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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영화/ 판문점 둘러싼 두개의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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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8-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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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 <공동경비구역 JSA>… <피아골>이 기소되던 시대는 끝났다.

지금에야 웃긴 얘기 하나.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1955)은 한국전쟁 때 지리산에서 투쟁하던 빨치산의 비인간적인 행동에 회의를 품고 남으로 귀순하는 남자를 다룬 ‘건전한’ 얘기다. 그런데 감독은 “북한 공산당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기소되어 법정에 섰다. 우리는 그 시절 그 영화들에서 한참을 걸어서야 <공동경비구역 JSA>를 만난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북한 초소에서 살인이 벌어진다. 용의자로 지목된 남한 병사는 북한군에 납치되어 탈출했다고 주장하고, 북한쪽은 군사분계선을 넘은 남한 병사의 테러라고 맞선다. 두개의 진술이 상반되니 어느 하나는 거짓말이다. 그런데 만일 둘 다 거짓이라면?

중립국의 입장에서 사건을 수사하던 한국계 스위스인 소피 소령은 당사자들이 숨기려는 진실에 접근한다. 지뢰를 밟은 남한군 병사를 북한군 병사가 구해주고 그들 사이에 우정이 싹튼다. 진상을 추적하는 현재의 시간대가 추리물의 수법을 취한다면 사건 발생까지를 보여주는 과거는 아기자기한 드라마다. 우연한 인연으로 알게 되어 마침내 북한쪽 초소를 드나들게 되기까지, 주인공들이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은 유쾌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최전방에 근무하는 그들은 충분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지만 그들의 만남에 이념적인 갈등은 없다. 다른 인종으로 느껴질 정도로 달라야만 하는 그들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쉽게 좁힐 수 있는 약간의 차이였던 것이다.

이러한 감독의 현실해석을 전달하기 위해 곳곳에 웃음을 깔아놓은 대중적인 화법은 의외로 효과적이다. 남북분단이라는 역사적 상황에 직면하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과장하거나 감상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는 점도 돋보인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영화가 정치적으로 분명한 입장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우정이란 없다. 우호조약이란 양국의 이해가 일치할 때 성립하는 협력관계에 불과하며, 무엇보다 국가란 감정이 없는 비인격체인 것이다. 기뻐하거나 흥분하며 서로에 대해 감정을 느끼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의 국민이다. 그러나 개인을 둘러싼 국가의 관계망은 보일 듯 보이지 않 듯 지속적으로 존재하다가 역사 혹은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어느 순간 개인의 행동을 강제한다. 이것은 비극이며, 호형호제하던 영화 속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눌 때 자신의 실체를 드러낸다.

결국 <공동경비구역 JSA>에는 두개의 코미디가 있다. 하나는 남북의 전후 세대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잔재미들이고, 다른 하나는 판문점으로 상징되는 상황 그 자체에 대한 그늘진 코미디다. 소피 소령은 진실을 알고서도 밝히지 못한다. 그의 선택은 인간적인 동시에 현실적이다. 스위스군 장교의 대사처럼 판문점은 남과 북, 그리고 주변국가의 입장만이 존재하는 공간이며 개인의 진실이 파고들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 전자와 달리 우리는 두 번째 코미디에 마음껏 웃지 못한다.

영화가 끝날 무렵 카메라는 반세기 동안 정체되었던 판문점의 정지된 화면을 부유한다. 이 탁월한 장면은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현대적이고 성의있는 대답의 마침표이며, 동시에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작은 각성이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영화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준다.


권용민/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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