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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기와 없는 절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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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0-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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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사 무량수전의 돋보이는 실험… 보수적인 사찰 건축에 변화의 바람 부는가

사진/ 담양의 새로운 명물로 꼽히는 정토사의 모습. 절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면서도 절집의 전통을 담고 있다.(박영채)
전라남도 담양. 소쇄원과 명옥헌, 면앙정이 있는 가사문학의 본고장이다. 물 좋고 산 좋은 곳마다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정자들이 어김없이 자리를 지키며 운치를 더해주는 전통의 고장이다. 이 담양땅에 최근 새로운 건물 하나가 들어섰다. 읍내도 아니고, 그렇다고 깊은 산 속도 아닌 평범한 야산턱에 들어선 시멘트 건물 ‘정토사 무량수전’이다.

제4회 ‘크리악 상’ 받으며 건축계 주목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정토사 무량수전은 한채짜리 절집이다. 무량수전이라고 하면 으레 부석사와 배흘림 기둥이 떠오르지만, 아미타불을 모시는 불당이란 뜻이다. 그런데 정토사 무량수전은 겉으로 보면 쉽게 절이란 것을 알아채기 어렵다. 기와지붕도 불탑도 없고 단청도 없는데다 나무 건물이 아니라 시멘트 건물이다. 절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절. 그래서 이 절은 담양에서, 그리고 건축계에서 요즘 주목받고 있다.


정토사가 최근 건축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최근 이 건물이 올해 건축가협회상을 받긴 했어도 그닥 주목받지 못하다가 얼마 전 제4회 ‘크리악 상’(올해의 비평 건축상) 후보에 올랐기 때문이다. 크리악 상은 상금의 규모와 역사는 그리 크고 길지 않지만 건축계의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흐름을 대변하는 점에서 분명한 성격과 위상을 굳혀온 상. 월간 <건축인 포아>와 포아건축가포럼이 공동 운영하는 이 상은 주로 건축적 성과가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축물, 그리고 건축적 가치에 비해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판단되는 작품을 골라 환기시키는 데 중요한 의미를 둔다. 그래서 올해 상반기 완공한 이 건물이 다시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게다가 불교사찰 건축물이 후보에 오른 것은 정토사가 처음이다.

정토사는 일단 전통적인 절과 너무나 달라 보인다. 절이라고 하면 당연히 기와를 얹은 목조건물을 연상하지만, 기와가 전혀 없는 길쭉한 네모꼴 형태가 그대로 드러나는 현대적 느낌이 강하다. 사실 구조는 간단하기 그지없다. 앞뒷면이 모두 창으로 개방할 수 있어 창문을 열면 정자처럼 자연 속에 거의 노출되는 구조다. 마감재도 단순하다. 경제적 여건이 충분치 않은 관계도 있지만, 노출 콘크리트가 아닌 시멘트로 마감했고 그래서 질감이 그대로 살아난다.

건물 외부 못잖게 내부 역시 기존 절과는 느낌이 다르다. 빛과 공간이 다양하게 어우러지는 구조다. 설계자인 김개천(43)씨는 창살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와 그 창살 바깥으로 보이는 자연풍경의 조화를 가장 염두에 두었다고 밝혔다. 주변의 편안하고 뛰어난 자연 경관이 그림자로서 벽이 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또한 창틀이란 액자를 통해 그림처럼 보이는 차경(借景) 원리도 가미했다.

이처럼 독특한 모습 때문에 정토사는 이내 지역에서 유명해졌다. 주지 해강스님은 “절 이름도 유명해졌다”며 “주변 대학 건축과 학생들과 건축가들이 많이 찾아와 구경하고 간다”고 말했다.

건축이란 종합예술이 우리 국토와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주범으로 꼽히는 요즘 건축 풍토에서 정토사는 분명 두드러지는 건축물이다. 우선 무엇보다도 사찰 건축의 현대화 측면에서 우수 사례로 자리잡을 공산이 크다.

자연과 교감하는 매력적인 건물

사진/ 정토사의 내부. 빛과 공간의 조화를 추구했다.(박영채)
불교 건축, 즉 사찰 건축은 그동안 가장 보수적인 분야였다. 다른 종교 건축물들이 아직도 고정관념과 매너리즘에 빠져 있기는 해도 다소나마 변화의 바람이 불고 새로운 시도들이 접목된 데 비해 불교는 한발짝 물러서서 전통을 고수해온 편이다. 보수성이 강해 보이는 천주교만 해도 200년 넘은 포교의 전통 아래 건축에서도 많은 한국적인 시도와 현대화 시도들이 이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90년대 주목받은 김영섭씨의 안양 장래동 성당, 지난해 완공한 승효상씨의 서울 중곡동 성당 등이다. 개신교의 교회들 역시 다양한 형태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물론 불교 건축이 늘 깊은 산 속 기와집만을 고집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도심에 들어서는 사찰들의 경우 현대화하는 시도가 그래도 여럿 있었다. 불광사, 법안정사, 대각사, 구룡사, 법련사 등이다. 그러나 이들 새로운 건축적 변화를 준 도심형 사찰들은 대다수가 사찰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기에 불충분하고, 양식적으로도 우수하지 못하다는 비평을 들어왔다. 사찰조경연구소가 올해 열었던 학술회의에서는 “현대 사찰들이 전통 사찰의 고유성을 훼손하고 동시에 종교 건축의 위상실추로 이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사찰 건축은 그동안 고정관념 때문에 과감한 시도가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최고의 유명건축가 가운데 한 사람인 승효상씨가 설계했던 경주 율동법당의 경우 설계를 마친 상태에서 힘있는 일부 신도들이 “무슨 절이 기와조차 없느냐”며 거부해 착공 직전에 취소되기도 했다. 그래서 도심형 사찰이나 현대 건축을 시도한 절들은 모두 현대적인 재료에 지붕을 올리는 ‘절충안’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사진/ 김개천씨가 설계한 다른 불교건축물인 문사수법회. 김씨는 요즘 가장 활발하게 현대식 불교 건축물을 설계하는 건축가다.(박영채)
이런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정토사 무량수전은 돋보인다. 특히 도심도 아닌 지방에 들어선 사찰이 실험성 강한 사례를 과감히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설계자 김개천씨는 “설계안을 원안 그대로 받아들여준 스님들이 건축의 주역”이라고 평했다. 주지 해강스님은 “처음에는 신자들 가운데 기와집이 아니라는 불만도 나왔지만 설득했고, 실제 건물이 지어지고 난 뒤에 반응이 좋아지기도 했다”고 처음 분위기를 전했다.

정토사는 건물 그 자체로도 미학적, 건축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건축비평가 전진삼(건축발전연구소 소장)씨는 정토사를 “현대 건축의 장점인 입면, 즉 벽면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꾸며 자연과의 교감을 조절할 수 있게 한 점에서 매력적인 건물”이라고 평하고 “너무나 일반적이고 획일적인 우리 건축 풍토에서 이런 실험성있고 도전적인 건물들이야말로 우리에게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주는 소중한 것들”이라고 덧붙였다.

구본준 기자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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