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 남북 대결에선 웃지 못할 해프닝이 많았다. 북한이 아시안게임에 처음 출전한 1974년 테헤란 대회에선 북한을 이기기 위해 현직 국회의원이 출전한 일도 있었다. 주인공은 역도선수 출신의 신민당 황호동 의원. 은퇴한 지 6년이 지난 그는 메달 하나라도 더 보태려고 대회 도중에 양복 대신 경기복으로 갈아입고 급파돼 은메달을 따냈다. 이 대회에서 남한은 북한을 금메달 1개 차이(16-15)로 제치고 4위를 차지했다. 애초엔 북한이 금메달 수에서 18-16으로 앞섰지만 역도에서 3관왕을 차지한 북한의 김중일이 금지약물 복용으로 금메달 3개를 모두 박탈당하는 바람에 순위가 뒤바뀌었다. 김중일의 금메달은 세 종목 모두 은메달리스트였던 이란의 하우상 카르간네자드가 고스란히 승계받으며 이란이 중국을 제치고 2위를 차지했다. 북한은 억울하다고 펄쩍 뛰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남북 대결이 펼쳐진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였다. 어느 쪽이든 지면 국민적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양쪽 모두 수비를 두껍게 쌓았고, 연장까지 120분간 하품 나오는 경기를 펼쳤다. 결국 0-0 무승부. 당시엔 비기면 공동 금메달을 줬다. 시상대에 선 남한 주장 김호곤과 북한 주장 김종민은 억지 춘향 격으로 손을 잡았고, 비좁은 시상대에서는 서로 엉덩이를 밀치며 자리 싸움을 했다. “금메달을 바친다” 말 남기고 먼저 떠나 1990년 베이징 대회 여자양궁 개인전은 북한이 가져갈 뻔한 금메달을 한국 사진기자들의 ‘소음’으로 뺏다시피 했다. 북한의 김정화가 세 발 남길 때까지 남한의 이장미에게 3점 앞서 금메달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자 남한 사진기자들이 김정화의 8번 사대로 우르르 몰려갔다. 무명인데다 소음 훈련이 안 된 김정화는 요란한 카메라 셔터 소리에 당황했고, 8번째 화살을 6점에 쏘고 말았다. 결국 선두를 달리던 그는 합계 335점으로 5위로 떨어졌다. 반면 남한의 이장미(339점)·이은경(338점)·김수녕(337점)은 나란히 금·은·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다. 1994년 히로시마 대회 레슬링 그레코로만 100kg급에서 금메달을 딴 송성일(당시 25살)의 별명은 ‘갤포스’였다. 태릉선수촌에서 운동할 때 위장약을 입에 물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금메달을 딴 뒤 당시 위암 투병 중이던 “어머니에게 금메달을 바친다”고 했다. 정작 자신이 위암 4기인 줄 몰랐던 것이다. 그는 석 달 뒤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송성일은 말기암으로 종합스포츠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유일한 선수로 기록됐다. 김동훈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기자 cano@hani.co.kr
냉전시대 남북 대결에선 웃지 못할 해프닝이 많았다. 북한이 아시안게임에 처음 출전한 1974년 테헤란 대회에선 북한을 이기기 위해 현직 국회의원이 출전한 일도 있었다. 주인공은 역도선수 출신의 신민당 황호동 의원. 은퇴한 지 6년이 지난 그는 메달 하나라도 더 보태려고 대회 도중에 양복 대신 경기복으로 갈아입고 급파돼 은메달을 따냈다. 이 대회에서 남한은 북한을 금메달 1개 차이(16-15)로 제치고 4위를 차지했다. 애초엔 북한이 금메달 수에서 18-16으로 앞섰지만 역도에서 3관왕을 차지한 북한의 김중일이 금지약물 복용으로 금메달 3개를 모두 박탈당하는 바람에 순위가 뒤바뀌었다. 김중일의 금메달은 세 종목 모두 은메달리스트였던 이란의 하우상 카르간네자드가 고스란히 승계받으며 이란이 중국을 제치고 2위를 차지했다. 북한은 억울하다고 펄쩍 뛰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남북 대결이 펼쳐진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였다. 어느 쪽이든 지면 국민적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양쪽 모두 수비를 두껍게 쌓았고, 연장까지 120분간 하품 나오는 경기를 펼쳤다. 결국 0-0 무승부. 당시엔 비기면 공동 금메달을 줬다. 시상대에 선 남한 주장 김호곤과 북한 주장 김종민은 억지 춘향 격으로 손을 잡았고, 비좁은 시상대에서는 서로 엉덩이를 밀치며 자리 싸움을 했다. “금메달을 바친다” 말 남기고 먼저 떠나 1990년 베이징 대회 여자양궁 개인전은 북한이 가져갈 뻔한 금메달을 한국 사진기자들의 ‘소음’으로 뺏다시피 했다. 북한의 김정화가 세 발 남길 때까지 남한의 이장미에게 3점 앞서 금메달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자 남한 사진기자들이 김정화의 8번 사대로 우르르 몰려갔다. 무명인데다 소음 훈련이 안 된 김정화는 요란한 카메라 셔터 소리에 당황했고, 8번째 화살을 6점에 쏘고 말았다. 결국 선두를 달리던 그는 합계 335점으로 5위로 떨어졌다. 반면 남한의 이장미(339점)·이은경(338점)·김수녕(337점)은 나란히 금·은·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다. 1994년 히로시마 대회 레슬링 그레코로만 100kg급에서 금메달을 딴 송성일(당시 25살)의 별명은 ‘갤포스’였다. 태릉선수촌에서 운동할 때 위장약을 입에 물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금메달을 딴 뒤 당시 위암 투병 중이던 “어머니에게 금메달을 바친다”고 했다. 정작 자신이 위암 4기인 줄 몰랐던 것이다. 그는 석 달 뒤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송성일은 말기암으로 종합스포츠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유일한 선수로 기록됐다. 김동훈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기자 cano@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