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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청춘들아, 낭만 좀 흥건하면 안 되겠니

다시 청춘이라면… 청춘 ‘같은’ 이들이 돌아보는 ‘청춘 리얼리티’,
tvN <꽃보다 청춘>과 영화 <족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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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21 15:55 수정 : 2014-08-22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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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짧다. 지나는 순간에도 지나갈 것을 염려한다. 우리는 20대에 <서른 즈음에>를 불렀고, 산울림이 노래한 <청춘>은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이다. 사전이 정의하는 청춘은 10대 후반에서 20대에 이르는 젊은 시절이다. 대한민국 청춘(20대)은 659만 명이다(2010년 기준 국가통계포털 참조). 그 5배에 달하는 30대 이상 3017만 명이 가끔씩 혹은 자주 청춘을 그리워한다. tvN의 배낭여행 시리즈 <꽃보다 청춘>에서 소년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애매한 나이’의 남자 셋이 청춘을 아쉬워하며 여행한다. “고작 4부작이라니 너무 짧다”며 6부작으로 늘려달라는 팬들의 성화가 하늘을 찌른다. 8월21일 개봉하는 ‘청춘영화 끝판왕’ <족구왕>은 청춘의 이야기다. 20대의 청춘은 풋풋한 진짜지만, 40대의 청춘도 여전히 ‘진짜’다. _편집자


<꽃보다 청춘>은 여행기다. 청춘을 지나온 40대 세 명이 ‘청춘인 양’ 여행한다. 별 준비 없이 갑자기 아시아 동쪽 가장자리에서 남미의 가장자리, 페루로 던져진다. 청춘이 아닌 사람들은 멀리 가려면 가져가야 할 게 많다. 44살 뮤지션 유희열은 공진단과 홍삼액이 필요하다. 41살 이적은 “나는 지갑만 좀 주면 안 돼?”라며 주머니에서 동전·지폐 우르르 쏟아내는 걸 못 참아하고 47살 윤상은 ‘프라이빗 배스룸’이 절실하다. 삶의 경험만큼 가방은 무거워지기 마련이건만, 세 명의 40대는 미처 가방을 챙길 겨를 없이 여행길에 올랐다. 그래서 가진 것 없는 ‘청춘’이 됐다.

해 되게 빨리 넘어가네” “우리의 청춘 같아”

할배·누나에 이어 세 번째 배낭여행 시리즈를 만들어내고 있는 나영석 PD는 이번 여행의 콘셉트로 ‘친구’와 ‘청춘’을 꼽았다. “친구들끼리 가는 여행인데 친구들이 청춘의 표상 같은 사람들이었으면 좋겠어요.” 그 얘기를 듣던 유희열은 얼굴 뻘게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자막이 떴다. “청춘이라뇨;;;;”

사실 <꽃보다 청춘>은 청춘의 이야기가 아니다. 청춘을 함께 지나며 같이 음악을 해온 사람들이 함께 나이듦을 확인하고 관계를 더 단단하게 굳히는 이야기다. 면도기도 없이 여행 온 덕에 셋 중 막내인 이적은 노화를 깨달았다. “하~ 나도 흰 수염이 나겠는데요. 길러보니까. 눈으로 확인한 건 처음이야. 보통은 요정도까지 안 기니까.” 동생의 한숨을 형이 받는다. “노화가 오는 거야.” 다시 동생이 말한다. “그쵸. 35세부터 온다는데, 노화가.”


페루의 모래사막에서 신나게 샌드보딩을 즐긴 뒤 사막에서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역시 화제가 되는 건 저물어가는 청춘이다. “아, 다 넘어간다. 되게 빨리 넘어가네.”(윤상) “해가 그렇더라구.”(이적) “우리의 청춘 같아.”(희열) “우리도 이제 거의 지났어.”(희열) “지났지. 우리 오래 했어.”(윤상) 그때 흐르는 음악은 이적의 <이십 년이 지난 뒤>다. “그때 가도 우린 같이 웃고 있을까/ 궁금해 가령 20년이 지난 뒤/ 술잔 가득 추억들을 붓고 있을까/ 멀지도 않은 20년이 지난 뒤/ 터벅터벅 걷다보니 우린 여기까지 왔지/ 비틀비틀할 때마다 서로 굳게 붙잡아주어.”

