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기레이! 지하철 1호선 도착

385
등록 : 2001-11-21 00:00 수정 :

크게 작게

시부야의 밤을 뜨겁게 달군 초청공연… 차갑기로 유명한 일본 관객을 웃기고 울리다

“기레이!”(좋다) 객석에서 박수와 함께 탄성이 터졌다. 일본 관객뿐이 아니었다. 독일인들은 “분더바!”(놀랍다)를 외쳤고, 미국인들은 “원더풀!”(훌륭하다)을 연호했다. 지난 11월15일 저녁, 도쿄 중심가 시부야의 분카무라 고쿤 시어터는 한국에서 온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남긴 감동이 초겨울 밤 쌀쌀한 날씨를 날려버렸다. 일본 국제교류기금(재팬 파운데이션)과 아사히신문사가 극단 학전을 초청해 선보인 이번 공연의 첫날, 서울에서 도쿄 한복판으로 날아간 젊은 배우들은 그렇게 세계인들 마음속에 한국문화가 지닌 힘을 강하게 남겼다. 5인조 록밴드인 ‘무임승차’가 긴 여음을 남기며 피날레를 장식하자 박수가 쏟아졌고, 계속되는 커튼콜에 화답하는 배우들 얼굴이 자부심으로 빛났다. 뮤지컬에서 한수 위라고 자부해온 일본 연극판이 놀라움으로 들썩인 순간이었다.

“일본 뮤지컬에선 찾아볼 수 없는 경이”

사진/ 예정된 환호? 극단 학전의 <지하철 1호선>이 독일, 중국에 이어 일본에서 커다란 찬사를 받아냈다. 보통사람들의 속내가 깔린 지하철 풍경을 잘 잡아낸 점에 큰 박수를 받았다.
11월15일부터 18일까지 나흘 동안 열린 뮤지컬 <지하철…> 일본 공연은 우리의 해외 공연사를 다시 쓰는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지하철…>을 초청한 국제교류기금의 무대예술 담당자인 유키 하타(47)는 이번 공연의 ‘정당성’을 여러 번 강조했다. 알음알음 뒷구멍으로 들어온 친선 차원의 무대가 아니라, 당당하게 실력을 인정해 적절한 공연료와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모셔온’ 공연이라는 것이다. 그는 “도쿄 중심가의 이렇게 크고 이름난 극장에서 S석 6천엔, A석 5천엔이라는 1급 입장료를 받으며 공연한 건 한·일 문화교류사상 드문 일”이라고 했다. “<NHK>가 방영료 1천만원을 지불하며 공연 전체를 녹화한 것 또한 이 작품의 우수함을 인정해서”라고 덧붙였다.


관계자의 이런 설명은 800석 자리가 꽉 찬 극장의 열기가 증명하고 있었다. 얌전하고 차갑기로 이름난 일본 관객, 반응없기로 유명한 일본인들이 웃고 박수치는 모습을 본 재일동포 조동현씨는 “이건 사건”이라고 크게 기뻐했다. 객석에서 만난 미야타 고스케(와세다대 영문학과3)는 “뒷골목으로 숨어들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이 느껴졌고, 그럼에도 삶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고 사랑을 찾아가는 ‘안경’ 역에 끌렸다”고 소감을 털어놨다.

<지하철…>은 김민기씨가 10년을 다듬어온 한국 뮤지컬의 대표작이다. 백두산에서 만난 약혼자 ‘제비’를 찾으러 서울에 온 옌볜 처녀 ‘선녀’가 하룻동안 지하철 1호선 역 주변 사람들과 끈끈한 정을 나누며 절망 속에서 다시 희망을 찾는다는 훈훈한 음악극. 개발독재의 광풍 속에서 신음하던 한국 현대사를 밑바닥 사람들 시선으로 훑어가는 김민기씨의 두터운 통찰력이 음악 속에 잘 녹아들어 있다. 일본 연극인들이 부러워한 점도 바로 이런 서민정신이었다. ‘천막극장’으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는 중견 연출가 가라 주로는 “서민들 체취가 물씬한 말들이 바로 노래 가사가 되는 건 일본 뮤지컬에선 찾아볼 수 없는 경이”라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서구 뮤지컬을 모범삼아 웃고 떠드는 화려한 춤과 음악과 무대기술을 따라잡으려 치중했던 일본사람들에게 바로 자기 땅, 자기 역사를 진솔하게 노래하는 <지하철…>이 한방 먹인 셈이다. 뮤지컬 제작 주식회사인 극단 시키(사계)의 아사리 게이타 회장, 역시 뮤지컬 등 대중문화기업인 도호그룹의 마에다 사장 등 일본 뮤지컬계의 손꼽는 인물들이 줄줄이 공연장을 찾았다는 것도 큰 화젯거리였다. 1970년대 김지하 시인 석방운동을 벌였던 <문예춘추> 전 편집장이었던 미야타 마리에, 조선인 국적을 지키고 있는 소설가 김석범씨 등이 이 흐뭇한 자리에 함께해 김민기씨의 무대를 지켜봤다. 재미난 사실은 극 곳곳에 박혀 있는 한-일관계에 대한 풍자였다. 김구 선생과 안중근 열사를 국부라 부르고, 독립군을 얘기하며, 지하철 1호선 건설에 참여했던 일본인들을 에둘러 비판하고 지나가는 대목에서 이들 가슴에 뜨거운 감회가 스쳐갔다.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이 아니라 연극 한편이 가장 강력한 파편들을 도쿄 한복판에 터뜨리는 순간이었다.

