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도 찝찝하다. 지난해에 못다 읽은 책은 왜 이리 많은지. 포장지도 뜯지 못한 책, 서재에 꽂아둔 장식용 책 등등. 다독가들 역시 읽은 책보다 못 읽은 책이 더 많다. 쉽게 읽을 수 없지만 너무나 읽고 싶은 책. 그래서 그들이 ‘올해엔 꼭 읽고 말 거야’라고 다짐한 책들을 펼쳤다. ‘내가 미치도록 읽고 싶은 2015년의 책’이다. _편집자
쉽게 읽고 덮어둘 책이 아니구나
우선 지난해 읽었던 것부터 평가해본다. 예전에 한 번씩 본 것이기는 하지만 이탈로 칼비노의 ‘우리들의 선조 시리즈’ 세 편을 연이어 읽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새 번역이 나와서 그건 성공했다. 프랑스 누보로망 작가 조르주 페레크와 알랭 로브그리예도 새로 기획된 작품들이 나와서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읽었다. 특히 해설까지 곁들인 페레크의 <인생사용법> 재출간이 기뻤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스탠리 큐브릭과 에이드리언 라인이 각각 만든 영화와 비교까지 하면서 봤다.
이제 반성의 시간이다. 커다란 덩어리 몇 개가 짐처럼 남았다. 우선 토머스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다. 새물결출판사에서 펴낸 이 작품은 두 권에 10만원이라는 가격 때문이라도 많이 팔리지 않았을 것 같다. 다행히 나는 지난해에 선물을 받게 되었는데 기쁨도 잠시, 1천 쪽이 넘는 그 엄청난 분량 앞에 한숨을 쉬어야 했다. 이 책은 올해 읽기로 한다. 핀천의 또 다른 작품인
일단 사놓고 보는 것도 한 방법
올해 엄청난 분량으로 무장한 마르크스 평전이 새로 나온다는 소식을 어디서 주워들었는데, 이 책이 실제로 나온다면 곧장 구입할 것이다. 그러고는 어쩌면 아주 당연하다는 듯 전혀 읽지도 않은 채로 책장 어딘가에 끼워둘 것이다. 책 읽기에 뭐, 왕도가 따로 있나? 일단 사놓고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한심한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무리해서 책을 사들이는 나에게 내 속마음은 매번 이렇게 속삭인다. 어쨌든 사놓은 책은 사지도 않은 책보다 그나마 읽게 될 확률이 높은 것이 아니더냐! 그리고 못 읽었다고 하더라도 낙심하지 말지어다. 올해도 어김없이 연말이 되면 나는 그동안 사놓은 책을 앞에 쌓아두고 겸허하게 회개와 반성의 시간을 가질 것이다. 책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오체투지 수준의 속도로 전개되는
<블러드>는 1959년 미국 캔자스주 홀컴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일가족 살인 사건을 다룬 책이다. 카포티는 6년 동안 두 살인자와 홀컴의 모든 것을 조사하고 이 책을 완성했다. 살인 사건이 풍기기 마련인 묘한 흥분에도 불구하고 <블러드>는 무척이나 읽기 힘들다. 잔인해서가 아니라 잔인할 정도로 차분한 글이기 때문이다. (읽다가 포기했다 다시 읽기를 반복한 지 올해로 4년째지만 아직도 절반 이상을 못 읽었다.)
카포티는 추리소설가의 신속함 대신 전기작가의 꼼꼼함을 이용해 사건을 서술한다. 일반적으로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책들이 (업계의 홍보 문구를 빌려 표현하자면) 충격적인 결말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는 반면 <블러드>는 걷는 것도 아니고 거의 오체투지 수준의 속도로 전개된다. 작가는 살해당한 딸이 연도별로 사용한 잉크 색깔부터 아버지의 대학 동기가 어디서 뭘 하며 사는지까지 세세하게 기록했는데 어떤 때는 그런 노력이 지나쳐 병적으로 보일 정도다. <블러드>를 읽다보면 사막에서 신기루를 쫓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어서 빨리 누가 죽였고 왜 죽였고 살인자들은 어떻게 됐는지를 확인하고 싶은데, 몇 페이지만 더 나가면 밝혀질 것 같은데 그 결말이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끝내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책을 내팽개치지 못하는 것은 <블러드>가 잘 쓴, 너무나도 잘 쓴 글이기 때문이다. 문장은 탄탄하고 구성은 정교하다. 재치 있는 표현도 수두룩하다. 잠든 인물을 묘사하는 이런 문장을 보라. “잠이 무기처럼 뒤에서 덮친 듯 페리는 얼굴을 침대에 가로로 처박고 엎드린 상태였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이런 문장이 담긴 책이 형편없을 리가 없다. 이쯤 되면 문제는 책이 아니라 내게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아무리 ‘잘되면 내 탓, 잘못되면 남 탓’ 원칙에 충실해지고 싶더라도 말이다.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 되는 건 언제나 힘든 일이다.)
