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혁명에서 피어난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 3D 애니메이션의 세계
“왜 하필 그 극장에 가려고 하지. 거긴 밤이 되면 택시 잡기도 힘들고 위험한데.”
호텔 직원이 말리고 나섰다. 첨단 시설을 갖춘 멀티플렉스가 위험지역에 있다는 게 의아스러웠다. 겁도 좀 났지만 물러설 정도는 아니었다. 전날 밤 히피들의 보금자리였던 헤이트 애쉬버리 거리를 밤늦게 걸어다녔어도 아무런 위험을 느끼지 못했던 터였다. 어둠침침한 조명, 약에 취한 듯 몸을 흐느적거리며 거리에 버티고 선 청년들, 어떤 상점을 들어가도 풍겨나는 묘한 향 냄새는 낯설지언정 위험과는 거리가 멀었다.
필름없는 배급은 혁명이다
샌프란시스코 남쪽 밴 네스 지역의 AMC 극장에는 <토이 스토리> 시리즈로 3D 애니메이션의 명가가 된 픽사 스튜디오의 신작 <몬스터 주식회사>가 한창 상영중이다. 호텔쪽의 만류에다 이미 기자 시사를 통해 관람을 마쳤음에도 이곳을 찾은 건 100%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몬스터…>를 영사기가 아닌 디지털 프로젝터로 상영중이었기 때문이다. 컴퓨터에 저장된 데이터를 필름에 옮겨서 영사기로 쏜 화면과 그 중간단계를 생략해 원래의 소스를 그대로 스크린에 쏜 것의 차이가 궁금했다. 화질이 확연히 달랐다. 털북숭이 괴물 설리의 털 한올 한올의 움직임이 생생히 느껴질 정도였고, 살짝 느낌만 준 그림자나 각도를 달리하는 조명이 인물과 소품에게 입혀준 입체감은 더욱 생명력 있게 다가왔다.
이젠 식상한 단어처럼 느껴지는 ‘디지털 혁명’이 영화쪽에 어떤 폭풍을 일으키고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현장을 ‘위험지역’ 한복판에서 만나는 아이러니라니(사실 어떤 위험도 감지하기 어려웠지만). <몬스터…> 상영 직전 내년 봄 개봉할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에피소드2> 예고편이 흘러나왔다. 100% 디지털카메라로 찍고 있는 이 영화의 화질은 섬세한 필름의 느낌과 다를 게 없었다. 루카스는 디지털 프로젝터를 설치한 극장에 <스타워즈 에피소드2>를 먼저 틀어주게 하겠다는 소문을 내고 있다. 대박이 분명한 이 영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극장들이 디지털 프로젝션 시스템을 설치할지 알 수 없으나, 이건 영화 혁명의 전조다. 필름없는 배급은 프린트 복사에 들어가는 배급 비용을 제로에 가깝게 줄인다. 게다가 위성으로 쏘아올린 디지털 데이터를 극장에서 직접 다운로드 받아 상영시키는 방식으로 전세계 동시개봉을 간편하게 해치울 수 있다. 이건 영화의 제작·배급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는 걸 의미한다.
실사영화는 디지털 혁명의 뒤를 좇고 있지만, 이미 그 한가운데서 피어나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게 3D 애니메이션이다. 지난 여름 개봉한 1억5천만달러짜리 <파이널 환타지>는 사이버 배우가 실제 배우마저 갈아치울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하지만 기술적 놀라움에도 불구하고 <파이널 환타지>는 극히 부진한 흥행성적을 보이며 ‘실패작’으로 판정받았다. 놀라운 실험작 <파이널 환타지> 이후 3D 애니메이션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다시 AMC 극장. 11월15일 저녁 8시15분에 상영을 시작한 <몬스터…> 스크린 앞에 앉아 있는 관객의 대부분은 뜻밖에도 10대 후반과 20대의 성인층이었다. 부모와 함께 극장을 찾은 유일한 어린아이가 괴물 설리와 귀여운 꼬마소녀 부가 안타깝게 헤어지는 영화 막판에 이르자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그 전까지 극장에 메아리쳤던 건 어른들의 이어지는 웃음소리였다.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까지 관객의 절반 정도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달 초 미국서 개봉해(국내 개봉 12월21일) 1억5천만달러 수익을 훌쩍 넘기고 2억달러 고지를 향해 달리는 <몬스터…>의 매력이 실감났다. <몬스터…>는 개봉 첫주에 6350만달러를 벌어들여 5740만달러의 <토이 스토리2>가 세웠던 애니메이션 첫주 흥행기록을 픽사 스스로 깼다.
