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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뮤지컬, 전성기는 갔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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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0-3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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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뮤지컬이라고 하면 <웨스트사이드 스토리>(1961)나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을 생각하기 쉽지만 뮤지컬영화의 전성기는 30∼40년대다. 뮤지컬영화의 기원은 최초의 유성영화였던 <재즈 싱어>(1927)로 기록된다. 그러나 노래와 춤이 극적으로 구성돼 뮤지컬에 원형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 작품은 “100% 유성, 100% 노래, 100% 춤”이라는 선전 문구를 단 29년작 <브로드웨이 멜로디>였다. 쇼비즈니스계의 이면을 유쾌하게 그린 이 작품의 성공으로 할리우드에서는 뮤지컬영화 제작 붐이 일어났다. 당시의 작품들은 모두 스타가 되는 무명배우의 여정을 유쾌하게 그렸는데 현란하면서도 현실도피적인 내용은 당시 미국사회를 침체에 빠뜨린 경제공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 작품의 음악을 만든 아서 프리드는 이른바 프리드 사단을 구축하면서 50년대까지 <사랑은 비를 타고>(1953), <밴드웨건>(1954) 등의 걸작 뮤지컬을 작곡, 프로듀싱했다. 할리우드에서 탄생하고 성장한 뮤지컬영화는 다른 어떤 영화 형식보다 집단적 제작시스템에 의존했다. 감독에서 배우, 작곡자, 작사가, 무대 디자이너, 안무가 등의 다양한 재능이 작품 안에서 자연스럽게 융합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프리드 사단이 소속됐던 제작사 MGM은 <오즈의 마법사>(1939)를 필두로 뮤지컬의 황금기를 일궈낸 곳이다. <세인트 루이스에서 만나요>(1944), <밴드웨건> 등을 감독한 빈센트 미넬리를 비롯해 MGM 전성기의 유능한 인력들은 뮤지컬의 수준을 단순한 오락물에서 예술의 차원으로 승격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배우의 재능이 많이 요구되는 뮤지컬영화만큼 스타시스템이 위력을 발하는 영화 장르는 없다. 프랭크 아스테어는 뮤지컬영화가 그리는 세상을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완벽하게 표현했다고 극찬을 받는다. 영화학자 토머스 샤츠는 “이 장르가 1930년대와 40년대 고전의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전적인 이유는 아스테어의 등장”이라고 했다. 아스테어와 커플을 이뤄 자주 등장했던 진저 로저스나 <사랑은 비를 타고>의 진 켈리 등도 아스테어를 잇는 뮤지컬 스타로 인기를 모았다.

50년대 중반 들면서 뮤지컬의 황금시대는 빠른 속도로 막을 내렸다. 당시 사회문제가 부각되면서 사람들이 판타지적인 ‘쇼’에 흥미를 잃었으며 스케일 경쟁으로 막대하게 늘어난 제작비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뮤지컬의 마지막 불을 댕긴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이 등장했지만 과거의 위상을 회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할리우드 영화제작에서 뮤지컬 제작 기록은 전무하다시피했다. 기억할 만한 작품은 마틴 스코시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감독한 뮤지컬영화 <뉴욕, 뉴욕>(1977)이다. 뮤지컬 전성기인 40년대에 대한 향수로 가득한 이 작품은 대중문화의 화려함과 그뒤에 가려진 어두움을 탁월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뮤지컬사의 맨 마지막에 그 자리를 잡았다. 흥행에서는 처참한 실패를 맛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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