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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위스키는?

대지를 음미하며 여행하려 선택한 2천km 자전거 위스키 성지순례… 이윽고 한 모금 머금을 땐 그리워한 친구를 만나 포옹한 느낌마저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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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4-01 14:45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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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종교 때문이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성지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성지란 무엇일까? 바삭, 부스러지는 건조한 마음을 적시는 깊은 위로. 넘쳐흐르는 정신의 충일감. 화산처럼 터지는 삶의 에너지를 다시 얻을 수 있는 곳. 그런 곳을 성지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위스키를 사랑하는 이의 성지는? 말할 것도 없이 스코틀랜드다.

마을마다 유명 증류소가 한두 곳씩 있는 스코틀랜든 스페이사이드 지역의 위스키 트레일. 위스키 마니아에게는 꿈의 여행 코스다. 김명렬.
지난가을 오래 별렀던 위스키 성지순례를 계획하며 예전에 읽었던 한 증류소 매니저의 말이 생각났다. “대지 위를 흐르는 진한 피트(석탄의 한 종류)색 물, 바람 속의 꽃향기, 바다, 그리고 오랜 시간… 우리가 만드는 위스키에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대지가, 자연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대지를 충분히 음미하면서 다니는 여행의 수단은? 차로 다녀서는 그 향기를 맡을 수 없지 않은가? 걸어서는? 여행이 끝나지 않겠고. 자연스럽게 자전거로 스코틀랜드를 누비기로 결정했다.

에든버러를 출발해 얼추 40여 곳의 증류소가 밀집돼 돌을 던지면 증류소 지붕에 떨어지는 스페이사이드 지역을 둘러본 뒤,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황량한 하일랜드 지역에 점점이 산재해 있는 증류소를 들르며, 이윽고 오크니제도로 건너간 뒤 다시 하일랜드, 그리고 사방팔방 바람이 거칠게 몰아치는, 심지어 영어가 아닌 게일어를 쓰는 헤브리디스제도를 비롯해 서쪽 해안의 섬들을 거친 뒤 마지막 행선지인, 싱글몰트위스키 마니아들이 성지 중의 성지로 꼽는 아일라섬에 도착했다. 한두 곳을 제외한 거의 모든 증류소의 문을 두들기면서 여름의 끄트머리에 시작한 여행은 이미 가을의 끝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날씨는 하루 중에 사계절이 다 있다고 하더니, 과연 두 달에 걸친 2천km의 여정 중에 비(그들은 ‘샤워’라고 부르지만)를 맞지 않은 날은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날씨가 변화무쌍하니 하루에도 몇 번씩 무지개를 볼 수 있었다. 무지개를 보면서 심드렁, 무관심한 이들은 아마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유일할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증류소는 크게 일반 관광객을 위한 투어 프로그램이 있는 곳과 일반인에게는 내부를 공개하지 않는 곳으로 나뉜다. 우리가 익히 아는 싱글몰트위스키 레이블의 증류소들은 거의 예외 없이 공개한다고 봐도 좋다. 오전 10시께부터 오후 4시께까지 시간 단위로 투어 프로그램이 운영되는데, 참가비는 무료인 곳도 있지만 대략 5파운드 내외. 적게는 서너 명, 가끔은 혼자, 대개는 10명 내외의 관광객들이 위스키 생산 전 공정을 가이드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견학할 수 있으며 마지막에는 두어 잔의 위스키 테이스팅도 제공한다. 견학에 최적인 계절은 5월에서 10월까지. 한겨울에는 견학 프로그램을 쉬는 곳도 있다. 특히 증류소가 밀집된 스페이사이드 지역에서는 낚시·골프 등 다채로운 여행 코스도 경험할 수 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증류기에 손을 대보았을 때, 그리고 어두컴컴한 저장창고 안 10년, 20년을 조용히 잠들어 있는 술통에서 꺼내준 위스키를 입안에 머금었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오랜 세월, 펜팔로만 친해져온, 서로 그리워해온 친구를 이윽고 만나 처음 포옹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세계 곳곳에서 일부러 스코틀랜드까지 찾아와 증류소를 둘러보는, 연간 십수만 명에 달하는 이들의 증류소 순례의 마음을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 가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에서 마신 위스키 중 뭐가 가장 맛있었나요?” 두 번째로 맛있었던 술은 있다. 아일라섬의 아드벡 증류소. 바닷가에 면한 그 증류소 앞 호젓한 증류소 전용 선착장에 앉아 장쾌했던 지난 여행을 돌아보며 점심 무렵부터 해가 기울 때까지 홀로 기울이던 아드벡 ‘우가달’(게일어로 ‘깊고 어둡고 신비한’이란 뜻이다)은 정말 근사했다. 그럼 첫 번째는? 그때 내 옆에 해묵은 술친구가 있어 그 술을 함께 마실 수 있었다면 바로 그 술이 최고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아무리 훌륭한 술이라 하더라도 술벗과 잔을 부딪치며 마시기 전에는 최상급의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미흡하다고 생각한다.

자전거 여행자·‘바 상수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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