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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더운 날 동네 전체가 한 그릇씩

<어죽> 청년들은 족대로 고기 잡고 어르신들은 감자·달걀 들고 장마로 파인 길 걸어와,
골짜기에 큰 솥단지째 놓고 먹던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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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15 18:16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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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청 제공
언젠가 여름, 여느 해보다 더위가 더 기승을 부려서 청년들이 날마다 여울타기에 열을 올렸습니다. 장마가 끝나고 강물이 불어나면 혈기 넘치는 젊은 아이들은 큰 바위들 틈으로 넘실대는 여울에서 맨몸으로 미끄럼을 타고 고기를 잡으며 놉니다. 또래 남자아이들 중 대장 격인 덕수가 아침 일찍 아이들과 함께 입술이 시퍼레가지고 오늘은 어죽을 끓일 테니 큰 솥과 족대와 지렛대를 빌려달라고 합니다.

“일찍도 왔다. 너들 그렇게 일찍 안 오면 여울물이 어디로 없어지기라도 하나. 덕수 너 맨손으로 와서 무슨 어죽을 끓이겠다고 너스레를 떠나. 작은 솥도 아니고 큰 솥을 빌려달라고 하나. 그리구 너 뇌운리 30리 계곡 물이 얼마나 좋은데 하필이면 좁은 어두니골 와서 꼭 개개냐.” 어머니가 타박하니 덕수는 자기 집 근처에는 밤나무숲이 좋은 데가 없다고, 집에 큰 솥단지가 없고, 어죽을 맛있게 끓일 사람이 없어서라고 핑계를 댑니다.

아이들이 몰려 놀자 일이 많은 우리 오빠들까지 덩달아 고기 잡는 데 가버렸습니다. 걱정도 하지 마시고 점심때가 되면 밤나무 밑으로 어죽 드시러 가족이 다 오랍니다.

청년들은 몰려다니며 열심히 고기를 잡습니다. 어죽은 어떻게 끓이려고, 무슨 꿍꿍이속인지 모르겠습니다. 참을 먹을 때쯤 되자 사방서 어른들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모여듭니다. 장마 통에 길이 파이고 돌이 삐뚤어지고 해서 더 험해진 길을 먹을 것을 들고 오느라고 애씁니다. “철없는 것들 길이나 좀 고친 다음에 어른들을 오시라 하든가. 무엇이 그리도 급해서 하는 짓들이라고는, 원.”

어제 저녁 청년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내일 어두니골서 어죽을 끓일 테니 누구네는 고추장을 가져오고 누구네는 달걀을 가져오고 쌀도 가져오고 밀가루·파·마늘을 가져오고 반찬도 가져오라고 다 분담을 시켜놓았답니다. 닭 몇 마리 길러 겨우 달걀 몇 개 낳으면 팔아 용돈이라고 써보는 혼자 사는 할아버지한테 달걀 가져오라 해서 할아버지는 달걀을 한 꾸러미나 가져오셨습니다. 굳이 힘없는 할머니보고 감자 가져오라 해서 할머니는 무거운 감자를 들고 오시느라 고생을 무지 하셨습니다. 노각도 무쳐 오고, 비름나물도 무쳐 오고, 배추 생절이를 해온 사람, 풋고추를 따온 사람도 있습니다.

족대를 돌 밑에 대고 지렛대로 돌을 들썩이면 고기들이 족대로 들어갑니다. 큰 바윗돌 밑에 지렛대를 대고 여럿이 큰 바위를 ‘영차영차∼’ 골짜기가 떠나가라 소리치며 흔들자 허연 수염이 긴 큰 메기가 족대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와와~’ 운동회날 계주 뛸 때처럼 환호 소리가 들립니다. 족대가 없는 아이들은 돌 밑에 손을 집어넣어 고기를 움켜잡겠다고 합니다. 미끌미끌한 것이 큰 고기가 있는 것 같다고 하더니 금저리(거머리)가 손에 달라붙어 엉엉 울면서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아 담뱃불로 지지니 떨어집니다. 고기가 숨어 있을 만한 바위를 골라 큰 돌을 들어올려 위에서 내려쳐서 고기가 나오면 잡기도 합니다. 무조건 ‘땅이오’ 하고 위에서 내려치면 비영비영하며 허연 배를 위로 하고 둥둥 뜨는 고기를 움켜잡기도 합니다.

아침 일찍부터 골짜기가 떠나가라 수선을 떨더니 여러 가지 고기를 제법 많이 잡았습니다. 여럿이 모여 앉아 창자를 따내고 큰 솥으로 하나 푹 삶습니다. 고기가 푹 삶아졌을 때 덕수는 우리 어머니에게 어죽을 끓여내라고 떼를 씁니다.

어머니는 철사로 얽은 망도 가져가고 성근 얼레미(구멍 넓은 체, 어레미)도 가져가서 익은 고기를 옆에 대야를 놓고 바가지로 퍼서 망에 주걱으로 저어 일차로 거른 다음, 얼레미를 솥에 대고 다시 고기를 곱게 거른 뒤 물을 맞추고 고추장을 풀고 쌀을 넣고 감자을 넣고 끓입니다. 모두 얼큰하게 끓이라고 해서 매운 고춧가루도 듬뿍 넣습니다. 달걀 5개는 수제비 반죽에 넣습니다. 밀가루에 달걀을 깨넣고 주걱으로 휘휘 섞은 다음 물을 적당히 붓고 다시 손으로 휘휘 젓습니다. 마른 밀가루를 섞어가며 손끝으로 비벼서 얇게 집게손가락 한 마디만 한 수제비를 만들어 놓았다가 쌀이 거의 익었을 때 끓는 죽 위에 솔솔 뿌리며 살살 젓습니다. 한소끔 끓으면 나머지 달걀 5개를 풀어 썰어놓은 파에 부어 무쳐 넣고, 그냥 썰어놓은 파도 듬뿍 넣습니다. 찧은 마늘을 넣고 한번 수르르 끓으면 완성입니다. 큰 솥단지째로 놓고 뜨거운 어죽을 한 그릇씩 퍼서 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 시원하다, 시원하다’ 하며 먹습니다.


덕수는 너무 설렁거리고 때로는 말썽도 피우지만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어른들은 이다음에 덕수를 국회로 보내자고 농담을 합니다.

전순예 1945년생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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