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를 서성이는 엇갈린 운명의 잔혹한 종말… 일상을 표준화하는 공간의 이율배반
우리나라의 비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쉼없이 늘어나고 있는 건축물이 있다. 바로 고층아파트다. 1년 365일, 곳곳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 서울과 다른 대도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요즘엔 낮은 산자락을 끼고 있는 시골에마저 고층아파트가 불쑥불쑥 들어선다. 그만큼 아파트는 오늘날 주거형태의 하나가 아니라 ‘집’ 그 자체를 의미하는 보편적인 삶의 거처다.
아파트는 좁은 땅의 효율적인 활용과 현대인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생활의 편리함 등 기능적인 이유로 세워지게 됐지만 주거방식의 대표성을 획득하면서 그 의미는 단순한 기능성 이상으로 읽힌다. 아파트의 보편성은 도시에 사는 대다수의 소시민들에게 중산층의 시민권을 상징한다. 이전보다는 덜해졌다지만 여전히 많은 부부들이 결혼과 함께 아파트 청약통장을 마련하면서 안정희구의 1단계로 도약한다. 짧게는 2∼3년, 길게는 10년 동안 허리띠를 졸라매 얻은 아파트 계약서에 인감도장을 찍는 순간 삶의 지난했던 한 단계가 막을 내린다. 주부 대상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이 순간의 감격스러움을 전하는 편지들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내용은 낭독하는 디제이의 목소리마저 종종 갈라질 정도로 늘 애틋하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꿈을 꾸는 사람들
그러나 아파트를 보는 문학과 영화의 시선은 ‘내집 마련’을 향한 소시민의 꿈처럼 소박하거나 애틋하지 않은 편이다. 이는 모든 문패를 익명처리하는 아파트의 획일적 구조와 아파트가 대변하는 ‘중산층 의식’의 허구성과 맞물려 있다. 겉으로 보이는 단정함과 안정감 뒤에 있는 단절과 이기주의,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 무관심과 뒤섞여 있는 집단 감시체제 등 예술 텍스트 속의 아파트는 완전범죄를 꿈꾸는 부정과 위선의 공간이다. 영화 <해피엔드>(1999)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중산층 아파트촌에 사는 서민기(최민식)와 최보라(전도연)는 서민기가 실업 상태라는 걸 제외한다면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창고형 대형할인매장에서 언제나 마주칠 수 있는 젊은 부부다. 남편이 실업자라는 것도 이들에게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될 건 없다. 대신 영어학원을 경영하는 유능한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5개월된 딸을 안고 아파트 앞길을 걷는 이들의 모습에서 어느 누구도 부정의 냄새를 맡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같은 공간에서 두 사람은 다른 꿈을 꾼다. 서민기가 눈물짜며 연속극을 보는 동안 최보라는 아직 그녀의 숨결에 묻어 있는 애인의 뜨거운 호흡을 그리워한다. 낮시간 동안 탑골공원과 헌책방에서 시간을 죽이는 남편과, 정부의 아파트에서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고 온 아내는 같은 집으로 돌아오지만 서로 단절돼 있다. 카메라는 창문 밖에서 두 사람의 공간을 잡는다. 그것은 무관심과 호기심이 뒤섞여 이웃집을 흘낏 들여다보는 우리의 시선과 공명한다. 거실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는 남편과 식탁에서 늦은 식사를 하는 아내. 겉보기에 아무런 하자가 없는 평온한 저녁 거실의 풍경이지만 이들에게 거실은 더이상 가족공유의 공간이 아니다. 서민기와 대화하는 것은 최보라가 아니라 텔레비전이다. 그러나 서민기조차 방 안에 흐르는 단절의 공기를 포착하지 못한다. 어쩌면 당연한 거다. 결혼 초 아파트 청약부금을 부으며 함께 꿈꿨던 중산층의 진입에 성공한 이들에겐 더이상 공유할 꿈이 사라진 건지도 모른다. 만약 자동차에서 아내가 저지른 불륜의 흔적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서민기는 더 오래 분리수거를 위해 우유팩을 자르고 대형슈퍼의 쇼핑카트를 끌면서 소시민적인 행복감을 누리며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남편이 기다리는 집을 향해 아파트 복도를 걷는 최보라의 걸음은 관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무겁고 느리지만 정부의 아파트 복도를 걷는 최보라는 긴장되고 설렌다. 