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시대 인간의 정체성을 되묻는 두 권의 책 <기술과 운명> <피노키오는 사람인가, 인형인가?>
인간만큼 인간에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달리 또 있을까. 화학적으로 육체의 70%가 수소와 산소의 결합물(H20)로 이뤄진 단순한 물질에 불과하다지만, 첨단과학과 수천년 철학의 역사로도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찾았다고 보긴 어렵다. 인간에게 인간은 여전히 영원한 우주이다. 아니, 과학기술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이란 우주는 더욱 광활하고 복잡하게 팽창해가고 있다.
‘인간적 비인간’들과의 조우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학문의 역사는 흔히 ‘인간이란 다른 존재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묻는 우회로를 통해 해답을 구해왔다. 동물과는 어떻게 다른가, 신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비교해봄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성찰해온 것이다. 구름을 그려 하얀 종이를 덮어감으로써 달빛의 은은한 광채를 드러내는 동양화의 묘사법이 인간의 조건을 묻는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이성적 존재, 도구의 인간은 동물과 식물 등 다른 살아 있는 존재들과 구분되는 인간의 본질적 조건들에 대한 저마다의 통찰을 보여준다.
그러나 과학문명의 발달은 오히려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들과의 오래된 경계를 갈수록 무너뜨리고 있다. 스스로 사고하는 이성적 존재라는 인간의 특징이 앞으로도 계속 인간만의 것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인지는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점점 힘을 얻어가고 있는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카네기멜런대학의 로봇전문가 신시아 브리질 교수는 “25∼50년쯤 뒤면 로봇이 인간과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해지고, 로봇 축구팀이 월드컵 우승팀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음성인식 소프트웨어의 창안자로 꼽히는 레이 커즈웨일은 “몇십년 안에 인간의 두뇌를 능가하고 스스로 인권을 주장하는 로봇이 제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세기의 천재’로 불리는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최근 컴퓨터가 세계를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금부터 유전자 조작으로 인간 유전자의 성능을 개선하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인 반기계 사이보그의 출현과 복제인간의 탄생도 기술적으론 손바닥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은 “지능있는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멀지 않은 장래에 실현될 것으로 예견되는 이런 다채로운 ‘인간적 비인간’들과의 조우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오래된 물음에 대한 관심을 벌써부터 폭발시키고 있다. 상상력의 전장인 영화와 문학은 이 문제를 대중적인 관심사로 끌어올리고 있다. 인간 존재론의 가장 오래된 탐구 분과인 철학이 이 인간론의 빅뱅과 무관하게 지낼 수는 없을 터이다. <한겨레21>에 철학카페를 연재하는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의 <기술과 운명>(한길사 펴냄, 02-515-4811)과 양운덕씨의 <피노키오는 사람인가, 인형인가?>(창작과비평사 펴냄, 02-718-0541)는 지금껏 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의 조건을 진지하게 묻고 있다. ‘사이버펑크에서 철학으로’라는 부제가 붙은 <기술과 운명>은 <블레이드 러너> <공각기동대> <바이센테니얼 맨> <매트릭스>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 다섯편의 사이버펑크 영화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미래사회에서의 인간 존재론을 다루고 있다. 인간의 정체성, 자아와 타자의 경계, 시간과 기억의 문제 등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문제가 흥미롭고도 진지하게 펼쳐진다. 인간은 ‘되는’ 것
사이버펑크는 펑크(punk)의 음울하고도 반항적인 분위기와 하이테크의 미래상을 결합한 세기말의 문화현상 또는 경향을 말한다. 다섯편의 영화는 모두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들이 도전받는 그리 멀지 않은 미래사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인간 정체성의 혼란을 불러온 결정적인 요인은 인간이 인간 자신을 모방하는 것이다. 도구의 존재로서의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온 모방과 제작의 역사였다. 그 절정에서 인간은 자신을 닮은 존재를 만들어낸다. 인간의 기능들을 완벽히 모방했기에 그 존재들은 인간보다 한층 뛰어난 능력을 지닌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만들어진 인간의 힘이 본래 인간의 힘을 압도할 때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가, 만들어진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갖는가 등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제기된다. <기술과 운명>은 사이버펑크 영화들의 분석을 통해 한 인간의 정체성은 결코 고정돼 있거나 타고난 실체가 아니라고 결론내린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되기’라고 말한다. 인간은 ‘(인간)이다’와 ‘아니다’라는 이분과 결별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며, 배워가고 찾아가는 ‘되다’의 세계에 속한다는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레플리컨트라 불리는 인조인간들은 자본·기술복합체의 생산공정을 통해 만들어졌지만, 위대한 경험을 통해 인간보다 더 존엄한 인간적 존재로 성장해간다. “나는 너희 인간들이 상상도 못할 광경들을 보았어. 오리온 셔틀의 불길 위로 공격해 들어가는 비행선들을 보았고, 탄호이저 바다의 어두움을 밝힌 명멸하는 빛들도 보았지. 이제 그 모든 순간들이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인조인간 반란군의 지도자 로이가 자신을 처단하려 한 인간 추적자(블레이드 러너)에게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인간이 자의적으로 설정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린다. 기억이 주입된 채, 한낱 도구로 만들어진 존재지만, 태어난 어떤 인간도 그가 빚어온 인생의 빛나는 체험 앞에서 인간의 선천적 권능을 주장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피노키오는…>은 <기술과 운명>에 비하면 좀더 전통적이다. 지금껏 철학사를 통해 규정돼온 인간의 조건들을 짚어보고 있다. 그러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참신하다. 기발한 질문들의 연쇄를 통해 철학사의 정체성 담론들을 짚어가고 있다. 질문 사슬의 첫 고리는 이렇다. “말하는 나무인형 피노키오를 죽이면 살인죄가 되나, 기물파손죄가 되나?”
