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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오래된 가계부 생명의 이름을 달다

외할머니 오영순의 ‘50년 쓴 가계부’ 무덤덤하면서 진한 기록을
애도하고 기념하는, 허나영 작가 전시회 ‘텍스트의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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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6-06 12:56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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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영 작가는 105개 기념비를 나누었다. 지금 메시지는 미궁의 시간을 여행하고 있다. “미래에서 기다릴게.”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대사처럼 지금이 아니라도 메시지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의미가 될 수 있다. ‘텍스트의 기념비’를 보고 있는 관객과 번호를 매겨 세워진 텍스트. 현소영 제공
‘어디까지나 내 혼자만의 취미며 쓰지 않을 수 없는 성질이다.’

원래 텍스트의 의미는 그랬다. 혼자만의 것이지만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절박함은 가계부의 가장 귀퉁이에 남았다. 오영순 할머니의 오래된 가계부를 뒤적이면 이런 구절을 만난다. ‘조기 40원, 조개 20원, 사탕 30원, 목욕·고데 80원.’ 1965년 6월27일 적은 항목과 숫자는 생활의 기록이었지만, 그녀는 가계부 가장 아래에 이날의 마음을 더했다. ‘아침에 목욕하고 고데하고 오후 시내에 있는 여고의 학급 음악회 구경.’ 한자가 섞인 그녀의 단상은 수십 년 혼자만의 것으로 남았다.

‘오늘은 영정사진, 수의를 맞췄다’

외할머니의 가계부를 우연히 본 손녀는 가계부를 보여달라고 졸랐지만 할머니는 “왜 그러느냐”며 손사래를 쳤다. 몇 해가 지나고 할머니는 손녀에게 가계부를 건넸다. 거기엔 손녀가 몰랐던 할머니가 있었다. 마냥 인자한 할머니가 아니라 격한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 모성을 넘어선 여성이 있었다. 할머니의 기록을 읽는 손녀의 마음을 움직인 결정적 텍스트들이 있었다. 할머니가 가까이 느끼는 죽음에 관한 기록이었다. ‘오늘은 영정사진, 수의를 맞췄다.’ 이렇게 무덤덤한 기록은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래서 손녀 허나영씨는 외할머니 오영순씨가 1965년부터 써온 가계부 50여 권을 보고 또 보고, 텍스트를 추리고 또 추렸다. 그렇게 5월15~19일 서울 문래동 공장들 사이에 있는 전시장에서 열린 ‘텍스트의 기념비’는 탄생했다.

허나영 작가는 수신자 없는 텍스트에 생일을 부여했다. 1988년 6월10일 할머니가 가계부에 적었던 기록은 전시회에서 ‘1988년생 6월10일생’으로 표시됐다. 할머니 혼자만의 텍스트로 시작됐지만, 새로운 의미로 태어나길 희망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전시회 소개에 이렇게 전했다. “각각의 텍스트들에, 이름 붙여지지 않은 것들에,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습니다. ‘텍스트의 기념비’는 개인의 가장 사소한 역사이기에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하루들, 그 지나간 시절을 애도하고 기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생일이 붙은 텍스트가 봉투에 담겨 전시됐다. 여기엔 소소한 일상, 그날의 사건이 담겼다. ‘1981년 2월18일생- 살다보면 이렇게 좋은 일도: 416,000원인데 6,000원만 내었단다.’ 이렇게 아들이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입학한 날도 있었고, 엄마가 아픈 외손녀가 애처로운 어느 날도 있었다. ‘우리 집에서 밥을 먹는 것. 아픈 엄마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당시는 몹시도 가슴이 아팠던 이별의 흔적도 있다. ‘연이를 보낸다. 온 식구가 울음바다. 약 20, 신 100, 크림 100, 돈 280… 약을 사고 신도 사고 보낸다.’ 13살 ‘식모’ 연이를 보내며 썼던 글이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던 기다림도 있었다. ‘딸자식은 섭섭하기만! 종일 기다려도 오지 않음.’ 세월이 흘러 지인의 부음을 듣던 날은 이랬다. ‘1988년 6월10일생- 어안이 벙벙: 이제는 우리 차례가 왔다는 느낌.’ 이제는 잊혀진 사건도 여기선 오늘의 일이다. ‘1997년 8월6일생- 225명 사망, 29명 생존. 대한항공 여객기 괌 추락.’ 무엇보다 손녀의 마음을 움직인 텍스트는 이랬다. ‘2002년 4월18일생- 죽음도 출생의 기쁨과 같단다: 마음먹기에 따라.’