복도를 걷던 최보라는 한 여인이 정부의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분노에 차서 문을 부서져라 발로 차며 문을 열라고 소리치는 최보라의 옆에서 옆집문이 열리며 여인이 나온다. 여인은 이상한 눈초리로 그의 아래위를 훑는다. 이 장면은 아파트라는 공간이 가지는 익명성과 불안감을 잘 보여준다.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도통 알 길 없이 정적만 흐르는 아파트 복도에서 만나는 이들은 언제나 외부인이다. 서로를 보는 시선에는 경계와 공포가 흐른다. 그 공포는 나의 것, 나의 시민증을 외부인에게 강탈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싣고 있다. 나의 시민증은 특별하지 않다. 수인번호처럼 찍혀 있는 아파트의 호수가 전부다. 사람들은 가끔씩 딴 생각에 팔리거나 술에 취해 자신의 번호를 잊고 다른 층이나 옆집의 벨을 누르기도 한다. 최보라 역시 잠시 착각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공간의 익명성과 타인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자신의 불륜에 대한 죄의식이 겹쳐 그는 아파트 복도에서 짧지만 깊은 악몽을 꾼 것이다. 공간의 익명성, 거기엔 불안이 흐른다 서민기를 연기했던 최민식(38)씨 역시 일산의 32평 아파트에 부인과 살고 있다. <해피엔드>를 촬영할 당시 결혼해서 들어온 보금자리다. “자유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신도시 아파트를 보면 꼭 신발장들이 서 있는 것 같아요. 멀리서 보면 집 하나가 작은 성냥갑 같은데 저 성냥갑 하나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전쟁처럼 살아가고 있는 풍경들을 생각하면 서글프기도 하고 쓸쓸해지기도 하고 그래요.” <해피엔드>를 촬영한 아파트는 독특하게 원형구조를 하고 있다. 둥근 원형의 낮은 각도로 찍힌 아파트의 풍경은 하나의 거대한 판테옵티콘(간수가 모든 죄수를 감시할 수 있는 둥근 원형구조의 감옥) 형상이다. 최보라는 판테옵티콘에 갇혀 있는 죄수처럼 출구를 찾지 못한다. 가족이 기다리는 집은 감옥이지만 그는 탈출을 꿈꾸지 않는다. 그에게 탈출은 감옥 이하의 죽음이다. 안정된 일과 가족, 그리고 단정하게 꾸며져 있는 아파트 한칸. 차디차게 식은 이런 것들이 30대 젊은 유부녀인 그의 삶을 구성하고 인증받게 하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안정을 포기해야 하고 더구나 주위의 수치스런 눈길을 받아야 하는 선택 앞에서 최보라는 위장된 안정 속으로 돌아가고자 맘먹는다. 갈등의 기로에 서 있는 많은 사람들이 희망없는 현재와 타협하는 것처럼. 서민기는 아내의 부정을 알아차리지만 그에게도 다른 출구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아파트에서 아내의 흔적을 발견하고 돌아온 서민기와 최보라가 함께 있는 거실을 카메라는 다시 잡는다. “최보라씨, 넌 사는 게 재밌니?” 콩나물국을 먹던 아내는 일상적인 대답을 한다. “시원해, 콩나물국 좀 줄까?” 서민기는 중얼거린다. “시원하다구?” 좀처럼 소통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단절이다. 그러나 이때 최보라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들에게 단절은 새삼스럽지 않은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혼자 울면서도 아내에게 내색을 못하던 소심한 가장은 아이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집을 나간 아내가 정부와 만나 자신의 아파트 복도에서 끌어안고 있는 광경을 발견하자 분노가 폭발한다. 두 사람을 피하기 위해 서민기와 최보라의 애인 김일범(주진모)이 각각 9층과 10층 복도에서 서성이는 장면은 엇갈린 욕망과 아파트라는 익명적 공간이 빚어내는 공범의식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내밀하고 아늑해야 할 부부의 침실은 참혹한 살인 현장으로 등장한다. 완전범죄를 끝내고 한참 뒤 거실에서 어린 딸과 낮잠을 자다가 부스스 일어나 멍하니 앞을 응시하는 서민기의 시선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에서 거실이 유일하게 가족의 공간으로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고층 아파트를 배회하는 욕망들의 서글픔
원래 영화의 시놉시스에서 잔인한 죽음이 서민기의 상상이었다는 것은 개봉 당시 알려진 사실이다. 변하게 된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영화에서 중요한 건 처벌이 아니라 바스라지기 쉬운 우리 시대의 가족이다.