저자는 특정한 해답을 제시하는 대신 다양한 철학적 견해들을 돌아보도록 이끌어준다. 애초 이 책이 단편적인 지식보다는 철학하는 사고, 철학성을 길러주는 철학입문서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결같은 사고의 방향은 있다. 이 책 역시 인간이란 처음부터 완전한 조건들을 갖춘 채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고 본다. 스스로의 사유와 경험을 통해 인간됨의 다양한 조건들을 배워나가며 성장해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폐기된 기준, 이성과 합리성
이런 관점에 설 때 인간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이 갖는 유효성과 제한성은 한꺼번에 드러난다. 이성적 동물이라는 규정은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 조건의 큰 부분을 말해주고 있지만, 인간처럼 사고하는 안드로이드의 탄생 앞에선 구분의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기술과 운명>에선 이 때문에 이성적 존재가 다원화한 미래사회에선 이성과 합리가 아닌 감성과 비합리야말로 인간과 인간적 비인간을 가르는 경계가 되리라고 본다. <피노키오는…>은 인간이란 모든 인간론의 규정들을 합한 것보다 크고 복잡한 존재이며, 새로운 사회적·기술적 조건들은 점점 더 인간에 대한 단선적 규정들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든 인간 스스로에 대해 돌아보고 성찰하는 그 자체라고 저자는 결론내린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그러나 과학문명의 발달은 오히려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들과의 오래된 경계를 갈수록 무너뜨리고 있다. 스스로 사고하는 이성적 존재라는 인간의 특징이 앞으로도 계속 인간만의 것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인지는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점점 힘을 얻어가고 있는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카네기멜런대학의 로봇전문가 신시아 브리질 교수는 “25∼50년쯤 뒤면 로봇이 인간과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해지고, 로봇 축구팀이 월드컵 우승팀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음성인식 소프트웨어의 창안자로 꼽히는 레이 커즈웨일은 “몇십년 안에 인간의 두뇌를 능가하고 스스로 인권을 주장하는 로봇이 제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세기의 천재’로 불리는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최근 컴퓨터가 세계를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금부터 유전자 조작으로 인간 유전자의 성능을 개선하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인 반기계 사이보그의 출현과 복제인간의 탄생도 기술적으론 손바닥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은 “지능있는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멀지 않은 장래에 실현될 것으로 예견되는 이런 다채로운 ‘인간적 비인간’들과의 조우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오래된 물음에 대한 관심을 벌써부터 폭발시키고 있다. 상상력의 전장인 영화와 문학은 이 문제를 대중적인 관심사로 끌어올리고 있다. 인간 존재론의 가장 오래된 탐구 분과인 철학이 이 인간론의 빅뱅과 무관하게 지낼 수는 없을 터이다. <한겨레21>에 철학카페를 연재하는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의 <기술과 운명>(한길사 펴냄, 02-515-4811)과 양운덕씨의 <피노키오는 사람인가, 인형인가?>(창작과비평사 펴냄, 02-718-0541)는 지금껏 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의 조건을 진지하게 묻고 있다. ‘사이버펑크에서 철학으로’라는 부제가 붙은 <기술과 운명>은 <블레이드 러너> <공각기동대> <바이센테니얼 맨> <매트릭스>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 다섯편의 사이버펑크 영화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미래사회에서의 인간 존재론을 다루고 있다. 인간의 정체성, 자아와 타자의 경계, 시간과 기억의 문제 등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문제가 흥미롭고도 진지하게 펼쳐진다. 인간은 ‘되는’ 것

사진/ <블레이드 러너>의 첨단 레플리컨트 레이텔은 인간 추적자 테커드와 사랑에 빠진 뒤, 인간의 본질을 빚어나간다.

사진/ 나무인형 피노키오는 다양한 체험을 통해 인간됨의 조건들을 익혀 나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