그래픽보다는 이야기와 캐릭터에 중점
<몬스터…>의 흡인력은 발랄하고 정직한 웃음을 던져주는 데 있다. 아이들의 친구가 되고 싶어 안달하는 장난감 이야기로 성공한 픽사가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더 놀라게 할까 경쟁하는 괴물 이야기에 5년 가까이 공들였다는 점부터가 심상치 않다. 털 많은 괴물 설리와 외눈박이 마이크는 아이들의 비명을 에너지원으로 생산하는 몬스터 주식회사의 일꾼이다. 이 괴물 나라에는 아이와 접촉하면 죽음에 이른다는 모종의 이데올로기가 힘을 얻고 있는데, 천진난만한 꼬마소녀 부가 설리와 마이크의 친구가 되면서 이 금기를 깨뜨린다. 설리와 부의 아기자기한 우정 나누기도 즐겁지만 이 과정에 등장하는 FBI(미 연방수사국) 같은 경찰기구 CDA(Child Detect Agency)나 기업 생리를 가볍게 풍자하는 듯한 장면들이 잔재미를 준다. 그러고보면 이보다 앞서 비평과 흥행에서 크게 성공한 드림웍스의 3D 애니메이션 <슈렉>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슈렉>은 디즈니가 쌓아온 예쁜 동화의 세계를 노골적으로 조롱하며 상식을 사뿐히 뒤집는 캐릭터와 이야기로 웃음을 만들어냈다.
실제 배우가 필요없다는 투의 포토 리얼리즘과 진지한 철학으로 승부했던 <파이널 환타지>의 흥행 참패에 비해 <슈렉>과 <몬스터…>의 연이은 성공은 현재의 3D 제작 방향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봄과 가을 사이에 <파이널 환타지>류의 3D 제작이 현격히 줄고, <슈렉>처럼 밝고 명랑한 가족물 중심의 제작으로 급격히 바뀌고 있다는 게 분명하게 보였다. 기술력의 과시가 더이상 ‘3D의 정수’가 아니라는 걸 보는 듯했다.”
<아크> <리니지> 등 극장용 3D 애니메이션을 제작중인 디지털드림스튜디오의 서은숙 영상부문장이 지난 봄과 가을 프랑스 칸에서 각각 열린 견본시 MIP TV와 MIP COM을 둘러본 결과다. 3D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만화영화다운 익살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시장논리’가 계율처럼 굳어지는 듯한데,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픽사 스튜디오에서 만난 간부들은 한결같이 이 점을 강조했다.
“픽사의 관심사는 그래픽이 아니라 이야기와 캐릭터다. 겉모습만 화려한 건 엔진없는 자동차를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파이널 환타지>가 비주얼은 아주 뛰어나지만 흥행에 부진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사이버 배우의 창조에 관심이 없으며 지금까지 그랬왔듯 앞으로도 이야기와 캐릭터에 승부를 걸어나갈 것이다.” (<토이 스토리2>의 감독이자 <몬스터…>의 공동감독을 맡은 리 언크리치)
“<파이널 환타지>는 기술적으로 굉장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사이버 배우의 연기를 잭 니콜슨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도 새삼 알려줬다. 앞으로 비주얼은 계속 발전하겠지만 이를 인간적 관점에서 어떻게 잘 살려내는가가 관건이다.”(기술감독 토머스 포터)
<파이널 판타지>의 가능성을 열려 있다
현지에서 확인한 픽사의 놀라운 기술력과 고급인력은 스토리와 캐릭터의 수하일 따름이었다. 할리우드 직배사들이 한국영화와 맞붙기를 두려워할 정도가 됐지만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척박한 영토로 남아 있는 국내 상황은 어떤가. 손으로 직접 그림을 그리는 셀 애니메이션은 실패를 거듭해왔지만, 3D 애니메이션쪽에선 의미심장한 변화와 뚜렷한 성과를 내고 있다.
