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훈 감독은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을 통해 한국 단편 문학이 조금 더 살아갈 수 있도록 밀어주는 한편, 윗세대와 아랫세대 간 연결고리를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소설 생명력 살려 두 세대가 대화하도록 ‘봄봄’에서는 판소리를 통해 원작 소설 대부분의 문장을 온전하게 담았다. 성례를 시켜준다는 장인의 약속만 믿고 3년7개월간 데릴사위로 우직하게 일해온 주인공의 사정이 국악인 남상일의 판소리에 녹아든다. “더럽다 더럽다 이게 장인님인가” 했다가 “나는 장인님이 너무나 고마워서 어느덧 눈물까지 났다”라는 순박한 마음씨와 해학은 정겹다. ‘메밀꽃 필 무렵’과 ‘봄봄’에 향수가 있다면, ‘운수 좋은 날’에는 시대의 상처가 재현돼 있다.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한 인력거꾼 김 첨지의 이상하게 운수 좋은 하루를 따라가다보면, 조마조마하고 불안하다. 하루 종일 구름 낀 경성의 하늘에서는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김 첨지에게서는 쇠약한 가난한 기운이, 그 아내에게서는 병약한 기운이 가시지 않는다. “요즘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재현하는 1920~30년대는 판타지다. 모던하고 예쁘다. 하지만 실제 그 시대의 모습은 그게 아니다. 옛날 사진을 보면 세련된 외국인 사이에 있는 한국인의 차림새가 너무 슬프다. 솜으로 둘러싼 게 옷인지 뭔지 알 수도 없다. 하물며 고종 황제의 복장도 초라하다.” ‘운수 좋은 날’의 경성이 을씨년스러운 이유다. 안 감독은 신문사 사회부장이었던 현진건이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채 게재했다가 신문사에서 쫓겨났음을 상기시킨다. “현진건 선생님이 아침저녁으로 그렇게 술을 드셨다고 한다. 일본인이 있으면 자리를 떴다. 그가 바라본 경성은 얼마나 비통했겠나.” 나무토막 같은 죽은 아내의 얼굴에 떨구는 김 첨지의 눈물방울에는 그 비참함이 담겨 있다. 안재훈 감독이 한국 단편소설을 애니메이션으로 작업한 건, 아직 100년도 되지 않은 소설들이 생명력을 잃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사회는 너무 빠르게 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단편 문학이 조금 더 살아갈 수 있도록 밀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황순원의 ‘소나기’, 김동인의 ‘무녀도’ 등도 같은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작업하고 있는 <도래샘숲>이라는 장편 애니메이션 역시 한국의 정령들이 모두 사라진 도시에 관한 이야기다. 그가 <소중한 날의 꿈>에 이어 끊임없이 사라져가는 한국적인 것을 재현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뭘까. “나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역시 모두 잊혀질 것이다. 나와 같이 이 시대를 살고 나와 같은 것을 읽고 나와 같은 것을 느꼈던 사람들에게 함께 살아줘서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