“다들 이상적인 가족을 꿈꾸지만 그게 잘 안 된다. 그것 자체를 포기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발걸음 닿는 대로 가다보면 자기가 그리던 방향과 달라진다. 그런데 조절은 쉽지 않고, 그러니까 복잡해지고 가슴 아프게 엇갈린다.”
단편영화 <생강>에서 가난한 주부의 일상을 섬세하게 카메라에 담았던 정지우(32) 감독은 <해피엔드>에서 자주 오해되듯 ‘가부장제의 응징’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고여 있어서 더이상 흐를 줄기가 없어보이는 일상, 그 일상을 표준화하는 고층아파트의 삶에서 빗나가 뒹구는 욕망들의 서글픔이다.
특별히 벼락부자가 되거나 속세의 삶을 벗어나지 않는 한 아파트는 평범한 소시민들에게 실현가능한 유일한 꿈인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굴레와 같다. 이는 이루려는 꿈이 실현되는 순간 족쇄가 되는 가족제도의 모순과도 비슷하다. 어디에도 ‘해피엔드’는 없다.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그러나 아파트를 보는 문학과 영화의 시선은 ‘내집 마련’을 향한 소시민의 꿈처럼 소박하거나 애틋하지 않은 편이다. 이는 모든 문패를 익명처리하는 아파트의 획일적 구조와 아파트가 대변하는 ‘중산층 의식’의 허구성과 맞물려 있다. 겉으로 보이는 단정함과 안정감 뒤에 있는 단절과 이기주의,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 무관심과 뒤섞여 있는 집단 감시체제 등 예술 텍스트 속의 아파트는 완전범죄를 꿈꾸는 부정과 위선의 공간이다. 영화 <해피엔드>(1999)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중산층 아파트촌에 사는 서민기(최민식)와 최보라(전도연)는 서민기가 실업 상태라는 걸 제외한다면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창고형 대형할인매장에서 언제나 마주칠 수 있는 젊은 부부다. 남편이 실업자라는 것도 이들에게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될 건 없다. 대신 영어학원을 경영하는 유능한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5개월된 딸을 안고 아파트 앞길을 걷는 이들의 모습에서 어느 누구도 부정의 냄새를 맡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같은 공간에서 두 사람은 다른 꿈을 꾼다. 서민기가 눈물짜며 연속극을 보는 동안 최보라는 아직 그녀의 숨결에 묻어 있는 애인의 뜨거운 호흡을 그리워한다. 낮시간 동안 탑골공원과 헌책방에서 시간을 죽이는 남편과, 정부의 아파트에서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고 온 아내는 같은 집으로 돌아오지만 서로 단절돼 있다. 카메라는 창문 밖에서 두 사람의 공간을 잡는다. 그것은 무관심과 호기심이 뒤섞여 이웃집을 흘낏 들여다보는 우리의 시선과 공명한다. 거실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는 남편과 식탁에서 늦은 식사를 하는 아내. 겉보기에 아무런 하자가 없는 평온한 저녁 거실의 풍경이지만 이들에게 거실은 더이상 가족공유의 공간이 아니다. 서민기와 대화하는 것은 최보라가 아니라 텔레비전이다. 그러나 서민기조차 방 안에 흐르는 단절의 공기를 포착하지 못한다. 어쩌면 당연한 거다. 결혼 초 아파트 청약부금을 부으며 함께 꿈꿨던 중산층의 진입에 성공한 이들에겐 더이상 공유할 꿈이 사라진 건지도 모른다. 만약 자동차에서 아내가 저지른 불륜의 흔적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서민기는 더 오래 분리수거를 위해 우유팩을 자르고 대형슈퍼의 쇼핑카트를 끌면서 소시민적인 행복감을 누리며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남편이 기다리는 집을 향해 아파트 복도를 걷는 최보라의 걸음은 관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무겁고 느리지만 정부의 아파트 복도를 걷는 최보라는 긴장되고 설렌다. 복도를 걷던 최보라는 한 여인이 정부의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분노에 차서 문을 부서져라 발로 차며 문을 열라고 소리치는 최보라의 옆에서 옆집문이 열리며 여인이 나온다. 여인은 이상한 눈초리로 그의 아래위를 훑는다. 