처음부터 미국시장을 겨냥해 만든 텔레비전 시리즈 <큐빅스>로 대박을 터뜨린 시네픽스(대표 황경준)는 작품에 접근하는 태도나 제작방식이 ‘한국의 픽사’ 같다. 지난 8월 중순 미국 공중파 키즈워너브러더스를 통해 방송을 시작한 순도 90%의 국산 3D 애니메이션 <큐빅스>는 출발하자마자 일본의 <포켓몬> 다음인 시청률 2위를 기록하더니 지난 10월6일 방영된 8편에선 공중파와 케이블을 통틀어 1위를 차지했다. 사운드 입히는 것말고는 모든 과정을 국내에서 제작하는 <큐빅스>의 인기 비결은 독창적이면서도 따뜻한 로봇 캐릭터와 20분이 짧게 느껴지게 만드는 아기자기한 이야기에 있다. “뛰어난 스토리를 위해 어떤 투자도 아끼지 않는다는 게 회사 방침”인 시네픽스는 온실효과로 남극의 얼음덩어리가 녹아내린 뒤 인간의 친구이자 잠수복이 된 로봇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아쿠아 키즈>를 2탄으로 제작중이다.
다른 한편에선 시네픽스보다 훨씬 공격적이고 폭넓은 디지털엔터테인먼트 사업을 벌이고 있는 디지털드림스튜디오(DDS·대표 이정근)가 버티고 있다. DDS는 마이크로소프트사가 게임 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이달 미국서 출시한 비디오 콘솔 게임기 ‘X박스’에 들어갈 3D 게임 소프트웨어의 개발권과 배급권을 따낼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DDS의 야심작은 내년 여름 전세계 동시 개봉 계획을 세워두고 있는 극장용 3D 애니메이션 <아크>다. 오우삼 감독과 미국의 세계적 매니지먼트사 윌리엄모리스에이전시와 공동으로 제작중인 <아크>는 <슈렉>이나 <몬스터…>와 달리 <파이널 환타지>의 장르를 취하고 있다. 사실적 인물들과 신화적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 SF물이기 때문이다. <파이널 환타지>의 흥행부진은 DDS를 바짝 긴장시켰다. 서은숙 영상부문장은 “<파이널 환타지> 이후 <아크>의 시나리오를 손봐서 좀더 밝은 느낌을 주면서 감동과 유머의 여지를 넓혔다”고 말했다.
3D의 흐름이 하나로 모아지고 있지만 <파이널 환타지>가 3D 애니메이션의 또다른 혁명을 불러올 것이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파이널 환타지>가 실패했다고는 해도 국내에서만 30만명 가까이 봤다. 반(半)실사영화에는 분명한 틈새시장이 있다. 다만 모험일 뿐인데, 먼저 치고 나가면 선점기회를 누릴 수 있다. 우리가 아니더라도 3D의 한 장르로서 언젠가 다시 시도될 것이다.”(정광철 DDS 제작이사)
한국의 3D 애니메이션은?
이런 의견에는 시네픽스도 동의한다.
“<파이널 환타지>류와 <몬스터…>류의 두 시장이 동시에 갈 수밖에 없다. <파이널 환타지>는 컴퓨터그래픽이 실사를 완벽히 대체할 수 있음을 보여준 <터미네이터2>와 <쥬라기 공원>에 버금가는 사건이다. 앞으로 5∼10년 사이 실사영화 같은 3D가 주류가 될 거다. 이게 국내에서 중요한 건 한국영화가 미국 시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는 것이다. 이를 위한 기술축적이 필요할 때다.”(조신희 시네픽스 사장)
나아가 시네픽스는 전세계 대부분의 극장이 10년 안에 샌프란시스코의 AMC 극장처럼 디지털 프로젝션 시스템을 갖추게 될 거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이 야심찬 ‘한국의 픽사’는 필름으로 최종 작업을 마친 <몬스터…>와 달리 제작과 상영을 모두 디지털로 끝내는 환경이 올 때쯤에 맞춰 내놓을 극장용 3D 애니메이션 준비에 들어갔다. 지난달 조지 루카스가 사용하고 있는 디지털카메라(소니가 개발한 디지털카메라에 파나비전 렌즈를 부착)를 들여오고, 영화편집이 가능한 HD 편집기계를 설치해 시험운용하며 기술축적에 들어간 상태다. 한국의 3D 애니메이션은 언제 어떻게 실사영화를 바꾸어 놓을지 알 수 없는 ‘디지털 혁명’ 대열에 착실히 동참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