“이렇게 침착하게 글을 쓸 수가 있죠?”
초조한 자는 문제의 진행을 차분히 지켜보지 못한다고 그래서 뭔가를 단번에 해결지으려 한다고들 한다. 나 역시 무척 초조하다. 월말이면 반복되는 통장 잔고의 엑소더스를 지켜보고 있어도 초조하고 출간은 어렵겠다고 알려오는 출판사들의 전자우편을 읽고 있어도 초조하다. 어쩌면 나는 그 초조함 때문에 쉽게 결말이 드러나지 않는 책을 붙들고 분통을 터트렸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질투와 부러움 때문에 다음 질문의 해답을 얻기 전까진 책을 읽지 않으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당신은 성공할지도 알 수 없는 책을 6년이나 붙들고 있었으면서 이렇게 침착하게 글을 쓸 수가 있죠?”
그러거나 말거나 카포티는 살해당한 아버지의 대학 동기의 사돈의 팔촌의 옆집 강아지는 털이 복슬복슬한 갈색 푸들이었노라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갈 뿐이다. 아니,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는 내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을 해준 것 같다.
한승태 <인간의 조건> 저자
교훈 내지는 앎의 즐거움을 주는
그 ‘언젠가’를 이번 설로 정한 것은 최근에 구입한 <톨킨 전기>를 읽으면서다. 나는 평전 읽기를 좋아한다. 이런 유의 책들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한 가지쯤 교훈 내지는 앎의 즐거움을 준다. 지난해에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라는 책을 만들자고 결심할 수 있었던 것도 무심코 읽기 시작한 <비트겐슈타인 평전>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훌륭한 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아마 두 권일 텐데 그중 하나가 노버트 데이비스의 책이다”라며 비트겐슈타인이 무명의 추리소설가를 극찬한 문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이용후생적 차원에서라도 평전이라면 덮어놓고 읽는다. 특히 비주류로 치부되는 장르작가의 평전은 금방 절판될 게 뻔하니까 당장은 안 읽어도 보이면 구입해둔다. <톨킨 전기>도 그런 이유로 사두었다가 영화 <호빗: 다섯 군대 전투>의 관람을 마치자마자 읽기 시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흥미로운 대목이 눈에 띄었다.
1926년, 그러니까 톨킨이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절의 일이다. 그는 대학 교수회 회의에 참석했다가, 마찬가지로 영문과 교수인 스물일곱의 청년을 만나게 된다. 이 청년이 바로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인 C. S. 루이스다. 처음엔 서로 경계하던 두 사람은 상대방이 켈트 신화의 복잡한 신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정기적으로 만나 토론을 벌이곤 했다. 이후 톨킨과 루이스는 ‘인클링스’라는 문학동호회에 가입한다. 출간되지 않은 작품들을 읽고 비평하는 이 친목 모임의 구성원들은 대개 화요일 오전에 ‘독수리와 아이’라는 선술집에서 만나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서로가 쓴 작품의 초고를 동료들 앞에서 낭독했다. 이때 톨킨이 낭독한 작품이 <반지의 제왕>이다. 낭독 뒤엔 논쟁이 이어졌고 칭찬보다는 혹평이 많았다.