이 장면은 아파트라는 공간이 가지는 익명성과 불안감을 잘 보여준다.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도통 알 길 없이 정적만 흐르는 아파트 복도에서 만나는 이들은 언제나 외부인이다. 서로를 보는 시선에는 경계와 공포가 흐른다. 그 공포는 나의 것, 나의 시민증을 외부인에게 강탈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싣고 있다. 나의 시민증은 특별하지 않다. 수인번호처럼 찍혀 있는 아파트의 호수가 전부다. 사람들은 가끔씩 딴 생각에 팔리거나 술에 취해 자신의 번호를 잊고 다른 층이나 옆집의 벨을 누르기도 한다. 최보라 역시 잠시 착각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공간의 익명성과 타인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자신의 불륜에 대한 죄의식이 겹쳐 그는 아파트 복도에서 짧지만 깊은 악몽을 꾼 것이다. 공간의 익명성, 거기엔 불안이 흐른다 서민기를 연기했던 최민식(38)씨 역시 일산의 32평 아파트에 부인과 살고 있다. <해피엔드>를 촬영할 당시 결혼해서 들어온 보금자리다. “자유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신도시 아파트를 보면 꼭 신발장들이 서 있는 것 같아요. 멀리서 보면 집 하나가 작은 성냥갑 같은데 저 성냥갑 하나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전쟁처럼 살아가고 있는 풍경들을 생각하면 서글프기도 하고 쓸쓸해지기도 하고 그래요.” <해피엔드>를 촬영한 아파트는 독특하게 원형구조를 하고 있다. 둥근 원형의 낮은 각도로 찍힌 아파트의 풍경은 하나의 거대한 판테옵티콘(간수가 모든 죄수를 감시할 수 있는 둥근 원형구조의 감옥) 형상이다. 최보라는 판테옵티콘에 갇혀 있는 죄수처럼 출구를 찾지 못한다. 가족이 기다리는 집은 감옥이지만 그는 탈출을 꿈꾸지 않는다. 그에게 탈출은 감옥 이하의 죽음이다. 안정된 일과 가족, 그리고 단정하게 꾸며져 있는 아파트 한칸. 차디차게 식은 이런 것들이 30대 젊은 유부녀인 그의 삶을 구성하고 인증받게 하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안정을 포기해야 하고 더구나 주위의 수치스런 눈길을 받아야 하는 선택 앞에서 최보라는 위장된 안정 속으로 돌아가고자 맘먹는다. 갈등의 기로에 서 있는 많은 사람들이 희망없는 현재와 타협하는 것처럼. 서민기는 아내의 부정을 알아차리지만 그에게도 다른 출구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아파트에서 아내의 흔적을 발견하고 돌아온 서민기와 최보라가 함께 있는 거실을 카메라는 다시 잡는다. “최보라씨, 넌 사는 게 재밌니?” 콩나물국을 먹던 아내는 일상적인 대답을 한다. “시원해, 콩나물국 좀 줄까?” 서민기는 중얼거린다. “시원하다구?” 좀처럼 소통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단절이다. 그러나 이때 최보라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들에게 단절은 새삼스럽지 않은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혼자 울면서도 아내에게 내색을 못하던 소심한 가장은 아이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집을 나간 아내가 정부와 만나 자신의 아파트 복도에서 끌어안고 있는 광경을 발견하자 분노가 폭발한다. 두 사람을 피하기 위해 서민기와 최보라의 애인 김일범(주진모)이 각각 9층과 10층 복도에서 서성이는 장면은 엇갈린 욕망과 아파트라는 익명적 공간이 빚어내는 공범의식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내밀하고 아늑해야 할 부부의 침실은 참혹한 살인 현장으로 등장한다. 완전범죄를 끝내고 한참 뒤 거실에서 어린 딸과 낮잠을 자다가 부스스 일어나 멍하니 앞을 응시하는 서민기의 시선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에서 거실이 유일하게 가족의 공간으로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고층 아파트를 배회하는 욕망들의 서글픔

(사진/실업자인 서민기가 연애소설을 보며 시간을 보냈던 헌책방.위태롭게 쌓여있는 책들은 서민기부부의 위태로운 관계를 암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