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전향의 진흙탕에서 피어난 연꽃 ‘비전향 장기수’, 그들의 역할을 너무 뒤늦게 깨닫다
스무살 때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가슴이 없는 사람이요, 마흔살에 아직도 사회주의자라면 머리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그럴듯해 보이는 이 말을 뒤집어보면 처음부터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람은 가슴이 없는 사람이요, 사회주의의 한길을 걸은 사람들은 머리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이들이야 가슴이나 머리 둘 중에 하나는 갖게 되지만, 젊어서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지만 나이가 들어 사회주의자가 되거나 진보의 길로 나간 사람이라면 가슴도 머리도 갖지 못한 가여운 존재가 되고 만다. 이 논리에 따르면 가슴과 머리를 온전히 갖춘 존재가 되는 길이란 젊어서 사회주의자였다가 철이 들면서 그 이념을 저버리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마음을 돌리는 것을 우리는 흔히 전향이라 부른다.
꿈길의 발자국이 바위를 갈아…
이념과 현실 사이 괴리에서 번민하다가 스스로 이념을 던져버리는 것을 회심(回心)이라 한다면, 대세에 휩쓸려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가 목숨을 구하기 위해 또는 공산주의운동이 퇴조하는 것을 보고 줄을 잘못 섰다며 도망가버리는 것을 기회주의적 변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두 가지 형태의 마음 바꿈이야 세계 공산주의운동사상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있는 특수한 형태의 강요된 마음 바꿈이 있다. 국가기관의 폭력과 강압에 의한 강제전향이다. 일본제국주의가 한창이던 1930년대 시작된 이 고약한 제도는 일본에서는 패전과 함께 사라져버렸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승만시대를 거쳐 박정희 집권기간에 절정에 달했다. 그리고 이 야만적인 제도는 비전향 장기수라는 100여명의 독특한 인간군을 낳았다. 남북정상회담의 가장 직접적인 성과로 이들 비전향 장기수 중 63분은 2000년 9월 수십년 옥중생활에서 꿈에도 그리던 북으로 돌아갔다. “만약 꿈길에도 발자국을 찍을 수 있다면 문 앞의 돌길이 다 닳아 모래가 되었을 것을”(若事夢魂行有跡 門前石路半成砂)이란 시를 남쪽의 벗들에게 남겨두고서.
마땅히 이 대열의 앞장에 서서 고향으로 가셨어야 할 최남규 선생은 1999년 12월11일 중풍과 치매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최남규 선생은 수십년 감옥살이를 하면서 옥중에서 돌아간 숱한 동지들의 이름과 행적, 수번과 병명, 사망일자 등을 고혈압으로 답답한 가슴속에 모두 담았다가 출옥하자마자 수전증으로 떨리는 손으로 기록으로 남긴 전설적인 기억의 소유자였다. 그런 선생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인과 자식들의 이름을 종이에 적고 외우시더니 끝내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선생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방영된 서울방송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그런 상태의 선생께서 “고향이 어디에요”라는 질문에 “명천이닷!”라고 힘있게 답하시고 “집에 언제 가요?”라는 질문에 “난 통일돼야 가!”라고, “선생님 소원이 뭐예요?”라는 질문에는 “고향에 가는 거다! 고향으로 갈 거야”라고 답하시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같이 옥중에서 고생한 동지들은 통일은 아직 안 되었어도 다들 고향으로 가시는데…. 비전향 장기수들의 송환이 결정된 이후 9개월만 더 버티셨어도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으셨을 텐데라는 필자의 아쉬움에, 선생과 같이 오랜 기간 징역살이를 한 최하종 선생은 최남규 선생께서 그만큼 버티신 것도 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 때문이었다고 말씀하신다. 비전향과 미전향
분단 이후 일제잔재를 더욱 악랄하게 발전시킨 강제전향제도를 이겨낸 비전향 장기수들에서 출소 이후 사망자를 포함한 총 94분이 산 징역 햇수를 합하면 모두 2854년, 한 사람당 평균으로는 31년이다. 27년간 징역을 살고 나와 세상을 놀라게 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도 이 땅의 비전향 장기수 집단에 데려다 놓으면 반 평균을 깎아먹는 처지가 된다. 그만큼 오랜 세월을 이들은 0.7평 독방에서 보냈다.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이들을 비전향 장기수라 부르지만, 유독 <월간조선>에서는 이들을 미전향 장기수라 고집스레 부른다. 비전향이 주체적으로 전향을 거부한 것이라면, 미전향은 아직 전향을 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전향을 시키고야 말 공작대상인 것이다. 비전향 장기수로서는 처음으로 출옥한 이래 이 땅에 인권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온 인권운동사랑방의 서준식 선생도, 이제는 북으로 돌아가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많은 장기수 선생들도 다 그들에게는 미전향 장기수일 뿐이다.
