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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오감을 사로잡는 쇼의 극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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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0-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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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인 감각으로 뮤지컬의 영광을 재현한 <물랑루즈>… 노래와 춤만으로도 관객을 떨게 한다

색색으로 드리워지는 조명. 번쩍이는 무대복을 입은 무희들의 관능적인 군무. 남녀주인공이 마주 보며 부르는 절정의 사랑노래. 뮤지컬은 컴퓨터 마우스가 스크린을 모자이크하기 전 시대에 인간의 손으로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꿈나라이며 가장 화려한 스펙터클이었다. 내부에 수영장이 만들어질 정도로 거대한 세트와 수많은 무용수들로 화면을 가득 채우며 30∼40년대 할리우드에서 꽃을 피웠던 뮤지컬영화는 제작비가 엄청난 스튜디오 시스템이 몰락하면서 60년대 이후 주류 장르에서 사라졌다.

스펙타큘라… 스펙타큘라…

컴퓨터그래픽 특수효과와 돌비시스템으로 눈과 귀의 즐거움을 대체한 MTV세대들에게 뮤지컬은 다소 낯설다. 90년대에도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어둠 속의 댄서> 등 뮤지컬이 등장하긴 했지만 전성기 시절, 노래와 춤만으로 관객의 몸을 떨게 하던 쾌락의 극치와는 거리가 먼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최근 개봉한 <물랑루즈>는 뮤지컬이라는 양식이 21세기에도 여전히, 특히 MTV세대를 몰아지경으로 빠뜨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전작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하와이언 셔츠를 입고 자동차 질주를 하는 로미오에게 셰익스피어의 시를 태연히 낭독하게 했던 바즈 루어만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지극히 현대적인 감각으로 뮤지컬의 영광을 재현한다.

스크린 중앙에서 지휘자가 연주를 시작하면서 붉은 커튼이 올라가면 빛바랜- 30∼40년대 할리우드를 연상케 하는- 제작사의 로고가 등장한다. 지휘가 이어지면서 카메라는 비로소 영화의 시작인 주인공의 다락방으로 빨려들어간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감독은 ‘쇼’의 세계로 들어왔음을 관객에게 확인시키는 것이다.

파리의 물랭루주. 세기말의 향락과 퇴폐가 삼단 레이스 아래서 내뻗는 무희들의 흰 허벅지와 깊이 팬 가슴골 아래 맺힌 땀방울로 배어나오는 이 유명한 클럽은 그 자체로 한편의 뮤지컬을 완성시키는 무대다. 바즈 루어만은 물랭루주에서 뮤지컬 초창기의 양식이었던 백스테이지 뮤지컬(무대 공연자인 등장인물이 뮤지컬을 올리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긴장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양식)의 골격을 복원한다. <물랑루즈>의 뮤즈, 샤틴(니콜 키드먼)은 쇠락하는 극장을 복원하기 위해 돈많은 스폰서를 유혹하지만 이 사이에 가난한 보헤미안 크리스티앙(이완 맥그리거)이 끼어들면서 애정의 삼각구도가 만들어진다. 세 사람 사이에 깔리는 긴장은 물랭루주가 제작하는 뮤지컬 <스펙타큘라, 스펙타큘라>가 준비되는 과정과 함께 고조된다. 각혈을 하는 샤틴의 건강은 <스펙타큘라, 스펙타큘라>의 무대가 세워지고, 두 남자간의 갈등이 증폭됨에 따라 악화일로로 치닫고 무대 밖 현실과 무대 위 판타지가 만나는 절정에서 모든 갈등은 해소(파국)에 이른다.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뮤지컬 제작의 위기가 돌발할 때마다 연출가가 외치는 이 구호는 <물랑루즈>의 도착점이자 할리우드 고전 뮤지컬의 이상이다. 상투적인 연애담은 영화의 기초 골조일 뿐 영화에 살을 붙이고 빛을 씌우는 건 100명이 넘는 무희와 400여벌의 화려한 의상, 금박장식으로 뒤덮인 세트, 그리고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노래들이다.

잊혀지지 않을 뮤즈, 니콜 키드만

<물랑루즈>를 단순한 고전 뮤지컬의 복원이 아닌 21세기형 뮤지컬로 자리매김시키는 것은 바로 이 음악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도 그랬듯, 루어만은 비동시적인 것들을 동시에 뒤섞어놓는다. 19세기의 의상과 배경이 MTV 세대의 음악들과 만나는 것이다. 샤틴과 크리스티앙의 달콤한 대화 속에서 계속 변용되는 엘튼 존의 <Your Song>을 비롯해 비틀스, U2, 마돈나, 너바나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대중음악들이 화려한 스펙터클의 캉캉 춤과 어울려 스크린을 뒤흔든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에서의 마릴린 먼로를 연상케 하는 샤틴은 먼로가 불렀던 <Diamonds are Girl’s Best Friend>, 마돈나의 <Material girl>로 남성들을 눈멀게 하고, 사랑을 찬양하는 크리스티앙의 대사마저 비틀스의 <All You Need Is Love> 등 ‘사랑’이 들어간 노래 제목들의 나열로 진행돼 객석의 웃음을 자아낸다. 이런 음악 진행이야말로 21세기의 관객을 사로잡는 <물랑루즈>의 전략이다. 루어만의 말마따나 “관객은 “난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다 아는걸”이라고 말하겠지만 그 뻔한 플롯이 <Like A Virgin>을 통해 전달되면 “젠장, 정말 멋진 아이디어인걸”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음악뿐 아니라 다른 모든 요소들에서 루어만은 현실과 비현실, 과거와 현재를 중탕시킨다. 그래픽으로 처리된 19세기 파리의 정경은 영화 고담시처럼 어둡고 인공적이며, 카메라의 움직임은 숨막힐 만큼 빠르다. 이 모든 요소들은 뮤지컬의 재현이나 복원이 아닌 새로운 꿈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뮤지컬에 매료됐다”가 말하고 싶은 건 주연배우들이 실제 노래하는 연기 때문이다.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는 춤과 노래, 연기실력 등에 있어 배우의 카리스마가 강조되고 그만큼 스타의 존재가 위력적이었던 뮤지컬 전성기의 배우들 못지않게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특히 마를렌 디트리히와 그레타 가르보, 마릴린 먼로를 섞어놓은 것 같은 강렬한 성적 이미지에 얼음 같은 자신의 이미지까지 완벽하게 녹여낸 니콜 키드먼은 물랑루즈의 남성들뿐 아니라 객석의 남성들에게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뮤즈’로 남을 것 같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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