오사카·후쿠오카… 열도를 달린다

사진/ 공연이 끝난 뒤 열광적인 환호 속에 인사하는 한국 배우들. 무대디자인이 서울에서 도쿄로 그대로 옮겨간 듯한 모습이다.
15일 밤 10시께 첫 공연이 끝난 뒤, 국제교류기금 주최로 열린 환영회는 두 나라 사이를 이어 달린 <지하철…>에 쏟아지는 진심어린 평가로 후끈 달아올랐다. 후지 히로아카 국제교류기금 이사장은 “이처럼 뛰어난 공연물을 창조한 한국이 이웃나라라는 사실이 행복하다”고 인사했고, <아사히신문> 문화국의 고지 마에다 부국장은 “배우들의 노래가 우리 마음을 콕콕 찌르며 정서적 공감을 끌어냈다”고 건배를 제의했다. 이를 받아 김민기씨가 “좋은 무대를 꾸미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준 일본 무대기술 스태프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며 “아리가도 고자이마스”라고 화답하자 우렁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일본 연극인들은 ‘걸레’ 역의 방주란, ‘곰보할매’ 역의 김효숙, ‘안경’ 역의 권형준, ‘선녀’ 역의 이미옥씨와 악수하며 가창력과 연기가 어우러진 솜씨를 칭찬하느라 시간 가는 것도 잊은 듯했다. 두 나라 사이에 짙은 어두움을 드리웠던 역사의 그늘이 이날만은 뮤지컬의 선율에 실려 날아가버렸고, 그 훈훈함으로 가슴을 연 사람들 사이에 뭉클한 연대의식이 피어올랐다.

<지하철…>은 20∼21일 오사카 드라마시티극장, 24∼25일 후쿠오카 서시민센터로 일본 열도를 계속 달린다. 독일과 중국 공연에 이어 일본에까지 한국 뮤지컬의 힘을 드높인 <지하철…>이 동아시아 연대의 새 가능성을 보여준 기쁜 날이었다.

인터뷰|<지하철 1호선> 연출자 김민기씨

진실함의 힘은 강했다

사진/ (한겨레 서경신 기자)
나흘에 걸친 도쿄 공연을 성황리에 끝마친 연출가 김민기(50)씨 뺨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독일과 중국에 이어 일본 무대까지 당당하게 밟았다는 기쁨이 긴장이 풀린 얼굴 위로 슬며시 배어나왔다. 실력으로 일본 뮤지컬계의 높은 벽을 넘었다는 자부심을 그는 특유의 겸손한 인사로 대신했다.

“이번 공연이 성공한 공은 그 누구보다도 어려운 한국말 대사를 그 뜻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막작업해준 번역자 네모토 리에에게 돌리고 싶습니다. 일본인 관객이 웃고 공감할 수 있었던 바탕은 그의 유려한 번역 때문입니다. 영국에 주문해서까지 얇은 막(샤)을 설치하고 영상을 잘 깔아서 한국 무대보다 훨씬 뛰어난 무대를 만들어준 무대미술 작업팀에도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평소 남의 공연에는 무관심했던 일본 뮤지컬계의 거물들이 제 발로 찾아와 무대를 지켜보고 돌아갔다며 기뻐하는 관계자들에게 그는 “어느 동네에 가나 그들의 장점을 인정해줘야 하는 것”이라고 지그시 누르는 여유를 보였다.

“문화에 ‘진출’이란 표현을 쓰면 안 된다고 봅니다. 서로가 부족했던 점을 깨우쳐주고 보완하며 함께 가는 거지요. 지난번 중국 공연 때도 느꼈지만 대중, 민중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것인가 고민하는 그들에게 이런 것도 있다고 힌트를 주고 손을 내미는 구실을 하는 것이 문화의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인들이 <지하철…>에서 좋은 점을 봤다면 그건 아마도 경제의 위력이 지나간 뒤 정체돼 있는 사회 분위기, 또는 사람들 사이에 퍼진 어떤 상실감을 회복하는 실마리를 던져준 게 아닌가 싶어요.”

그는 “‘오락물’로 떨어져버린 일본 뮤지컬들이 소재 구하기에 허덕이다가 배우들 하나하나가 사회와 사람들을 향해 뜨겁게 외치는 <지하철…>의 진실함에 쇼크를 먹은 것 같다”고 이번 공연의 의의를 자평했다.

“서울에 돌아가면 앞으로 한 3년 한국과 중국, 일본의 고유 연희양식을 아우른 작품을 만들 계획입니다. 일본의 가부키와 중국의 경극은 배울 점이 많아요. 그 위대한 아시아의 문화유산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게 지금 제 숙제입니다. 아시아 세 나라가 함께 움직였던 그 위대하고 행복했던 연대의 역사를 돌아보며 긴 호흡을 가다듬는 무대가 될 겁니다.”

“엄청난 실수를 저지를 것 같다”고 웃는 김씨 모습에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큼직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도쿄=정재숙 기자/ 한겨레 문화부 jjs@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