이 땅의 장기수들은 크게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한국전쟁중의 유격대 활동과 관련하여 체포된 사람들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흔히 간첩이라 부르는 남파공작원들, 다음으로 통혁당, 인혁당, 남민전,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 등 이남의 자생적인 변혁운동의 맥락에서 발생한 사건 때문에 투옥된 사람들, 그리고 납북되었다가 귀환한 어부들이나 고국에 유학왔던 재일동포들 중에서 조작간첩으로 얽힌 사람들이다. 이들 중 유격대 출신들은 1989년 사회안전법 폐지로 모두 출소하였기 때문에 30년 이상의 초장기수들은 대개 남파공작원 출신이다.
세계 최장의 장기수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지닌 김선명 선생은 1951년 투옥되어 45년을 옥중에서 보내고서야 사회로 돌아왔다. 김선명 선생보다 며칠 앞서 투옥된 분으로 얼마 전 북에서 돌아가신 이종환 선생이 계셨지만, 김선명 선생보다 2년 먼저 출옥하셔서 김선명 선생이 그런 타이틀을 안게 되셨다. 만델라보다도 18년이나 더 징역을 사신 김선명 선생의 기록은 다른 나라에서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이지만, 그 기록이 45년에 멈춘 데는 또다른 비극적인 이유가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평택 이남의 좌익 재감자들이 모두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좌익수들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이 없었더라면 세계 최장의 장기수 복역기록은 어쩌면 반세기를 넘겼을지도 모른다.
일흔한살 나이에 석방된 김선명 선생은 백살을 바라보는 노모를 만나셨다. 종잇장처럼 가벼워진 노모는 고희를 넘긴 아들을 쓰다듬으며 네가 어른말을 안 들어서 그래라고 가볍게 꾸짖으셨다. 제가 보이냐는 김선명 선생의 말씀에 앞이 안 보이는 노모는 눈을 감으면 네 얼굴이 환하게 떠오른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옛날이야기 구조는 그래서 두 모자가 행복하게 잘 살았다더라라고 끝나는 것이 상례이지만,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현실은 이 기막힌 20여분의 짧은 모자 상봉을 처음이자 마지막 상봉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빨갱이 가족으로 온갖 시달림을 당해온 김선명 선생의 가족들은 더이상의 모자 상봉을 허락하지 않았고, 노모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기별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빨갱이 가족의 고통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 누가 그 가족들을 야박하다고 탓할 수 있을까?
일제강점기에도 15년 이상 징역을 산 독립운동가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고, 일반 무기수들의 경우 16∼18년이면 모두 출소하는 것이 관례인데 비전향 장기수들은 왜 30년, 40년씩 옥살이를 해야 했을까? 그리고 이들은 왜 그토록 오랜 기간 징역을 살면서 감옥 안의 감옥이라 불리는 특사에서 엄중 독거 처분을 받고 밑바닥 생활을 해야 했을까? 강제전향제도는 일제가 이 땅에 남기고 간 악랄한 유산의 하나였다. 전향이란 말은 원래 일본의 사상검사들이 우리나라의 사회주의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친 후쿠모도 가즈오(福本和夫)의 방향전환론에서 따온 말이다. 일본의 사상검사들은 좌익의 용어를 빌려서 변절이나 굴복과 같이 사상을 버리는 자들의 자존심을 거슬리게 하는 용어 대신에 그럴듯한 말을 만들어내 마치 이들의 생각이 바뀐 것이 상황에 대해 주체적인 대응인 양 호도했다.
1933년 6월 일본 공산당의 거물 사노 마나부(佐野學) 등의 공개적인 전향선언이 발표된 이후 일본 열도에서는 옥중에 있던 공산주의자의 약 9할이 전향하는 등 전향이 하나의 시대조류를 형성했다. 공산주의 역사가 짧은 일본에서 공산주의 사상은 대부분의 활동가들에게 체화되지 못했다. 그들은 마치 모자를 갈아 쓰고, 장갑을 갈아 끼듯 손쉽게 공산주의를 버리고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다. 일본의 좌익들한테는 공산주의를 버려도 돌아갈 마음의 고향이 있었다. 계급을 초월하는 천황이라는 존재, 공산주의라는 한갓 외래사상을 버리고 일본정신으로 돌아간다는 명분 등은 전향에 대한 죄의식을 씻어주었다.
