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어메는 어디 가고 언나들끼리 쌀을 빻나

<절편> 설이 가까워 몸져누운 봉순이 어머니, 어머니가 모기만 한 소리로 가르쳐주는 대로 절편을 제법 만들어낸 아이들

1050
등록 : 2015-02-16 17:15 수정 : 2015-02-27 10:39

크게 작게

방앗간 쪽에서 아들(아이들)의 지껄이는 소리가 나더니 봉순이가 화롯불을 달라고 합니다. 느들 뭐하나, 물으니 설에 먹을 절편을 만들려고 쌀을 빻는데 체가 얼어서 쌀가루가 빠지지 않아서 녹이려고 한답니다. 어머니가 할 때는 체질이 재미있어 보였는데 자기가 직접 해보니 손이 시리고 팔도 너무 아프고 힘이 든다고 합니다. 어메는 어디 가고 언나들끼리 쌀을 빻나.

봉순이 어머니는 밥을 못 먹은 지가 열흘이나 돼서 아들끼리 설음식을 장만하느라 방앗간이 붐비기 전에 일찌감치 준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봉순이 아버지는 전쟁 뒤 아직까지 소식이 없습니다. 봉순이 어머니는 설이 가까워지자 삽짝 밖에서 아랫마을을 한없이 바라보기를 며칠을 하더니 아무것도 하기 싫고 만사가 귀찮다며 밥도 안 먹고 몸져누웠습니다. 약도 넘어가지 않아서 못 먹는답니다.

전순예
느들끼리 뭘 하겠노. 언나들은 방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있으라고 할머니랑 어머니가 하던 일을 멈추고 빻아주려고 하니 아니라고 즈들끼리 한답니다. 즈네들 어머니가 사람은 열네다섯 살이 되면 궁리가 넓어져 무슨 일이나 다 할 수 있다고 했답니다. 봉순이는 나흘 뒤면 열다섯 살이 되기 때문에 괜찮다고 합니다. 남자아이는 자기는 나흘 되면 열세 살이 돼서 자기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막내도 나도 나흘 뒤면 열한 살이라고 입을 앙당그레 물고 두 주먹을 불끈 쥡니다.

힘이 모자라 방아 찧기가 힘들자 봉순이는 궁리하다 다듬잇돌에다 다듬잇방망이로 절편 반죽을 두드립니다. 칼도마에다 반죽을 잘 만져서 모양을 만들고 종지기로 떡살을 대신 찍어 그럴듯하게 절편을 잘 만들었습니다. 동생들을 시켜 이웃에 절편을 돌리면서 우리 어머니가 아프다고, 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약을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이웃에서 사람이 죽어도 모르고 우리가 너무 무심했다. 모두들 죽을 끓여 들고 모여왔습니다. 봉순이 어머니는 북어처럼 말라서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꼴로 누워 있습니다. 동네에서 반의원이라고 소문난 완식이 할머니도 조당숙(좁쌀죽)을 쑤어 들고 왔습니다. 봉순이 어머니가 모기만 한 소리로 자기는 아무것도 안 넘어간다고 아들을 잘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새파랗게 젊은 것이 못하는 소리가 없네. 완식이 할머니가 벼락같이 소리치며 등줄기를 냅다 때립니다. 모두 다 깜짝 놀랐습니다. 저 어린것들을 두고 그런 소리가 나오나. 빨리 일어나 죽을 먹지 못해! 하시면서 일으켜 안고 죽을 수저로 입에 떠넣습니다. 목에 넘어가기 전에 토해놓습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자꾸만 떠넣습니다. 못 먹는 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먹고 토해도 남는 것 있으니 먹으라고 죽 한 그릇을 토하고 떠넣고 하느라 할머니 옷도 다 버렸습니다. 어린것들이 말없이 어메가 토해놓은 것을 닦아 치웁니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니 봉순이 어메도 눈을 뜨고 쳐다봅니다.

봉순이는 고맙다고 떡상을 차렸습니다. 느덜도 떡도 먹고 죽도 같이 먹자고 했더니 아들이 정신없이 먹습니다. 떡이 간도 맞고 반죽도 맞고 제법 잘 만들었습니다. 떡은 어떻게 만들었느냐고 물으니, 화롯불을 어머니 곁에 갖다놓고 앉아서 어머니가 모기만 한 소리로 가르쳐주는 대로 물을 끓여 떡가루 함지에 팔팔 끓는 물을 단번에 많이 붓지 말고 조금씩 부으면서 작은 주걱으로 빨리빨리 저어 뭉쳐서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가지 않도록 손안에서 말랑말랑 뭉치라고 해서 그대로 했답니다.

많이 치댄 다음 부엌에 가서 솥에 물을 넉넉히 붓고 시루에 작은 보재를 깔고 강냉이 가루에 밀가루를 섞어 시룻번(김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바르는 반죽)을 만들어 바른 다음 불을 때 물이 설설 끓어 김이 오르면 떡 반죽을 한 켜 안치고 불을 때 다시 김이 오르면 다시 반죽을 안치라고 해서 세 번 안쳐 찌고 김이 다 오른 다음에 밥부제(보자기)를 덮고 소댕(솥뚜껑)을 덮고 불을 치우고 한참 뜸들인 다음에 방에 가져와 만들었다고 합니다.


완식이 할머니가 정선 사실 적에 갓 시집온 앞집 새댁이 무엇을 잘 먹지 않더니 나중에는 아무것도 못 먹어서 무슨 죽을병에라도 걸린 줄 알고 의원한테 갔더니 안 먹는 것이 습관이 돼서 그렇다고 먹고 토해도 좋으니 자꾸 먹으라고, 못 먹는 것이 아니고 안 먹는 버릇을 고치라고 해서 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고 하면서 안 먹는 버릇을 고쳐 아들딸 낳고 잘 사는 것을 보았다고 얘기해줍니다. 사람들이 봉순이 어머니에게 남은 죽은 선선한 데 두고 부지런히 데워 먹고 설 때는 아들 데리고 놀러오라고 당부당부하고 돌아갔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 주부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