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찌질남’ 이야기를 하다보니 감독님들의 찌질했던 연애의 기억, 부끄러운 연애의 기억이 궁금하다.
백: 연애한 지가 몇 년 돼서….
윤: 마지막 연애한 게 언젠지 구체적으로 말해야지.
전: 베이킹 수업한 게 마지막 아닌가.
백: 만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뭐 만드는 걸 좋아해서 같이 다녔다.
전: 근데 수업 끝나고 헤어졌단다. 우리가 <출중> 만들면서 수다를 좀 떨어서 잘 안다.
윤: 진짜 사귄 거 맞나? 반죽만 같이 한 세 번 한 거 아닌가. 내 기준에 그건 데이트도 아니다. 백승빈 감독은 영화·문학과 결혼했다. 보통 백 감독 같은 사람을 여성들이 진국이라 하는데, 연애도 많이 안 해보고 순수하고. 근데 이건 여성들의 판타지다. 백 감독은 인간관계에서 진국은 아니고 자기 취향과 업무에서 진국인 스타일이다.
- 다른 분은 부끄러운 연애사 없나.
전: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를 3년 동안 짝사랑했다. 근데 마치 3년 동안 연애한 기분.
박: 아, 부끄럽다.
윤: 그건 증세다. 병이다, 병.
윤: 백승빈 감독 편인 ‘기상이변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편에서 우희가 전화를 하면서, 점점 온도가 떨어지는 장면이 있다. 이게 대본으로 쓰면 재밌어도 막상 찍으면 쑥스러울 수 있는데 잘 표현했더라. 그리고 우희의 블랙드레스. 나는 반대했다. 아무리 생일파티라고 해도 집에서 검정드레스 차려입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진짜 괜찮더라. 이런거 보면 백감독이 나보다 여자에 대해서 더 잘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박현진 감독편인 ‘스캔들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편은 차 안에서 러닝타임 절반이 지나가기 때문에 자칫 밋밋할 수 있는데 감독님이 이주승과 천우희 두 배우의 조합만으로 전혀 밋밋하지 않게 잘 찍으셔서 놀랐다. 게다가 이주승이 너무 능청스럽게 연기를 잘하더라. 이주승이 연기를 잘 하는 배우이긴 한데, 이런 연기도 할 줄 몰랐다. 전효정 감독 편인 ‘구남친을 추억하는 우리의 자세’편에서 우희가 처음에 막 옷을 벗는 장면이 있다. 보통 남자 감독들이 여성의 민낯을 드러내는 수법은 뻔하다. 혼자 비빔밥을 퍼먹는다거나. 그런데 전 감독님이 너무 잘 표현했다. 인상깊었다.
전: 백승빈 감독 편에서 “나 적금도 있고 새로 장만한 이 집도 마음에 들고…” 나레이션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 그때 “사실 서른살에 내 꿈은 남자친구와 세계일주 하는 것이었다”라는 나래이션이 있는데, 이때 백 감독님이 음악을 깔면서 세계지도를 쫙 보여주는데 이게 너무 좋았다. 이 에피소드가 어쩌면 여성들의 공감을 가장 많이 얻지 않을까 생각했다.
박: 전 윤성호 감독이 연출한 5화 ‘모퉁이를 돌 때 우리의 자세’에서 달밤에 우희가 춤추는 엔딩이 좋았다. 애초 시나리오에는 없었다. 마지막을 맺는 게 고민이 됐을텐데 마침 그날 슈퍼문이 떠서 슈퍼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으셨는지 여튼 마무리가 잘 됐다. 전감독님 편에서 우희가 풀샷에서 쫙 미끄러지는 장면을 비롯해 그 편에서 등장하는 슬랩스틱도 좋았다.
백: 저도 전 감독님 편에서 우희가 처음에 옷 벗어던질 때, 천우희라는 여배우의 다른 모습을 보게 됐다. 윤성호 감독의 경우 개인적으로 늘 궁금했던 게 있다. 박혁권·박희본 같은 윤성호와 합을 맞춰온 배우들 말고 새로운 배우가 와서 윤성호의 대사를 쏟아내면 어떻게 될까, 무너질까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을까 늘 궁금했는데 천우희가 무너지지 않더라. 그건 천우희의 힘이기도 하고 윤성호의 힘이기도 할 것 같다. 윤성호와 천우희의 모습을 보면서 1977년 <맨하탄>을 함께 찍은 우디앨런과 메릴스트립의 스틸사진이 생각났다. 그때 메릴스트립은 29살이었다. 29살의 메릴 스트립이 우디 앨런을 졸졸졸 쫓아다니면서 연기 지도받고 서로 상대역도 한다. 윤성호와 천우희는 이번 작품에서 딱 1977년의 우디앨런과 메릴스트립이었다.