다음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재촉이 없었다면
이 모임은 톨킨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했다고 전기의 저자는 적고 있다. 무엇보다 모임의 좌장 격인 루이스는 <반지의 제왕>이 완성되기까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톨킨은 루이스가 죽은 뒤 한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그의 끊임없는 관심과 다음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재촉이 없었더라면 나는 결코 <반지의 제왕>을 끝마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예전에 소설 창작 모임 비슷한 것을 했는데 당시 내 소설의 초고를 내 목소리로 들은 동료들은 ‘야야, 이거 하나도 재미없는데?’ 하고 속으로 욕했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지면의 제약으로 더 옮기는 것은 어렵지만 아무튼 <톨킨 전기>에는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잔뜩 있어서 책이 끝나갈 무렵에는 ‘이제 슬슬 <반지의 제왕>을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고 말았다. 아아 10년도 더 전에 사둔 책을 이제야 읽게 되다니, 아직 펼쳐보지도 않은 마당에, 이런 결심만으로도 알찬 설 명절을 보낼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든다.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힌디어와 라오스어로 된 책들까지
하지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면 사정이 좀 다르다. 원활한 가족관계 영위를 위해 반드시 읽을 책만 사들이고, 사들인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다른 책은 (웬만하면) 사들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나는, 아내의 대단히 혹독한 평가에 의해서도 현재 약 73% 정도의 책 소화율을 기록하고 있다. 아아 장하다, 나 스스로가.
아무튼 그중 ‘안 읽은 27%’가 오늘의 이슈일 텐데, 여기서 나의 재고처리지심을 가장 강하게 자극하는 책들은 내가 애호하는 각종 예술가들에 대한 책(전기·자서전·인터뷰집)들인바, 나의 생업과 직접 관계가 있음으로 해서 묵은지 될 일 없는 문필업과 영화업 종사자들을 뺀 나머지 예술가들의 책들 중, 올해엔 기필코 끝내리라 마음먹은 책이 마침 한 권 있다. 바로 에릭 클랩턴의 자서전 ‘인생을 지켜보리라’ 하는 다짐
아무튼 옛말에도 있듯, 책은 표지만 보고는 결코 판단할 수 없다. 최소한 표지를 열어 날개까지는 봐야 한다. 최소한.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나쁜 선택에서라면 나 역시 에릭 클랩턴 못지않은 명인이자 거장이라고 자부한다만, 그런 선택이 반드시 인생을 나쁜 방향으로만 이끄는 것은 아님을, 대단히 멋지게 늙고 계신 에릭 클랩턴 형님을 통해서도 충분히 목격하고 있다. 그러니 올 한 해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자신을 책망하지 말고 좀더 느긋한 마음으로 ‘인생을 지켜보리라’ 하는 다짐 또한 묵은지로부터 얻은 선물이니 묵은지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흠, 아무렴.
한동원 영화평론가·소설가
종횡무진 고전을 훑어나가는
하여튼 <신곡>이 종교서적이라는 선입견은 이 친구만 그런 게 아닌 듯하다. 단테가 <신곡>을 쓴 중세가 종교적 아우라에 에둘려 있었고 <신곡>의 배경 역시 지옥·연옥·천국이니 말이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신곡>을 읽는 즐거움은 종교와는 거리가 멀다. 아니 오히려 그 휘장을 한 겹 벗겨냈을 때 <신곡>은 비로소 모험과 열정,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가득 안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짧게 말하면 <신곡>은 중세 이전 고대문학의 황금기를 탐험하는 지도다. 그 안에서는 율리시스가 다시 항해를 떠나며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고 그리스 신화가 재구성된다. 더욱 놀라운 건 그 많은 이야기를 잠언과도 같은 3줄의 시로 표현하거나 길어야 한 페이지 정도로 압축해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아킬레우스가 애국심 때문에 죽었다고? 애국은 무슨 얼어죽을,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성 위에서 내려다보는 폴리세네 공주에게 한 방에 간 거야. 그래서 뒤꽁무니를 쫓다 화살에 맞은 거라고. 세미라미스는 정말 바람둥이였어. 명색이 여왕이 자기 편하자고 매춘 합법화가 말이 되냐고. 카르타고의 디도 있잖아. 그 여자는 정말 괜찮았어. 사랑하는 남자가 떠났다고 절벽에서 몸을 던지잖아….
율리시스(제26곡)는 한술 더 뜬다. 페넬로페? 물론 사랑했지. 하지만 내가 여자 치마폭에서 늙는다는 게 말이나 돼. 당연히 아니지. ‘인간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혜를 따르기 위해 태어났노라’ 그렇게 폼나게 몇 마디 하니까 친구들이 그냥 따라붙더라고. 그래서 다 끌고 바다로 떠났지. 지브롤터해협을 빠져나가 좌현으로 계속 내려갔어. 남십자성을 보며 5개월쯤 가니 남쪽 끝이었지…. 이런, 최초의 남극탐험은 아문센이 아니라 율리시스로 바꿔야겠군. 아무튼 그렇게 종횡무진 고전을 훑어나가는 단테의 더듬이를 따라가다보면 당최 지루할 틈이 없다.
