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는 자못 진지하고 심각하게, 때로는 통렬하게 ‘비행기나 선박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서는 국경을 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닫힌 상상력’을 벼랑 끝에 세운다. 그는 국경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국경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국경의 보호를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단지 나인 채로 어떤 굳건한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 어떤 전향도 필요 없이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자기확인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내게는 국경이 필요했다. 국경에 가서 아무런 사상의 전환 없이도, 혹은 어떤 권리도 포기하지 않은 채, 내 다리로 월경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비겁자가 아닌 몸으로도 얼마든지 국경을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여행할 권리>는 러시아 우수리스크, 일본 나고야, 독일의 밤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클리, 중국 지린성 룽징, 허베이성 후자좡 마을, 일본 도쿄 등에 체류하며 만났던 김연수의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고민 많고 진지하며 어딘가 어리숙해 더욱 사랑스러운 친구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이 담담한 여행기는 여행이란 결국 타인의 장소를 통해 타인의 삶을 만나는 일임을 깨닫게 한다. 온갖 변수와 우여곡절, 정유정 <히말라야 환상방황> 단편이 아닌 오직 장편만으로 소설가의 여정을 탄탄히 쌓아올린 작가 정유정은 욕망의 폭주기관차 같았다. 취미가 복싱이고, 매일 저녁 야산을 산책하며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그녀는 소설계의 여전사였고, 어떤 일에도 지치거나 실망하지 않을 것 같은 강인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소설 쓰는 일이 흥겹지 않다’고 느낀 것은 <28>을 쓴 직후였다고 한다. 간호사로 일할 때조차 한 번도 ‘소설 쓰지 않는 나’를 상상해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 견딜 수 없는 슬럼프가 찾아왔다. 강철 같은 체력과 지칠 줄 모르는 영혼의 엔진을 지녔던 그녀가 알고 보니 한 번도 한국을 떠난 적이 없는 자타 공인의 ‘토박이’였다는 점도 놀랍다.
가난한 토착민의 삶 속으로, 박노해 <다른 길>
길을 잃어버리자, 그 길이 나를 찾아왔다. 아주 오래전부터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길에서 만난 그 땅의 사람들이 나의 살아 있는 지도였고 나의 길라잡이였다. 눈부시게 진보하는 세계와 멀어져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는 험난한 곳에서 자급자족의 삶을 이어온 전통마을 토박이들. 자신이 무슨 위대한 일을 하는지 의식하지도 않고 인정받으려 하지도 않고, 인류를 먹여 살릴 한 뼘의 대지를 늘려가고자 오늘도 가파른 땅을 일구어가는 개척자들. (…)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고 마치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잊혀지고 무시되고 있지만, 이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이 세상 깊숙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박노해, <다른 길> 중에서 <여행할 권리>가 나와 비슷한 취향과 성향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작가의 여행기라 반갑고 친밀한 느낌을 준다면, <히말라야 환상방향>은 나와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작가의 도전적이고 격정적인 여행기라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한다. <다른 길>은 내가 도저히 모방할 수도 따라잡을 수도 없는 여행의 신기원을 보여준다. 박노해는 ‘색다른 풍경’을 찾기보다 ‘다른 길을 이미 매일 걷고 있는 사람’의 현장으로 성큼 들어간다.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라오스, 버마, 인도, 티베트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볼거리를 찾아나서는 여행이 아닌, 오직 힘겹게 땅을 일구고, 광활한 바다를 지키며, 하늘을 이불 삼아 살아가는 가난한 토착민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간 그의 사진과 에세이는 여행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 깊이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거의 모든 사진들이 흑백사진이라는 사실도, 그의 글쓰기가 어느덧 산문과 운문의 경계조차 뛰어넘는 제3의 무엇으로 변모해가고 있다는 사실도 경이롭다. 그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진전 ‘다른 길’을 통해 또 하나의 새로운 출발을 증언한 그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길고, 질기며, 지난한 투쟁을 시작한 듯하다. 평범한 곳을 특별하게 만드는 심리적 마술 나는 믿는다. 시간은 사람을 바꾸지 못하지만, 장소는 사람을 바꾼다는 것을. 여행에 진정으로 중독된 사람들은 특정 장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장소에 가면 그 장소에 맞게 자신도 모르게 놀라운 화학변화를 일으키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같은 장소에 있으면 아무리 시간이 오래 흘러도 늘 올빼미형 인간이던 내가, 여행만 가면 아침형 인간으로 변해버린다. 전혀 힘들지 않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여행지에서는 햇살이 창틈에 스며드는 순간, 눈이 반짝 떠진다. 이 놀라운 장소들을 뼛속 깊이 흡입하고 싶은 열망에 불타서 나도 모르게 바지런해지고, 경쾌해진다. 바지런과 경쾌라니. 평소의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다. 평소엔 좀처럼 잘 웃지도 않는 내가 여행만 떠나면 넘치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철딱서니 없는 피터팬이 되어버린다. 가장 좋은 점은 하루 24시간을 정말 알차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내 몸의 변화, 내 마음의 변화에 어느 때보다 예민해지기 때문에, 햇살의 표정, 바람의 몸짓에도 아주 미세하게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의 풍경 하나하나가 더없이 소중하고 애틋해진다.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춘희(심은하)가 네 손가락으로 카메라 프레임을 만들어 마음의 사진을 찍는 장면처럼, 그렇게 가상의 액자를 만든다는 것은 평범한 장소조차 특별한 장소로 만드는 심리적 마술이다. 여행기의 마법 또한 그렇게 손가락으로 카메라 프레임을 만드는 일을 닮았다. 작가들의 다정하고도 혹독한 여행기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 어떤 상투적인 장소들도 오직 나에게만 다른 빛깔로 보이는 마법의 사진처럼 특별해진다. 정여울 문학평론가·<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