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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심심풀이 땅콩도 좋으니 연락해”

12년 전 만나 술친구로 지내던 기자와 뮤지션이 결혼을 하게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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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21 16:21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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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션과의 결혼에는 뭔가 재밌는 구석이 있다. 뮤지션 아내 제공
이번엔 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해보련다. 뮤지션과 기자의 조합은 그리 흔치 않다. 주변 기자들 중에 뮤지션과 결혼한 사람도 없거니와 남편 주변에도 기자와 결혼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인지 주변 사람들은 종종 둘이 어쩌다 만난 건지 물어보곤 한다. 기자로서 뮤지션을 취재하다가 만났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상상력이 부족한 거다. 하핫.

남편과 나의 인연은 무려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나는 홍익대 앞의 작은 공연장에서 남편을 처음 봤다. 남편의 첫인상은 아주 희미하게만 떠오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만 해도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할 거라고는 전혀, 네버, 상상도 못했다. 내가 그 공연장에 간 것은 남편이 속한 인디밴드의 ‘광팬’이던 전 남자친구 때문이었다. 한 해의 마지막이었던 그날, 여러 인디밴드가 모여 밤새 송년 파티를 벌이고 있었고, 난 그 분위기가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남편은 그 신기한 모습을 제공해주는 한 명의 인물일 뿐이었다.

전 남친과 나는 그 뒤로도 이 밴드의 공연에 무수히 많이 다녔다. 그러면서 나도 이 밴드의 음악에 푹 빠지게 됐다. 우리 커플은 종종 공연이 끝나고 뒤풀이에 따라갔는데 그때부터 밴드 멤버들과 조금씩 말을 트기 시작했다. 특히 다른 멤버들보다 상대적으로 쉬워 보이는(?) 현재의 남편과 조금 더 친해졌다. 붙임성이 좋았던 나는 밴드 멤버들과 곧잘 어울렸고 전 남친과 헤어진 뒤로도 혼자서 공연장을 찾았다. 가끔씩은 새로운 남자들(?)을 데리고 가기도 했다. 남편도 종종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와 함께 와서 서로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친구가 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원을 졸업하고 백수로 기자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내게 남편이 고백을 해왔다. 딱히 싫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인디 뮤지션과 백수라니. 이 무슨 우울한 조합이란 말인가. 내 앞도 가리지 못했던 그 시절의 나는 단칼에 거절했고 우리의 인연은 거기서 잠시 끊어졌다. 시험을 준비하느라 공연장에 갈 시간도 없었거니와 고백을 거절해놓고 희망고문을 하기도 미안했다. 물론 남편은 “심심풀이 땅콩이라도 좋으니 연락해”라고 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남편님하, 안습. ㅠㅠ)

기자가 된 뒤에도 한동안 바빠서 공연은 가지 못했다. 우리의 인연은 한참 뒤 내가 다시 공연장을 찾으면서 이어졌다. 우리는 가끔씩 따로 만나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다. 하루는 남편이 “요새 너무 쪼들려서 밥 먹을 돈도 없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가 불쌍해진 나는 술값을 내준 뒤 “술 마시고 싶으면 연락해. 내가 사줄게”라고 얘기하면서 속으로는 ‘거참, 이 오빠 연애하기 쉽지 않겠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그를 내가 사귀게 될 줄이야;;)

몇 년이 흐른 뒤 그가 나에게 두 번째 고백을 해왔다. 한 번 차여서 소심해졌는지 그는 “일단 한번 만나나 보자”는 멋대가리 없는 말로 나를 회유했다. 그것도 주로 아저씨들이 모이는 동네 호프집에서. 왜 그 말에 넘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서른 중반에 뒤늦은 연애를 시작한 우린 긴 시간 차곡차곡 쌓아온 인연을 바탕으로 결국 결혼까지 했다. 그동안 각자가 겪었던 연애 경험은 관계를 더욱 튼실하게 해주는 교훈이었다. 이 만남을 반추해보건대 아무리 생각해도 결혼은 타이밍이다. 결혼할 시기에 만나는 애인이 어느 순간 배우자가 되는 것이다. 근데 우리의 그 타이밍, 정말 죽인다!

S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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