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지난 7월29일 한화-넥센 10차전 경기가 열린 서울 목동 야구장에서 15점 차로 뒤지는 와중에도 묵묵히 경기를 지켜보던 한 관중이 일어섰다. 그의 옷에는 한화 팬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말이 쓰여 있었다. “이기겄쥬.”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밀당에 능한 여자친구 같은 당신 한화 골수팬으로 영화 <광해>의 제작자인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는 7월24일 트위터에 썼다. “내가 세 딸들에게 물려준 가장 훌륭한 것은 딸들을 한화 팬으로 만든 것이다. 딸들에게 따로 ‘인내’ ‘체념’ ‘분노 조절’, 무엇보다도 ‘대가 없는 사랑’ 이런 건 따로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이날은 한화가 NC 다이노스에 14점 차로 진 날이었다. 원동연 대표는 “경기를 볼 때면 이기고 있어도 불안하다”고 했다. “꽤 많은 점수 차로 이기더라도 7·8·9회에 역전당할 때가 너무 많다. 유망주 이태양 선수도 한 회에 확 무너져버리고. 경기마다 조마조마해 죽겠다”고 말했다. 7월 한 달간 한화가 두 자리 점수 차로 진 것만 5번이다. 이기는 경기도 편치는 않다. 7월31일 한화는 2연패 뒤 넥센을 9-8로 이겼다. 하지만 경기 내용을 보면 땀난다. 7회까지 6-5로 이기던 한화는 8회에 석 점을 얻어 9-5로 승리를 굳히나 했지만 9회말 넥센에 석 점을 줘 한 점 차까지 따라잡혔다. 이런 경기 양상 때문에 한화 팬들은 입버릇처럼 “어제도 암 걸릴 뻔했다” “암보험 추천해주세요”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왜 보는 걸까. 팬들은 한화 야구를 ‘마약 야구’라고 부르며 중독성을 인정한다. 정민수(33·회사원)씨는 시즌당 40~50차례 ‘직관’(야구장 직접 관람) 한다. 목동·잠실·인천 문학 경기에 주로 가고 주말 대전 경기도에 간다. 정씨는 “7월 초에 5연패를 했어요. 이틀 연속 넥센에 17-3, 13-1 두 자리 점수 차로 졌죠. 지난해 13연패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 떠올랐어요. 그러다가 4연승을 했어요. 너무 기뻐서 날아갈 것 같았어요. 그러고는 또 크게 지죠. 밀당에 능한 여자친구 같아요. 어쨌든 자꾸 져도 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희망고문에 중독됐어요”라고 말했다. 정씨는 한화 이글스 팬들의 모임 ‘야카마시’ 회원이다. ‘야구장에서 마시는 카스는 맛있다’는 뜻이다. 야카마시에는 정씨 말고도 55명의 회원이 있다. 매 경기 네이버 밴드에 단체관람 일정을 올리고 시간 되는 사람들이 함께 경기장에 간다. 7월29일엔 충남 천안에 사는 최성은씨의 생일 파티를 겸해 김혜진 경기도 화성시의원, 햄버거 가게 사장인 이영철씨 등 12명이 목동 야구장에서 함께 응원했다. 최씨는 하루 휴가를 내고 천안에서 올라왔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말했다.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 선수들이 열심히 뛰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경기장에 오면 선수들의 땀내가 느껴져서 좋다.” 안정감 없어도 짜릿함을 주는 한화 경기 ‘꼴찌 한화’를 응원하는 한화 팬들은 8회가 되면 일제히 생목으로 ‘최강 한화’를 외친다. 앰프·음향기기 다 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앞뒤로 몸에 크게 반동을 주며 ‘최’ ‘강’ ‘한’ ‘화’를 한자 한자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치는 모습은 장관이다. 이영철(30)씨는 “선수들에게 기운을 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IMAGE3%%]한화 이글스는 신규 팬이 늘어나는 추세다. 7월29일까지 치러진 대전 홈게임 43경기의 야구 경기장 관중 수를 비교하면 2013년 28만6790명에서 올해 32만5835명으로 14% 늘었다. 