중간중간 농담처럼 날리는 멘트도 심상찮다. 죄인의 강(제10곡)에서 만난 카발칸테가 아들의 안부를 묻자 단테는 의아해한다. 아니, 과거는 물론 미래까지 다 안다는 영혼이 그걸 몰라서 물어? 그는 ‘노안이라서 멀리 있는 건 잘 봐도 가까이 있는 건 볼 수 없다’며 슬쩍 비껴간다. 하지만 이건 정말 놀라운 물음이다. 여기에는 20세기 실존주의까지 이어진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내 행동인가 아니면 신인가’라는 오래된 물음이 담겨 있으니 말이다. 단테는 이렇게 잘라 말한다. 현재는 산 자의 몫이지, 지금 나의 선택이 미래를 결정하는 거라고. 신이 뭘 알겠어….
노래를 눈으로 부를 수야 없지 않은가
그렇게 놀랍고 흥미 있는 이야기가 <신곡>에는 가득 차 있지만 정작 <신곡>을 다시 읽으려는 건 그뿐만은 아니다. <신곡>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시이고 책읽기의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연휴가 시작되면 나는 방문을 닫고 천천히 책을 펼칠 것이다. 그리고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다지오, 베토벤의 <황제> 2악장을 틀어놓고 <신곡>을 낭송해나갈 것이다. 시는 노래니까. 노래를 눈으로 부를 수야 없지 않은가. 베토벤의 아다지오와 동조된 내 목소리는 아테네 시민 앞에서 일리아스를 읊조리는 호메로스처럼 내 서재를 다시 꿈꾸게 할 것이다.
김재성 <문명과 지하공간> 저자
소리는 소리를 낳았다
이 시리즈는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남산강학원&감이당)를 비롯해 문탁·규문 등 이웃 공동체들이 ‘집단지성’을 발휘해 발간한 연작이다. 이 시리즈가 탄생하기까지엔 약간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바야흐로 갑오년(2014) 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지방 강의를 위해 KTX 열차를 타고 가던 중 문득 어떤 ‘소리’가 들렸다. 생각이 떠오른 게 아니라 분명 가슴 깊은 곳에서 ‘소리’가 났다. ‘낭송 고전이 필요해~’라는. 참 뜬금없는 일이었지만 그럴 만한 단서는 있다. 세월호 참사가 던져준 근원적인 질문과 함께 스마트폰의 도래와 더불어 사람들이 목소리를 점점 잃어가고 있고, 동시에 청각이 점점 퇴행하고 있으며, 소리를 잃으면 감정이 뭉치고 쌓여서 소통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기타 등등, 이런 생각들이 그날 그 기차 안에서 하나의 소리로 응축·발산된 것 같다.
소리는 소리를 낳았다. 일단 낭송의 의미를 짚어주는 가이드북(<낭송의 달인>)을 쓰는 게 좋겠고, 그다음엔 낭송하기 좋은 고전들을 시리즈로 엮어서 내고. 그런데 그건 흔히 나오는 고전 선집같이 목록화된 고전이 아니라 뭔가 스토리를 담아야 한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게 동양 별자리 28수. 28수는 사계절에 맞추어 동청룡(봄), 남주작(여름), 서백호(가을), 북현무(겨울) 등 각 7수로 나누어진다. 시리즈를 여기에 맞춰 구성하면 1년 내내 낭송과 함께 할 수 있겠다, 그럼 각 시리즈 7권은 어떻게 배열하면 좋을까? 먼저 판소리에서 시작해 동의보감으로 마무리하고, 그 사이에는 동양 고전의 기본 축인 유·불·도의 경전들과 그 이후에 나온 명문장들로 채우면 좋겠다, 등등. 이런 생각(아니 소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어느 날 이미 작업은 시작되었고 지난해 가을부터 책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뭐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가장 큰 수혜자는 기획자인 나 자신이다. 이 시리즈 안에는 내가 탐독하고 싶은 고전들이 망라되었기 때문이다. 고전평론가라고 주석이 난무하는 중후한 책들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 또한 날렵하고 매끄러운 책들이 좋다!
