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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우리는 고등학생 시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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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1-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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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가겠다는 안양고 NGO 탐구반 아이들의 꿈

사진/ NGO 탐구반 임원들. 왼쪽부터 강민석, 이주형, 김유경, 차진태.(박승화 기자)
안양고 NGO 탐구반 3기 기장 차진태군은 5시에 만나기로 했지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휴대폰으로 연락을 해보았다. “고객은 전화를 받을 수 없사…” 하는 소리만 들렸다. 막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는 교문 앞에서 기다리기를 몇분, 전화가 울렸다. 기장은 교실 청소중이니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먼지와 물이 뚝뚝 흐르는 대걸레, 청소는 인터뷰에 앞선다.

모범이 되려면 졸지 말자?

우리는 원래 학교 앞 떡볶이 집 아니면 좀더 우아한 돈가스집쯤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그러나 엉겁결에 장소는 남 선생님 휴게실. 어수선한 분위기를 반드시 증축 공사 탓으로만 돌리기엔 뭣한 방이었다.


이 학교 동아리인 NGO 탐구반은 학교운영위원회의 학생참여를 놓고 많은 주목을 받아온 모임이다. 민주시민 양성은 교육현장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을 실천으로 옮긴 것이다.

2학년 차진태, 김유경, 이주형 그리고 1학년 강민석. 2기 기장 유형우도 참석하기로 했었으나 진태의 불찰로(백만인의 실수 즉, 목요일을 금요일로 잘못 연락) 함께하지 못했다. 지도교사인 김원태 선생님은 학교운영위원회에 참석중이셨다.

운영위원회 회의에 학생들도 참여하고 있나요? “아니요.” 기장이 얼른 대답했다. “아직은요. 저희가 운동을 시작할 때는 참여에 앞서 참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른들이 하시는데 학생이 구경이라도 했으면 해서요. 학생들한테 서명을 받아서 저희 뜻을 교장선생님께 전달하기로 했었는데… 논리적으로 타당한 이유가 아니라, 그냥 안타깝게 끝나버렸어요.” 사전허가 없이 서명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꾸중을 들었다. 이 학교 교장선생님은 같은 연배 어른들에 비해서 상당히 열려 있고 학생들 입장도 많이 이해해주는 분이시라 한다. 하지만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 게 아니냐는 입장이신 듯하다.

“그래서 아예 제도적으로 바꾸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굳히고 참관이 아니라 참여하기로 목표를 세웠습니다. 다른 학교와 함께하는 것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국학생연합과 연대할 계획도 있습니다.”

주로 ‘사회인들이나’ 하는 뾰족한 일을 한다는 어른들의 생각을 밀치면서 활동하기란 쉽지 않다. 주위에서 ‘평균 중2’로 본다는 앳된 외모의 진태는 NGO 활동으로 인생관이 많이 변했다고 한다. 전체를 대표한다는 중압감과 선생님들과의 접촉에 상당히 신경이 쓰인다고 고충을 토로한다. 이 반원들은 타의 모범이 되기 위해 수업시간에 졸지 않기 등등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다고 말했다.

NGO 탐구반의 자랑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 중에서 남들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찾아내어 바꿔보자는 것이 저희 목적입니다. 각 서클마다 목적이 있고 자기 특성껏 활동하니까 굳이 자랑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어요.” 유경의 대답이다. 자신이 설정한 목적을 향해 매진하면 그뿐 괜히 허세를 부릴 일이 없다는 말이다. NGO 탐구반은 환경, 언론, 학운위팀 3개 분과로 이뤄져 있고 전체 31명. 남녀비율은 반반이다. 어째서 오늘 참석자 중 여학생은 혼자이신가요? “임원들이 참여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을 뿐”이라며, 자랑스런 1대 기장은 여학생이었다는 점을 유경이가 강조한다.

아이들의 페미니즘 논쟁

사진/ 안양고 NGO 탐구반은 학교운영위원회의 학생참여를 놓고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박승화 기자)
시립 도서관 개방시간 연장운동을 위한 민원활동, 거리 캠페인, 그리고 참여연대 방문, 서울 NGO 세계대회참관, 게다가 시민운동 이론공부 등등. 한달에 한번 토요일에 할당된 특활시간으로는 모자랄 텐데 학업에 방해를 받진 않을까?

“여러 매체를 접하고 활동영역도 다양하니 오히려 생각을 많이 하게 되어 공부에도 도움이 돼요. 또 시간을 더욱 값지게 보낼 줄 알게 되고요.” 민석이가 말했다.

남녀공학으로 고교 시절을 보내는 이들에게 성별간의 벽이나 환상은 없을까? 유치원 때 이미 환상이 깨졌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여학생은 천사라고 생각하는 남중학교 출신도 있다고 한다. “제 친구 중에는 여자는 이슬만 먹는 줄 알고 있었다는 애도 있어요.” 주형이가 말했다.