<꽃보다 청춘>은 중년이 품고 있는 ‘늙은 청춘’의 모습과 그들이 함께 지내온 20년이라는 세월이 쌓은 우정을 버무려 보여준다. 새로운 여행지에 도착할 때마다 셀카봉을 들고 셋이서 ‘우가우가’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는 청년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희끗희끗한 턱수염과 웃으면 생기는 눈가 주름은 ‘아, 이들도 나이가 들었구나’ 생각하게 한다. 20년 넘게 마셔온 술을 끊기 위해 약을 먹으며 힘들어하는 윤상을 이적과 유희열은 여행 내내 응원한다. 유희열은 낯선 페루 땅에서 “딱 뒤를 돌아봤더니 상이 형이 있고 적이가 있으니까 갑자기 기분이 막 좋더라구요”라며 두 형·동생을 든든해한다.

시청자이자 유희열·윤상·이적 세 뮤지션과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는 팬들은 프로그램을 통해 청춘, 그리고 자신을 돌아본다. 유희열의 팬 김경미씨는 팬페이지에 ‘꽃청춘이 주는 변화’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저번주 <꽃청춘>을 본 이후로 계속 적군의 <이십 년이 지난 뒤>를 듣고 있어요. 이 노래는 지난날을 너무 되돌아보게 하네요. 아주 오래전에 이곳에 7년 동안 사귄 남친이랑 헤어져서 너무 힘들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어느덧 저는 8개월이나 된 예쁜 딸아이의 엄마가 되었네요. 지난 몇 년 전부터 지금까지 맞벌이를 한다는 이유로, 아이를 돌보는 게 힘들다는 이유로 너무 제 자신에게 무관심했던 것 같아요. 저는 음악을 좋아하는 감수성 많은 여인네였는데 말이죠.”

회사원 최진규(38·가명)씨는 훌쩍 떠나는 것에 대한 로망이 더욱 커졌다. ‘청춘’의 특권처럼 느껴져 더욱 그랬다. “<꽃보다 청춘>을 보면서 김치찌개를 먹다가 훌쩍 티켓 끊어 떠나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어요. 나도 7천원짜리 숙소에서 잘 잘 수 있는데, 슬리퍼만 끌고 잘 돌아다닐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 이제 더 이상 예전에 친했던 또래들과 그렇게 훌쩍 여행 가기가 힘든 현실이 겹쳐져서 더 그런 걸 거예요. 다들 아이들이 있고 가족이 있고, 또 회사에도 가야 하니까.” 최씨는 “언젠가 친구들과 ‘꽃청춘’ 멤버가 가지 못한 북유럽으로 가서 ‘꽃보다 중년’을 찍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우리 아직 청춘이잖아” 함께 북돋으며

함께 늙어간다는 것, 함께 청춘을 그리워한다는 것, “우리 아직 청춘이잖아”라고 함께 북돋우는 것. <꽃보다 청춘>이 이전 시리즈에서 주지 못했던 선물이다.



〈꽃보다 청춘〉에서 9박10일 동안 페루에 갑자기 던져진 윤상·유희열·이적(왼쪽부터), 세 ‘늙다리 청춘’은 셀카봉을 들고 다니며 어디서나 셀카를 찍는다. CJ E&M 제공
진짜 청춘도 가볍지 않다. 2014년, 대한민국에서 청춘은 특히 무겁다. 입에 담기도 지겨운 토익, 학점, 연수, 인턴 경험 등 각종 스펙을 이고 지고 있어야 한다. 지금 청춘은 아무런 준비 없이 어디에도 던져져선 안 된다. 면접장이든 어디든 완전군장 못지않은 준비가 필요하다. 영화 <족구왕>은 무거운 청춘에게 보내는 연가다. 모든 학생들이 취업 준비하느라 여념 없는 서울의 중위권 대학. 캠퍼스에 더 이상 낭만은 없다. 취업에 도움 되지 않는 건 금기에 가깝다. 그렇지만 복학생 홍만섭은 개의치 않고 복학해서도 족구를 한다. 급기야 테니스장으로 바뀐 족구장 재건립을 위한 서명을 받는다. 총장과의 대화에서도 손들고 말한다. “저는 저와 제 친구들이 즐겁게 뜨겁게 뒹굴고 놀았던 족구장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저는 총장님께 족구장을 만들어주실 것을 건의합니다.”