심청·흥부의 ‘말발’과 ‘지혜’를
그래서 올해는 이 28권의 책들을 음미하면서 각종 칼럼과 단행본 작업을 할 예정이다. 판소리만큼 우리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텍스트도 없다. 말을 잃고, 이야기를 잃은 시대에 춘향이와 심청, 흥부의 ‘말발’과 ‘지혜’를 익힐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공부가 있을까. 또 논어와 불경, 장자, 서유기 등의 언어들은 시공을 초월한다. 내용보다 더 중요한 건 주파수다. 인간과 우주를 이어주는 진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고전들을 낭송하면 기혈 순환에도 아주 그만이다. 그 이치를 알고 싶으면 각 시리즈 마지막에 배치된 동의보감을 참조하시라. 낭송만큼 좋은 공부법은 없다. 도서관이나 학교, 집에서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요컨대 모든 고전은 낭송을 염원한다! <낭송의 달인>을 쓰면서 터득한 이치다.
고전과 낭송이 만나면? 고전의 이치와 사람의 목소리가 어우러지는, 곧 소리와 지혜의 인드라망이 펼쳐진다. 그 인드라망에 접속하노라면 또다시 어디선가 예기치 않은 소리가 들릴 것이다. 갑오년(2104) 봄날 그 열차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미숙 고전평론가
독서는 타이밍이다
이 책을 2012년 한 온라인 서점이 문을 닫을 때 반값에 샀다.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나 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처럼 평소에 엄두를 내기 어려웠던, 값도 페이지도 두꺼운 다른 책들과 함께 샀다. 그러나 독서는 타이밍이다. 사두고 묵힌 책은 좀체 읽히지 않는다. 이 글을 쓰기 위해 3년 만에 처음으로 <인간과 상징>을 싸고 있던 비닐을 뜯어서 서문을 읽었다. <인간과 상징>에 대한 독서 후기를 보면 베개로 써도 될 만큼 두껍다거나 모서리가 둥글어서 좋다거나 은박이 입혀진 오돌토돌한 커버 질감이 좋다는 등 외모 칭찬이 만만치 않다. 다들 나처럼 책을 만져보고 쓸어보며 오랜 시간을 보냈을 거라고 확신한다.
우연히 만날 수 있는 책이 있고 때가 무르익고 마음의 준비가 됐을 때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도서관에서 다른 책들을 구경하다가 읽기 시작했다. “꿈은 바라는 것의 성취”라는 말을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자신을 비판하기 위해 작동하는 사고의 기능을 멈추고 의식에서 떠오르는 표상들을 자유롭게 건져서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들여다보는 정신분석 과정은 꿈 해석에서도 비슷하다. 프로이트는 “일단 방법만 알게 되면 비판 없이 자신을 관찰하는 상태에 들어가기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꿈 해석도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꿈의 해석>은 사랑하는 조카가 죽거나 딸이 관 속에 들어가 있는 꿈을 꾼 사람들의 이야기를 분석하며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원하지 않고 두려워하는 사건을 담고 있는 꿈조차도 어떻게 소원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은폐하는지를 살핀다. 프로이트의 수많은 친구들, N교수·P부인·G신사 같은 꿈풀이 해설가가 될 만한 친절한 등장인물들도 있다. 그러나 나의 <꿈의 해석> 읽기는 성적인 재료의 묘사에 상징이 풍부하게 이용된다는 확신을 만나며 멈추고 말았다.
왜 아직 참조의 세계에만 머물고 있나
융은 자신이나 환자들에게 재앙이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예고편 같은 꿈을 꾸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린 시절 영성적 체험을 한 사람은 늘 깊은 우물 같은 것을 끌어안고 살게 된다고 믿는데, 어린 시절 목 없는 유령을 보고 어른이 되어선 만다라가 펼쳐지는 꿈을 꾸었다는 융이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한다. 도깨비를 무서워하지 않을 나이가 됐지만 자기 안의 억압되고 일그러진 상과 마주치는 것은 여전히 두렵다. 게다가 내가 아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빚어진 도깨비라면 더욱 그렇다. 어릴 적부터 신비주의에 가까운 꿈을 자주 꾸는 편이라 융의 해석이 궁금하면서도 그 때문에 융 읽기를 미뤄왔다.
피에르 바야르가 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선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 정신의 주체성의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다시 들추고, 융의 맥락에서 읽으면 더 흥미로울 조지프 캠벨의 <신화의 세계> 책장을 마구 훑었다. 왜 아직 나는 참조의 세계에만 머물고 있을까. 본론으로 바로 가기는 참 어렵지만 올해가 본론의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남은주 <한겨레> 문화부 기자 mifoco@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