웹드라마 〈출중한 여자〉는 스물아홉 패션잡지의 스타 기자 천우희가 ‘썸남’ 여럿과 밀고 당기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기린제작사 제공
규수 같은 싱글, 미련 없는 싱글…
- 천우희가 극중에서 29살이다. 29살에 여성들이 수난을 많이 당한다. 몇 년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기도 하고. 감독님들의 아홉수는 어땠나.
윤: 남자들이 서른쯤 되면 보이기 시작한다. 취업해서 3~4년 쭉 일하면 대학 졸업해서 갓 취직한 20대 중반 여성을 만날 수 있다는 게. 그러면서 전에 사귀던 동갑 여친과 헤어지고, 그러면 여자는 전성기가 지난 느낌으로 괴로워한다. 내가 그런 건 아니고. 나는 20살 전에는 연애를 딱 한 번 해봤다.
박: 난 딱 29살에 헤어졌다. 당시 남친이랑 5년 넘게 사귀었는데, 이미 너무 친구 같은 사이가 돼 있었다. 이 사람과 사귀면서 서른이 되긴 싫어서 헤어졌고, 마침 그때 영화 연출부에 들어가게 돼서 바쁜 나머지 후유증도 없었다. 다만 훨씬 전에 헤어졌어야 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그 관계를 1년여간 붙잡고 있었던 게 솔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백: 난 마지막 연애를 한 게 28살 때여서 29살의 연애 기억은 없다. 근데 기억나는 게 있다. 21살 때 여자친구랑 경주에 놀러갔다가 헤어졌다. 그때 빌려탄 자전거에 펑크가 났다. 바람을 넣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자전거포가 없었다. 사실 경주엔 자전거포가 굉장히 많은데. 그 전에 여러 가지 사건이 있긴 했다. 아무튼 그때 혼자 집으로 왔고, 헤어졌다.
박: 이게 문학청년들이 주로 그런데, 연애에서 시그널에 민감하다.
윤: 전형적으로 사건은 없는데 징후를 보고 행동한다. 백 감독은 미드·영드·소설 등 다양한 콘텐츠를 섭렵하고 있다. 인간은 스토리의 동물이다. 스토리를 소비하기도 하지만 생산도 해야 한다. 스토리를 생산하는 최고의 방법은 연애인데, 연애 안 하는 사람은 자체 스토리 생산이 가능하지 않으니 <브레이킹 데드> <섹스 앤 더 시티>를 통해 연애 수요나 개인의 서사를 해결한다.
백: 전적으로 동의한다.
윤: 이 안에 다양한 종류의 싱글이 다 있다. 전 감독은 ‘중산층 가정’을 이루기 위한 단계를 마다하지 않는 일종의 규수감이고. 박 감독은 20대에 연애를 다 해본, 온갖 산전수전을 겪은 싱글이고. 주변에 돌싱도 많다.
박: 내가 도시 여성 괴담, 도시 돌싱 괴담을 많이 알고 있다.
윤: 백 감독은 개인 서사가 부족한 싱글이고 나는 내일모레 마흔인데 아직 마음의 정처를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 이 사람 저 사람 욕심내고 기웃대는 싱글이다. 그러면서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싶어 하는 못난 남자다.
박: 출중한 남자네. (일동 웃음)
- 연애는 다 하고 싶은가.
(일동) 물론이다.
박: 연애는 하고 싶은데 요즘 결혼, 자식에 대한 가능성이나 욕심이 별로 없어졌다. 어떻게 혼자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많아서 보험도 알아보게 되고. 얼마 전에 보험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지금 들고 있는 80살 지급 보험을 100살로 늘릴 생각은 없느냐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내가 80살까지 혼자인데 계속 건강하다면 정말 보험 지급 연한을 100살로 늘려야 하는 거 아닐까.
윤: 난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종종 한다. 여자친구와 사귈 때 꼭 묻는 게 있는데 ‘죽을 때 와줄 거냐’는 거다.
박: 난 청소하기 싫을 때 ‘죽음’을 생각한다. 혼자 있다가 죽었는데 청소 안 해놨으면 구질구질하니까 청소하자.
윤: 난 외장하드를 청소한다.