그러나 조선인 사상범들에게는 이렇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다. 공산주의를 일제에 대한 투쟁의 수단으로 받아들였던 대부분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게 전향은 일제에 대한 투항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상의 문제 이전에 민족적 양심의 문제였다. 극좌에서 극우로 전향한 어느 일본인 작가가 “우리는 전향해도 돌아갈 조국이 있지만 그대들은 그런 게 없다”라고 말한 것은 조선인 사상범들의 고뇌를 잘 지적한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조선에서의 사상전향은 일본에서의 전향에 비해 훨씬 더 강력한 폭력과 강제를 수반했고, 또한 체계적인 사후관리를 필요로 했다. 일제는 일본인들이 일단 전향하면 같은 편으로 받아들였지만, 조선인들의 경우는 전향을 하더라도 같은 편일 수 없었다. 일본에서는 없는 사상보국연맹이나 대화숙 같은 전향자 관리기구가 조선에 출현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분단정권으로 출현한 이승만 정부는 일제의 사상보국연맹을 본받아 보도연맹을 만들어 전향자들을 대거 가입시켰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자 약 30만명에 달하던 보도연맹원들 중에서 한강 이남 지역의 맹원 대부분은 경찰 소집으로 조직적으로 ‘처리’되었다. 이남에서의 강제전향공작은 이렇게 전향자들을 한번 싹쓸이한 토대 위에서 1950년대 다시 시작되었다.
동지를 팔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다
제국주의자들이나 지배세력이 전향을 강요하는 것은 단지 그 한 사람을 ‘개과천선’하게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 전후에 공산당과 사회당이 끝내 화합할 수 없었던 것도, 해방 뒤 이남에서 조선공산당이 심각한 내분에 빠져들어간 것도 다 전향제도의 후유증이었다. 전향은 처음에는 공산주의사상을 포기하는 것이면 충분한 것으로 인정받았지만, 상황이 엄혹해질수록 동지를 팔지 않으면 전향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전향의 대가는 형편없었다. 흔히들 전향서를 쓰면 즉각 석방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겨우 특사를 나와 일반수가 되는 것뿐이었다. 사상이나 양심 같은 것과는 담을 쌓고 지낸 자들이 다른 사람의 깊숙한 내면에 자리한 양심이나 사상의 자유로 제시한 대가는 고작 이것이었다.
5·16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전국의 각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좌익수 800여명을 이남의 모스크바라 불리게 된 대전형무소로 집결시켰다. 그뒤 1968년 청와대 습격사건,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등이 연이어 일어나자 이북의 특수부대가 대전형무소를 공격하여 좌익수들의 탈출을 꾀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이에 박 정권은 대전에 좌익수 일부를 두고 광주, 전주, 대구, 목포 등지로 분산시켰는데, 1년 뒤 목포는 취약지대라고 수용자들을 다시 대전으로 이감했다.
'내면의 자유'를 지킨 최전선 투사들
박정희 정권의 강제전향공작이 본격화한 것은 1973년 6월 대전, 광주, 전주, 대구 등지의 교도소에 중앙정보부의 지휘와 책임 아래 사상전향공작반이 설치되면서였다. 1960년 4월 민중봉기 이후 장면 정권은 간첩죄를 제외한 모든 무기수들을 일률적으로 20년형으로 감형시켰는데, 70년대 초반이 되자 이들의 출옥이 임박한 것이다. 또 1972년 7·4남북공동선언 등 남북관계가 일시적으로 진전을 보자, 박정희 정권은 합법공간이 열릴 것을 우려하여 비전향 장기수들을 전향해야 내보내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 박 정권은 한편으로는 강제전향공작을 벌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형기를 마쳤으나 전향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재판없이 계속 구금하기 위해 사회안전법을 준비했다. 이 당시에 강제전향이 그토록 폭력적으로 실시된 데에는 어쩌면 박정희 자신의 열등감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남로당의 군사부 핵심간부였다가 군내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의 명단을 넘겨주고 살아남은 박정희에게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는 장기수들이 곱게 보였을 리 없다.
1975년에 제정되어 1989년에 폐지된 사회안전법은 영어로 한다면 Social Security Law가 될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법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보장 내용을 담는 것인 반면, 우리는 재범의 우려가 있는 적색분자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앞서 소개한 최남규 선생의 경우 1973년에 만기출옥하여 고물상 등으로 연명하던 중 사회안전법이 제정되자 “주민등록까지 기피할 뿐 아니라 재북가족을 동경하며 독신으로 생활하고 있어서 죄를 다시 범할 현저한 위험성이 있다고 인정”되어 청주보안감호소에 재수감되었다.