기현상이다. 노태균(28·회사원)씨는 지난해부터 한화 팬이 됐다. 충북 청주가 고향이지만 그는 야구를 잘 보지 않았다. 노씨가 어느 날 한화 광팬인 친구에게 물었다. ‘꼴찌만 하는 한화를 도대체 왜 응원하냐.’ 친구가 답했다. “우리는 1승을 응원하는 게 아냐. 1점을 응원하는 거야.” 그 말이 인상적이어서 한화 경기를 지켜보던 노씨 역시 광팬이 됐다. “지다가 어느 순간 다이너마이트 타선이 터지는 ‘루저 간지’가 있어요. 한화 야구는 워낙 기대치가 낮다보니 조금만 잘하면 기분이 엄청 좋아져요.” 노씨는 한화와 한화 팬들로부터 희망을 읽는다. “지금은 취업을 했지만, 취업이 안 돼서 고생할 때, 또 요즘 회사에서 힘들 때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다’ ‘어떻게 지고 어떻게 쓰러져도 언제 어디서나 나를 응원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프로야구 가이드 <프로야구 스카우팅 리포트>를 매년 펴내고 있는 야구 콘텐츠 코디네이터 유효상씨는 “한화의 매력은 박찬호 선수의 매력과 같다. 경기에 안정감은 없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짜릿함, 아슬아슬함이 매력이다”라고 말했다. 유씨는 구단의 노력도 인정했다. 3차 리모델링을 한 대전 한밭구장은 관객이 음료나 먹거리를 사러 갈 때도 경기가 보이는 유일한 구장이 됐다. 유씨는 “지방 구장의 모범답안”이라고 평했다. 새로 만든 다이렉트 존은 포수로부터 백네트까지의 거리가 16m로 국내 야구장 가운데 가장 짧다. 가격도 평일 4만원, 주말 5만원으로 다른 구장의 절반 수준이고 스테이크까지 무료로 구워준다. 한화 팬들이 실책의 무한 반복, 극한의 점수 차 패배를 이겨내는 방법은 뭘까. 김세은(13)양은 “이긴 경기를 무한 반복해서 본다”고 말했다. 김양이 요즘 즐겨 보는 경기는 지난해 13연패 뒤 첫 승을 올린 NC전이다. 김양은 “이겼던 기억을 되새기면서 다시 한번 힘을 낸다”고 말했다. 한화의 유명한 외국인 팬 루크씨는 이기는 경기만 기억한다. 그는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김일규(33·회사원)씨는 “일단 ‘질 거야’라고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그러다 이기면 좋아요. 그리고 몇 년 뒤를 기약해요”라고 말했다. “LG가 그랬던 것처럼, 롯데가 그랬던 것처럼, 한화도 몇 년 뒤에는 다시 정상 궤도로 올라서는 날이 있을 겁니다.” 충청도의 힘도 있다. 이택윤(29·회사원)씨는 “경기는 반쯤 포기하고 봐요. 마음속으로는 엄청 불안하지만, 불안하다고 말 안 하고 점잖게 응원하는 거죠. 그게 충청도예요”라고 말했다. 한화 팬은 이미 무라카미 하루키 꼴찌 경험이 있는 KIA 타이거즈의 팬인 시인 서효인씨는 말했다. “썩 훌륭한 경기를 보지 못하고 있는 기아의 팬으로서, 저보다 더 지는 경기를 보는 횟수가 많은 한화 팬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부처의 인내심이 필요할 정도로 몰입해서 경기를 보지 마시라는 겁니다. 집에서 보신다면, 경기를 틀어놓고 책을 펴는 방법을 추천합니다. 경기장이라면 만년 꼴찌 야구팀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팬이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경기장에서 구름 한번 쳐다보며 경기를 흘려보내는 것도 방법입니다.” ‘충청도 정서’로 무장한 한화 이글스 팬들은 이미 무라카미 하루키다. 7월29일 15점 차로 경기가 끝나자 팬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선글라스를 끼고 묵묵히 경기를 지켜보던 한 관중도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가 입은 한화 이글스 유니폼 뒤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기겄쥬.”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