대학교 때 있었으면 싶었던 친구

<족구왕>의 주인공 홍만섭은 지금은 사라진, 책 속에나 있을 것 같은 ‘청춘의 표상’ 같은 캐릭터다. 토익은 본 적 없고, 학점은 2.1이다. “공무원 시험 준비하라”는 과 선배의 말에 “연애하고 싶다”고 답한다. 첫눈에 반한 캠퍼스 여신 안나가 “여자들이 족구 하는 거 싫어하는 거 몰라요?”라고 핀잔 주자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교내 족구대회에 나가기 위해 꾸린 팀에서 전력에 전혀 도움 되지 않는 뚱뚱한 여학생에게도 “누나도 잘할 수 있어요”라고 진심으로 힘을 준다. 우문기 감독은 “대학교 때 ‘저런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캐릭터로 만들었다. 믿음직하고 착하고 뭐든지 열심히 하고 긍정적인 친구.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서 오염된 캠퍼스를 정화시키고 함께 있으면 주변이 정화되는 사람. 그런 히어로 같은 인물이다”라고 만섭을 설명했다.

폼 안 나고 찌질해 보이는 족구와 ‘족구왕’ 홍만섭을 통해 캠퍼스에 사랑과 우정을 일깨우는 영화 <족구왕>은 31살 우문기 감독이 막 통과해온 청춘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는 카투사를 나왔다. 취업이 잘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 몰라 토익 시험을 계속 봤다. 삼성 등 대기업에 입사 원서도 몇 차례 넣었다. 영상디자인을 전공했다. 학과에서 몇몇 동기들이 프로덕션을 통해 벌써 CF 데뷔를 했다. 다른 몇몇 친구들은 영화를 만든답시고 한쪽 구석에서 늘 영화 이야기만 하고 과제도 제대로 안 했다. 우 감독은 양자를 오갔다. 학과 과제도 하고, 영화도 만들었다. 좋아하는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우 감독은 아마 그때의 자신에게 지금 만섭을 통해 이야기를 건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이유로 하고 싶은 걸 못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야.”

현실의 무거운 청춘들에게는 판타지가 필요하다. 우문기 감독과 각본을 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동기 김태곤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는 단계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했다. “야, 근데 스무 살로 돌아가면 다시 영화과 갈 거냐?” 그 질문은 어쩌면 같다. “20년이 지난 뒤에도 영화 계속 찍을 거냐?” <족구왕>의 주인공 만섭은 2063년에서 왔다. 세상이 말하는 기준에 맞춰 지루한 인생을 살아온 만섭은 직장암에 걸렸고, 죽음의 문턱에서 만섭을 측은하게 여긴 천사가 그를 50년 전 스물네 살 시절로 돌려보내줬다는 것. 만섭은 “20대로 돌아오니 정말 좋았습니다. 왜냐면 전 그때 연애 한번 못해보고 밤낮없이 공무원 시험 준비에만 파묻혀 살았거든요. 2013년으로 돌아가면 하고 싶은 일들이 정말 많았어요. 먼저 족구를 매일매일 하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한다. 현실에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산다는 것은 판타지다. 영화를 만들어 돈 걱정 없이 산다는 건 100만분의 1의 확률이고, 독립영화를 규모 있게 만드는 일은 더 그렇다. 그렇지만 좋아하고 열심히 하면 판타지가 이뤄지기도 한다. 우문기 감독이 장편 데뷔작 <족구왕>을 투자를 받고 배급 지원을 받아 개봉하게 된 것처럼. 우문기 감독은 <족구왕>을 본 뒤 관객이 “‘내가 대학생 때 뭘 하고 싶었지?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뭘까?’ 하고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건 뭐지?

<족구왕>은 좋아하는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길 잃은 수많은 진짜 청춘들과 ‘마음만은 청춘’들에게 “그냥 재미있게 사는 건 어떻겠니” “낭만 좀 흥건하면 안 되겠니”라며 인생의 선택지 하나를 유쾌하게 보여준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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