강제전향제도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1973년 무렵은 밖에서는 김대중씨가 일본에서 납치되고, 서울법대 교수로 동생이 중앙정보부원이기도 했던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에서 의문사하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바깥도 그런 지경이었으니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구타와 일반적인 고문은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다. 깡패한테 ‘떡봉이’라는 완장을 주어 전향을 시키면 너를 풀어준다라는 미끼로 고문을 대신시키고, 바늘로 찌르고, 아픈 사람에게 전향하면 약을 준다고 하고, 한명이 들어가도 답답한 한여름의 독방에 열댓명을 몰아넣고, 고문해서 실신한 사람의 손에서 지장을 찍어 전향하였다고 공포하고…. 어떤 장기수 한분은 그렇게 전향서가 만들어지자 내용을 조금 고친다고 갖다달라고 해서 가져다주자 그 자리에서 입에 넣고 먹어치워 전향을 모면하기도 했다. 고향을 떠나 이민간 사람들에게 고향집의 사립문 여닫는 소리를 녹음해 전해준다면 아주 시적이고 운치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도 전향을 위한 고문의 일종으로 이용되기까지 했다. 이런 폭력적인 전향공작 과정에서 손윤규 선생을 비롯한 다섯분이 의문의 죽임을 당하여 현재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문제제기가 되어 있는 상황이다.
장기수는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을 위반한 빨갱이들이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분들의 죽음을 조사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이들의 죽음이 과연 진상규명위의 조사대상인가 하는 논란이 일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강제전향에 대한 항거는 우리의 민주화운동에 장기적으로 아주 중요한 기여를 했다.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와 같은 인간의 내면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대전제이다. 비인간적인 강제전향에 맞서 싸운 비전향 장기수들은 바로 이 내면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최전선에 서 있었다. 다만 우리의 민주화운동 세력이 그분들의 역할을 뒤늦게야 인식한 것이다. 빨갱이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것을 우리 사회가 깨달은 것만 해도 반공독재의 광풍을 넘어서는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진전이었다. 즉 장기수문제를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인권문제로 인식하게 된 과정은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각성과정이기도 했다. 또 경찰서 등에 잡혀가면 별 거리낌없이 반성문 쓰던 우리에게 장기수들은 양심의 자유가 무엇인지 본보기를 보여준 귀중한 선생님들이었다.
전향 장기수들도 북으로 돌려보내야
신념의 화신 베드로도 닭이 울기 전에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던가? 장기수들은 그 엄청난 고통과 고독, 모멸감 속에서 자기를 지킨 분들이다. 현재 비전향 장기수들 중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북으로 갔지만, 강제전향공작 과정에서 전향서를 쓴 장기수들은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극한의 폭압 속에서 사상의 자유를 견지한 분들을 높이 평가할 이유는 충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향과 비전향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또는 당사자인 장기수들이 전향은 비도덕적이고 비전향은 도덕적인 것이라고 본다면, 이는 분열의 싹을 심으려는 전향공작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기수, 그들은 강제전향의 진흙탕에서 피어난 연꽃과도 같은 존재이다. 전향을 한 분들은 다만 조금 일찍 시들었을 뿐이다. 이분들 중에서 북으로 가기를 원하는 분들을 돌려보내는 것은 우리 사회가 강제전향제도의 악령을 떨쳐버리는 중요한 한 걸음이 될 것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 한국현대사

"끝내 고향을 못 보고…" 99년 12월11일 중풍과 치매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난 비전향 장기수 최남규씨의 영정에 꽃을 바치며 오열하는 동료 장기수.(사진/ 이정용 기자)
마땅히 이 대열의 앞장에 서서 고향으로 가셨어야 할 최남규 선생은 1999년 12월11일 중풍과 치매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최남규 선생은 수십년 감옥살이를 하면서 옥중에서 돌아간 숱한 동지들의 이름과 행적, 수번과 병명, 사망일자 등을 고혈압으로 답답한 가슴속에 모두 담았다가 출옥하자마자 수전증으로 떨리는 손으로 기록으로 남긴 전설적인 기억의 소유자였다. 그런 선생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인과 자식들의 이름을 종이에 적고 외우시더니 끝내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선생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방영된 서울방송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그런 상태의 선생께서 “고향이 어디에요”라는 질문에 “명천이닷!”라고 힘있게 답하시고 “집에 언제 가요?”라는 질문에 “난 통일돼야 가!”라고, “선생님 소원이 뭐예요?”라는 질문에는 “고향에 가는 거다! 고향으로 갈 거야”라고 답하시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같이 옥중에서 고생한 동지들은 통일은 아직 안 되었어도 다들 고향으로 가시는데…. 비전향 장기수들의 송환이 결정된 이후 9개월만 더 버티셨어도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으셨을 텐데라는 필자의 아쉬움에, 선생과 같이 오랜 기간 징역살이를 한 최하종 선생은 최남규 선생께서 그만큼 버티신 것도 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 때문이었다고 말씀하신다. 비전향과 미전향

98년 5월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비전향 장기수 신인영(왼쪽)씨가 먼저 풀려났던 장기수 이경구씨의 환영을 받으며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사진/ 이정용 기자)

조선노동당 창당 55돌 기념행사장의 환영구호. 그러나 장기수들의 전향을 비도덕적이라고 매도한다면, 이는 분열의 싹을 심으려는 전향공작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과 다름없다.(사진/ 한겨레 곽윤섭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