찍이 있었다. 덕분에 노름꾼들이 돈을 꾸러오곤 했다. 네 명이 화투 칠 때 순서대로 모두 꾸러온 적도 있었는데 그때 누가 땄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내려오지 않는다. 아무튼 개중에는 아직 안 갚은 이들도 있다. 내 동료 작가들이 찾아왔을 때도 모두 복돈을 받았다. 그 덕에 문학상을 타게 되었다고 말한 이가 여럿이었다. 아직까지 그 지폐를 지니고 있는 이들도 있다. 할머니는 특징으로 그들을 기억했다. ‘밥 잘 먹는 것’은 유용주 시인, ‘짜잔한 사람’은 박남준 시인, ‘머리 없는 양반’은 송기원 선생(그는 스님처럼 배코를 치고 다녔다)이었다. 특이하게 안동 사는 안상학 시인만 ‘안동 아자씨’라고 불렀다. 그들은 무심코 내뱉는 할머니 표현에 감탄을 하곤 했다. ‘꽃 피면 온다더니 열매 맺어도 오지 않네’ ‘요즘은 토요일이 3일 만에 돌아온다(시간이 잘 간다는 뜻)’ ‘(방문을 열다가) 하, 이슬비가 소리도 없이!’ ‘(커다란 풋고추를 내놓으며) 내가 밭에서 이걸 웃으면서 땄어’ ‘(소보루빵을 가리키며) 이것은 우에다가만 쪼금 찌클어놓은 것이라서 벨로야’, 누군가가 ‘운다고 옛사랑이…’ 노래를 불렀을 때 그녀는 듣고 있다가 고개를 저으며 ‘울어도 안 와’ 대꾸한 적도 있다. 귤을 어떻게 매다는지 모르는 모양인데…
일러스트레이션 한주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