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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타이영화, 이 멋진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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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1-2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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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영화제를 매료시킨 아주 특별한 메뉴… 새로운 감각과 연출력으로 최전성기 구가

사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논지 니미부트르 감독의 신작 <잔다라>.
상영작 200편, 매진된 영화 110편, 14만2천 좌석 점유. 점유율 77%. 지난해보다 한달 정도 늦게 열린 제6회 부산국제영화제(11월9∼17일)는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남포동 거리를 가득 메운 관객으로 대성황을 이루며 막을 내렸다. 예년과 다름없이 극장에서 만나기 힘든 아시아와 서구영화의 진수성찬 앞에서 무엇을 맛볼까 고민해야 했던 관객은 올해 별미 메뉴판을 하나 더 받았다. 코코넛향 가득한 타이 카레처럼 매콤달콤한 타이영화의 퍼레이드 ‘타이영화의 힘: 뉴타이영화의 근접조우’가 바로 그것. 7편의 장편영화와 4편의 단편영화로 구성된 이 특별전은 더운 날씨와 오토바이 택시, 붉은 승복과 금장식 사원, 대표적인 신혼여행지로만 모자이크된 타이의 이미지에 영화의 나라라는 항목을 추가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이렇게 재미있었단 말인가”

“최근 타이영화가 국내외적으로 거둔 성과는 가히 폭발적이다. 왜 타이영화가 세계적으로 큰 반응을 얻고 있는지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하자는 차원에서 특별전을 마련했다”는 아시아영화 프로그래머 김지석씨의 말대로 타이는 지금 영화의 황금기다. 99년부터 지금까지 자국 시장에서 국산영화가 흥행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으며 올 여름 개봉한 대작영화 <수리요타이>는 개봉 이후 3개월치의 티켓이 모두 예매되기도 했다. 한국영화의 황금기와 비견될 만한 타이영화의 부흥은 영화제가 타이영화 특별전에 가장 큰 공을 들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영화제는 올해 나란히 흥행기록을 세운 <방라잔>과 <킬러 타투>를 비롯해 현재 최고의 화제가 되고 있는 <수리요타이>, 개봉을 앞둔 <잔다라> 등 타이영화의 오늘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따끈따끈한 작품들을 소개했다. 또한 <수리요타이>를 폐막작으로 선정한 것을 비롯해, 타이영화인과의 만남, 타이영화산업 세미나, 타이영화의 밤 등 다양한 관련행사를 마련해 관객의 관심을 불러모았다.

“타이에 몇년 동안 살았지만 타이영화를 보러 극장에 간 적은 한번도 없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타이영화는 나라 안에서조차 형편없는 것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처음 타이영화를 보니 정말 놀랍다” 불법 축구도박 중계조직의 하수인으로 일하는 타이 10대들의 우정과 욕망을 경쾌하게 그린 <골클럽>의 상영 뒤 진행된 감독과의 대화에서 한 관객은 관람평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날 3분의 2가량 극장을 메운 젊은 관객은 대부분 “타이영화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는 말로 시작해 대화시간이 끝날 때까지 쉼없이 질문을 던졌다. <수리요타이>, 코미디 <킬러 타투> 등은 매진을 기록했으며 다른 영화들 역시 70% 가까운 높은 성적을 보여 미답의 땅이었던 타이영화에 대한 관객의 흥미와 관심을 보여줬다. 영화제 3일째에 열렸던 ‘타이영화인과의 만남’에서도 객석을 꽉 채운 관객은 “<수리요타이>에는 150억원이 들었다는데, 타이영화의 평균 제작비는 얼마쯤인가요?”, “타이영화에서 불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등 궁금증을 쏟아내 세미나에 참가한 타이영화인들의 얼굴을 환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지만 앞선 관객의 말처럼 몇년 전까지만 해도 타이영화는 자국민조차 외면하는 실정이었다. 불과 5년 사이에 눈부신 성장을 한 것이다. 이는 80년대 이후 쇠락에 쇠락을 거듭하다 90년대 중반부터 뜨기 시작해 지금 르네상스를 구가하고 있는 충무로와 비슷한 양상이다.