전시회 끝나면 텍스트 여행 시작되고

그렇게 <여원> 등 여성지 부록으로 받은 가계부에 써온 기록은 50년째 이어졌다. 그것은 “손가락 핏줄이 파열되고, 앞이 뿌옇게 보이는 시력”에도 멈추지 않았던 일기다. 오늘도 “90세를 앞둔 여인이 계속 쓰고 있는 무언가”는 전시회를 통해 세상에 나눠졌다. 허나영 작가에게 이번 전시회는 가족을 이해하는 길이기도 했다. 스무 살 무렵 부산의 가족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해온 그녀는 그렇게 가족을 이해할 방법을 찾았다.

문래동 공장의 소음이 뒤섞였던 전시장은 세 개의 방으로 구성됐다. 첫 번째 방에는 숫자가 매겨진 텍스트가 기념비처럼 줄을 맞춰 세워졌다. 두 번째 방에는 의자 구실을 하는 우유 상자 앞에 무덤처럼 가계부를 쌓아두었다. 마지막 방에는 혼자만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엔 작가가 태어났을 때 덮었던 이불 위에 최근의 가계부를 올려두었다. 출생과 소멸은 그렇게 겹쳐졌다. 관객은 앉아서 봉투를 열어야 복사된 원본을 볼 수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수신”을 위해서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거리”에 텍스트를 두었기 때문이다. 종이를 전달의 매체로 정한 이유는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깊이 있게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숱하게 명멸하는 디지털 타임라인과 대비의 의미를 지녔다. 전시를 보고 누군가는 “돌공장 쌩이 아저씨 조씨 아저씨 살아 계신가요? 절 알아보실 수 있을지”라고 오래된 기억을 되새기기도 하고, 다른 이는 “가는 길에 삼계탕 두 마리를 사가서 함께 저녁을 먹어야겠다… 가능한 자주, 함께, 앉아 밥을 먹고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야지. 그게 바로 우리가 할 일이지”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텍스트의 기념비’ 전시는 5월19일에 끝났지만, 전시는 19일에 완성되지 않았다. 관객이 ‘오늘의 단상’과 함께 기억에 남는 텍스트의 번호를 남기면, 작가는 관객이 선택한 텍스트와 함께 다른 관객이 남긴 메시지를 우편으로 보냈다. 작가는 이것을 “텍스트의 여행”이라고 말했다. 여행을 출발한 텍스트는 전시회 며칠 뒤에 수신자에게 닿았다. 텍스트를 받은 관객이 다시 기록을 남겼다. ‘2002년 4월18일생- 죽음도 출생의 기쁨과 같단다: 마음먹기에 따라.’ 이 텍스트를 받은 사람은 페이스북에 “타로점을 볼 때 데스카드를 보는 듯한 글귀입니다. 데스카드는 시작이기도 하거든요”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이렇게 수신자 없는 메시지는 전시를 통해 나눠지고 먼 여행을 한 다음에 예측할 수 없는 의미가 됐다.

다음엔 외할아버지 ‘100년의 사생활’ 전

허나영 작가는 영화 마케팅, 시민단체 활동, 큐레이팅 작업을 거쳤다. 그는 “결국엔 관객, 시민과 소통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그가 우편으로 텍스트를 보낸 것에는 공공미술의 의미도 담겼다. 전시가 끝나고 남은 작품은 작가에게 짐이 되기도 한다. 작가에게도 짐이 되는 전시물은 우편으로 전해졌다. 그렇게 전달된 텍스트는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 다른 의미를 갖게 될지 모른다. 허나영 작가는 다음엔 ‘100년의 사생활’ 전을 생각하고 있다. 1918년에 태어나 100년 가까이 살아온 외할아버지의 취미를 활용한 전시다. 식물 키우기를 취미로 해온 외할아버지는 자신이 가꾼 식물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또 다른 텍스트의 기념비는 세워지고 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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