힘들 때마다 “당 떨어진다”
- 마음이 허기질 때 먹는 음식은 뭔가. 천우희는 힘들 때마다 “당 떨어진다”며 각종 디저트류를 달고 산다.
박: 우희 캐릭터에 끼니 대신 ‘허니버터 브레드’를 먹는 여성들을 참고했다. 화려하고 순간 당을 채워주긴 하지만 끼니는 아닌 걸 먹는 여성. 내 솔푸드는 평양냉면과 소주. 냉면은 1만원대 초반으로 기분을 낼 수 있는 외식이다.
윤: 나는 홍어삼합. 홍어가 맛도 맛이지만 혼자 먹기 힘들다. 초밥은 혼자 먹을 수 있는데 홍어를 혼자 먹는 건 다 먹지도 못하고 그림도 이상하다. 홍어를 같이 먹는다는 건 취향의 커뮤니티가 되면서, 우리는 끈끈하다는 걸 보여주는 연대의 의미가 있다. <출출> 팀이 만나면 꼭 홍어삼합을 먹는다.
전: 샤부샤부. 따뜻한 국물과 신선한 채소들. 삼시세끼 샤부샤부만 먹고 싶다.
백: 컵케이크. 거주지가 홍대·상수 쪽인데 새로운 케이크 가게가 생기면 꼭 간다. 12개들이 테이크아웃해서 집에 갖다놓고 먹는다. 얼려먹으면 또 맛있다. 노홍철이 초콜릿을 찾는 것과 같은 심리다.
- 싱글의 좋은 점은 뭔가.
박: 내가 되게 한심하거나 술 취했거나, 아무튼 지금 내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을 때 그럴 수 있다는 것. 내 마음대로 내 공간에 널브러져 있을 때도 좋다. 냉장고에서 물 꺼내서 콸콸 마시고. 그럴 때 혼자 사는 맛을 느낀다.
전: 밤에 훌쩍 나가서 맥주 한잔 마시기도 좋다. 연애의 가능성도 늘 열려 있다. 이런저런 세계를 탐험할 가능성도.
윤: 그렇긴 한데, 난 요즘 혼자 죽는 것, 혼자 남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백: 어릴 때 제시카 유의 다큐멘터리 <비현실의 제국에서>를 보면서 혼자 죽는 것, 대신 작품을 남기는 것에 대한 판타지가 생겼다. 실화인데 헨리 다거라는 소설가가 나이 80살까지 브루클린의 허름한 옥탑방에서 병원 청소부로 일하며 혼자 살았다. 대신 밤마다 소설을 썼다. 그가 죽은 뒤 2만 장의 소설이 발견됐다. 그 작품이 너무나 대단했다.
윤: 유한한 삶이 영원을 획득하게 하는 게 예술이긴 한데 난 그런 것보다 그냥 살 맞대고 사는 게 좋다.
백: 나도 요즘은 그게 좋다고 생각한다. 어릴 적 유아적 환상이었다. 내 단편영화 <프랑스 중위의 여자>가 그런 예술의 이미지만 착취하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요즘은 나도 살 붙이고 살면서 애도 낳아보고 싶다.
우리 집은 ‘기-승-전-결혼하라’
- ‘결혼하라’는 가족의 압박은 없나. 이제 곧 추석인데 압박을 이겨내는 방법은 뭔가.
윤: 그게 가장 괴롭다. 우리 집은 ‘기-승-전-결혼하라’다. “어제 라디오 방송 들었다. 근데 라디오를 그렇게 잘하는데 왜 결혼을 안 해.” “어제 기사 봤다. 그렇게 잘생겼는데 왜 결혼을 안 해.” 예전에 여자친구가 생기면 보여드렸는데 이게 잘못인 것 같다. 자꾸 여자친구를 보여주니까 결혼하라고 더 성화하시는 것 같아서 요즘은 무조건 “사람 없다”고 한다. 없다는데 어쩌겠나.
박: 난 오히려 가족에게 말한다. “아, 결혼해야죠. 사람 좀 소개해주세요. 내일모레 마흔인데 나랑 만날 의향 있는 사람이면 소개해주세요.” 그러면 가족들이 “어, 너 내일모레 마흔이니? 야, 너도 나이가 많이 들었구나” 이러면서 놀라며 떠민다. “야, 시골보다 서울에 사람이 많지 않니” 하고.
백: 그냥 <출중>의 마지막 장면처럼 “에라 모르겠다” 하고 춤이나 추는 건 어떨까.
전: 오, 그러면 가족들이 “큰일 났다. 쟤 괴롭히지 말자” 하겠다. (일동 웃음)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