이슬이라, 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유경은 “남학생이 여학생에 비해 좀 띨한 데가 있지 않으냐”는 질문에 즉각 동의했다. “답답한 데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고 잘라 말한다. 그런데 왜 고등학교 때, 아니 대학 때까지도 더 똘똘하던 그 많은 여학생들은 어디로 가고 사회지도층에는 남자들이 더 수두룩한가에 대해 질문해 보았다.

“그건요. 남성중심 체제인 사회구조가 문제이긴 하지만 여학생들 스스로도 안 되면 시집이나 가지 하는 생각을 은연중 많이 하는 듯해요. 남자애들은 가족을 먹여살려야 하니까 뭘 해도 한다는데 비해서 말이지요.”

시종일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민석이가 이를 받았다. “저는요, 페미니즘, 여권신장활동에 대해서 찬성하는데 여학생들이 이중적인 의사를 가지고 있다고 봐요. 자기들 권리에 대해서는 막 말을 하다가, 심지어 출석부 순서나 사물함의 위치에서도 성차별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다가도, 막상 힘들고 책임져야 할 때는 여자니까 하면서 싹 빠져버리거든요. 권리주장을 하는 것은 중요하고 옳은 일이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다고 봐요. 귀찮으면 페미니즘 속으로 숨어버리는 행동은 좀 그렇잖아요.”

우리는 참석자가 모두 표정이 풀렸으니 사진 찍기에 괜찮은 시점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마침 언론분과에서 회의중이라니 함께 사진 촬영을 하는 게 좋을 듯했다.

“어, 그런데요. 가서 미리 말해야 돼요.” 말은 무슨, 그냥 가서 찍자, 어른들이 밀어붙였다. “안 돼요.” 주형이는 허가를 받아야 한다며 황급히 사라졌다가 금방 왔다. “모두들 너무나 심각하게 얘기중”이라 말도 못 붙이고 왔단다. NGO 반 토론은 피 튀기듯 팽팽하게 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그럼 국회의원들 몸싸움을 이해하겠군.

“아니요. 우리는 양쪽이 지나치다 싶으면 누군가 제재를 하고 또 금방 냉정을 되찾아요.” 얼마 뒤 낭보가 전해졌다. “가요, 전부 거울 보고 난리예요.”

토론의 열기로 교실은 후끈 달아 있었다. 특히 덩치가 큰 1학년 이동민은 왕여드름. 옆에 있으면 옮지 않나? 난 슬며시 내 뺨에 손을 대보았다. 이때 “앗, 피!” 동민이는 티슈를 얼굴에 붙인 채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했다. 누군가 진태에게 물었다. “형, 또 의자 하나 갖다 놓을까?” 후배의 덩치에 가려 행여 선배가 안 보일까 염려하는 목소리였다. 형이 의연하게 말했다. “아니, 그냥 둬.”

안양고는 아직 비평준화 고교. 특정지역 특정고교 출신이면 학연, 지연, 혈연과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비평준화야말로 학연, 지연, 혈연의 단단한 기반이다. 그런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고교 평준화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민석이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집에서는 가방을 열기보다 컴퓨터를 여는 게 습관이라는 주형이는 ‘잘한다는 아이들’이 모이는 이 학교로 오지 않으려고 기를 썼지만 부모님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노라고 고백했다.

교내에 모두 60여개 동아리가 있어서 일일이 방을 배정받기가 힘든 실정. 그래서 알아서 방을 잡아 회의를 해야 한다. 이때 오늘 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왔다가 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성공회대학 청소년 문화공간 ‘깨다’의 김병내 신부가 “언제든지 우리에게 오라”며 ‘깨다’센터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참, NGO 탐구반이 지난 11월 초 학생의 날, 성공회대학이 주최한 전국 청소년 NGO 올림피아드에서 교육부장관상을 탔다.

“시민운동은 도덕적으로 완전해야 하나요?”

학교 내에서 시민운동하는 학생들은 어른들의 시민운동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른들은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은 무조건 100퍼센트 완벽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해요. 도덕적인 완전성을 요구하는 거지요. 그리고 거기에서 한치라도 어긋나면 운동 자체에 대한 비난을 서슴지 않아요. 그런데 이런 성향은 시민운동을 일반인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 된다고 봅니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겁나게 똑똑하다. 어른들이여, 하루라도 책 읽지 않으면 추월당한다. 아니, 이미 추월당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자율적으로 실시하는 자율학습을 위해 교실마다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불빛 아래서 고등학생들은 주로 입시공부를 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아니다. 그들의 눈빛은 그보다 훨씬 멀고 높은 데로 가 있다. 아무도 넘보지 못한 세상, 무한한 선택의 바다. 그곳을 서핑한다. “지금 내 눈에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세상을 언젠가 내 손으로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고 싶다”는 진태와 그의 멤버들.

‘세상을 만들어가는 아이들!’ 그들이 있어 행복한 세상이다.

권은정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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