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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멜로? 퀴어? 로드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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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1-1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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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음소리와 함께 엉켜 있는 두 사내. 카메라 극부감으로 보여지는 좁은 쪽방. 아! 절정의 소리와 함께 끝나는 격렬한 정사. 숨결을 고르며 두 사내가 조금 떨어진 채 알몸으로 누워 있다….

사내2 “형 같이 살자…. 길에서 어떻게 지낼려구….”

사내1 “…….”

촬영을 끝내고 후반작업중인 <로드무비>(감독·각본 김인식, 출연 정찬·황정민, 제작 (주)싸이더스)의 시나리오 첫 장면이다. ‘사랑하라 희망없이’란 문장을 부제처럼 가진 영화이지만, 이 영화의 마케팅 담당자는 “이걸 멜로로 볼 수 있을까요? 하긴 멜로가 아닐 것도 없네요”라며 갸우뚱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로드무비>는 한 발짝만 더 밀려나면 다시 살아올 수 없는 깊은 수렁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아웃사이더를 동성애 구도 안에서 다룬다. 제목처럼 두 남자의 긴 여행을 카메라가 함께 따라가는 로드무비라고 하거나 동성애에 초점을 맞춰 퀴어영화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장르 규정일지 모른다. 석원(정찬)은 잘 나가던 증권사 직원이었으나 증시가 가라앉으면서 ‘쪽박’차고 노숙자가 된 경우이고, 대식(황정민)은 산악인으로 가정까지 꾸몄다가 어쩐 이유로 노숙자 왕초가 된 인물이다. 이들이 서울을 떠나 긴 여행길에 오르는 이야기다.

<로드무비>는 동성애라는 육체적 느낌이나 동성애를 둘러싼 규범의 충돌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퀴어영화라고만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느낌을 남긴다. 한 남자가 어떤 남자를 깊이 사랑하게 되고 이 애정을 때늦게 받아들이게 되는 비극은 이성애 멜로의 흔한 어법과 닮았다. 또 여행을 떠난 뒤나 그 이전이나 한정된 먹이를 놓고 서로 뺏고 빼앗기는 약육강식의 풍경이 날것처럼 쉼없이 튀어나온다. 빼앗김의 가속도에 시달리다 아예 그 시스템에서 도망나온 이들이 서로 아껴주다 사랑에 빠지는 구도 역시 멜로적이다. 사회성이 짙은 멜로라고나 할까. 어찌 됐든 메이저제작사가 만든 이 영화가 개봉하는 내년 봄에는 동성애 담론이 또 한번 반짝거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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