70∼80년대만 해도 타이영화의 제작편수는 한해 100편을 웃돌았다. 그러나 90년대 초부터 제작편수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타이영화산업 세미나에서 타이의 젊은 여성제작자 듀앙카몬 림차로엔은 “영화관객은 구식 스타일을 재탕삼탕 반복하는 타이영화에 매력을 느끼지 않게 됐고, 이에 따라 많은 영화인들이 텔레비전과 광고쪽으로 발길을 옮겨갔기 때문”이라고 타이영화의 침체이유를 설명했다. IMF 직전 한해 제작편수는 10편 미만으로 곤두박질쳤다.

CF로 훈련받은 젊은 인력의 힘

사진/ 97년부터 실력있는 젊은 영화인력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타이영화의 재건작업이 급속도로 진전됐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중 열렸던 타이영화산업 세미나.(씨네21)

97년은 타이영화의 전환기가 되는 해다. 이때 등장한 재능있는 신인감독이 타이영화의 재건에 불을 댕겼기 때문이다. 현재 타이의 최고 흥행감독으로 자리를 굳힌 논지 니미부트르가 만든 97년 데뷔작 <댕 버럴리와 그 일당들>은 타이영화산업의 재기를 이끌어낸 영화로 평가받는다. 아시아영화 전문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댕 버럴리…>는 그 이전 영화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영화문법, 그리고 전성기 타이영화에 대한 향수와 적절히 배합된 미국식 대중문화가 젊은 세대로 하여금 극장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고 평한다. 신세대 영화인의 대표주자로 손꼽히는 니미부트르 감독은 뮤직비디오와 CF을 만들다 영화계에 입문한 인물. 97년 이후 등장한 타이의 신예감독들은 대부분 그처럼 CF와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이다. 타이의 CF 수준은 아시아권에서 상위급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세계적인 유행에 가장 민감한 광고를 통해 새로운 감각과 연출력을 훈련받은 젊은 인력들이 대거 영화쪽으로 들어오면서 젊은 관객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끌어낸 것이다.

니미부트르 감독이 99년 제작한 <낭낙>은 타이영화에서 수십번 만들어진 귀신이야기였지만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리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감으로써 함께 개봉한 <타이타닉>의 코를 납작하게 눌렀다. 타이영화가 재기의 가능성을 보이자 영화에 등을 돌렸던 투자자들이 속속 돌아온 것은 영화 인력들에 큰 자극이 됐다. <낭낙> 이후 제작비 규모가 이전에 비해 두배 이상 껑충 뛰어올랐고, 올해는 150억원 이상의 제작비가 투여된 <수리요타이>까지 등장했다. 황실이 직접 영화 제작에 나서 돈을 모은 이 작품은 예외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웬만한 작품의 제작비 규모는 20억원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잔다라>처럼 해외투자를 받아 제작되는 영화도 늘어나고 있다.

젊은 인력의 대거 등장이나 제작비 증가 등 타이영화의 발전 양상은 여러 면에서 충무로의 성공과 비슷하지만 몇 가지 다른 점도 눈에 띈다. 현재 타이영화는 5개의 메이저 복합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제작과 배급을 독점하고 있다. 제작과 배급이 분리되고 군소제작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한국과는 판이하다. 스타 배우가 없다는 것 역시 타이영화의 독특한 점. 제작자 듀앙카몬은 “타이 관객은 배우보다 감독이나 스토리를 중요시한다. 개런티에 큰 돈을 붓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제작비가 절감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와 달리 감독과 제작자의 역할이 아직 분리되지 않아 보통 감독의 부인이 제작을 맡는 타이영화계에서 유학파 출신의 전문제작자 듀앙카몬은 독보적인 존재다.

<잔다라>… 이제 성을 말하다

사진/ 99년 개봉된 <낭낙>은 타이영화 흥행기록을 깨면서 새로운 영화바람을 몰고 왔다.
고전 민담을 바탕으로 한 <낭낙>이나 17세기 아유타야 시대의 방라잔 마을의 영웅담을 그린 전쟁영화 <방라잔>, 역시 야유타야 시대의 영웅담인 <수리요타이>의 성공은 고전전 소재에 대한 타이 관객의 입맛을 보여주는 예다. 그러나 올 상반기에 <방라잔>의 뒤를 이은 대박영화 <킬러 타투>를 비롯해, <골클럽> <잔다라> 등의 영화제 소개작들은 타이 주류영화의 다양한 경향을 보여주기도 한다. 타이판 <킬러들의 수다>라고 할 수 있는 <킬러 타투>는 다섯명 킬러들의 좌충우돌을 다룬 코미디. 직접 쓴 시나리오를 들고 3년 동안 영화사를 찾아다니다가 성공적인 데뷔를 한 젊은 감독 유틀럿 시파팍은 “타이영화계에 투자자가 늘어났다고 하지만 많은 투자자들이 여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보다는 흥행을 보증하는 경향의 영화나 감독에게 몰리기 때문에 영화 만들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해 한국이나 타이나 젊은 감독들이 하는 고민은 그리 다르지 않음을 보여줬다.

개봉을 앞둔 니미부트르 감독의 <잔다라>는 타이영화의 새로운 파격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불교국가인 타이에는 성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영화가 전무하다시피했다. 부산영화제 개막 전부터 ‘진짜 야하다’는 소문으로 관객의 침을 넘어가게 하던 이 작품은 소재나 주제 그리고 여러 장면에서 적나라한 성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란 잔다라는 성적으로 방종한 아버지 아래서 학대받으며 자라고 그를 증오하지만 결국 자신도 아버지를 닮아가며 파국으로 치닫는다는 내용으로 “성에 대해 위선적인 태도를 위하는 타이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다”는 게 감독의 의도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한번도 바뀐 적 없는 타이의 검열제도 아래서 이 영화는 벌써부터 상당부분이 잘려나가는 수모를 겪었다. 감독과 제작사인 시네마시아는 등급제 폐지를 위한 운동을 준비중이다.

<수리요타이>를 비롯해 몇몇 타이영화는 이미 국내에 수입돼 개봉을 준비중이다. 영화제 관객에게 팔색조처럼 화려하고 다양한 재미를 살짝 드러냈던 타이영화가 국내 관객과 정식으로 인사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시아의 '공포'가 만나다

사진/ (씨네21)
한국과 홍콩, 타이의 대표 감독들이 한 작품에서 만난다. 영화제의 열기가 한창이던 지난 11월12일 부산 코모도호텔에서는 3국 합작으로 만들어지는 영화 의 제작발표회가 열렸다. 이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각국 대표는 <조용한 가족> <반칙왕>의 김지운 감독(한국), <낭낙> <잔다라>의 논지 니미부트르(타이), <첨밀밀>의 진가신 감독(홍콩)이다. 제작사 역시 각기 감독이 속해 있는 영화사 봄과 시네마시아, 어플러즈 픽처스가 공동제작하게 된다.

각각의 감독이 30분 분량의 작품을 만들어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는 는 지난해 진가신 감독의 제안으로 성사됐다. “국내시장을 확대해 아시아지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됐다”는 진 감독은 홍콩영화제에서 만난 김지운 감독에게 먼저 프로포즈했으며 논지 니미부트르 감독이 얼마 뒤 합류하게 됐다. “아시아지역에 공존하는 미스터리 요소를 각국의 독특한 문화적 바탕으로 그리자”는 컨셉 아래 세 감독들은 각기 유령, 사후세계 등 공포이야기를 자신의 색깔로 다룰 예정이다.

세 감독 가운데 가장 먼저 제작에 들어가 얼마 전 한달간의 촬영을 마친 김지운 감독의 <메모리스>는 김혜수씨와 정보석씨가 주연한 정통 공포물.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자가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이틀 동안의 ‘무섭고 이상한 이야기’다. 장르 복합적 코미디로 두 전작을 선보였던 김 감독은 “무서워보이는 코미디가 아닐까” 기대하는 관객을 의식하듯 “웃음기가 없는 정통 미스터리스릴러”라고 강조했다. 어떤 내용인가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니미부트르 감독과 진가신 감독은 “극비사항”, “극장에서 개봉하면 확인하라”며 미소로 함구했다.

각각의 작품에 5억원 정도의 순제작비가 주어지는 이 영화는 타이의 니미부트르 감독에 이어 홍콩의 진가신 감독이 마지막으로 촬영과 후반작업을 마치는 내년 3월이나 4월쯤 3국에서 동시에 개봉할 예정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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