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부탁해>등 수작들 줄줄이 개봉… 남성감독들에게서 볼 수 없는 특유의 시선으로 대약진
최근 개봉한 <고양이를 부탁해>는 올해 충무로의 최고 수확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여상을 갓 졸업한 스무살 여자아이들이 부대끼는 세상을 꼼꼼하게 관찰한 이 영화는 그 또래의 여성들을 ‘대상’이 아닌 ‘주체’로 스크린에 새겨넣은 드문, 사실상 첫 번째 영화다. 수확은 한 가지 더 있다. 이 영화는 가뭄에 나는 콩보다 드물던 충무로의 여성감독을 한명 더 탄생시켰다. 영상원 1기 출신의 정재은 감독은 이 작품으로 <세친구>(1996)의 임순례 감독, <미술관 옆 동물원>(1998)의 이정향 감독에 이어 충무로를 이끌어갈 탄탄한 재목으로 신고식을 했다.
‘놀라운 변화’ 아닌 ‘당연한 결과’
<고양이를 부탁해>는 작품 자체의 의미를 떠나 여성영화감독의 영화 계보에서 독특한 자리를 잡는다. 지금까지 세로로만 이어져왔던 가계도의 줄이 이 작품을 시작으로 많은 가로줄을 긋기 때문이다. 10월27일 개봉을 앞둔 임순례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비롯해 내년에는 여성감독의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될 예정이다. 이정향 감독의 차기작 <집으로…>가 현재 촬영중이고, 91년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야>를 마지막으로 10년 동안 충무로를 떠났던 이미례 감독이 <하얀 능선>이라는 작품으로 돌아온다. 신인감독의 등장은 더욱 두드러진다. <조용한 가족> <반칙왕>을 프로듀싱했던 이미연 감독이 데뷔작 <버스, 정류장>을 찍고 있으며 위안부할머니 3부작을 만들었던 변영주 감독이 극영화 데뷔작 <내 생애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가제)의 크랭크인을 앞두고 있다. 박찬옥 감독 역시 첫 장편 <질투는 나의 힘>의 촬영을 눈앞에 둔 상태. 뿐만 아니라 이수연 감독의 <4인용 식탁>, 배우 출신 방은진 감독의 <떨림>, 박경희 감독의 <미소>, 김은숙 감독의 <빙우>, 재키 곽 감독의 <최대공약수> 등이 제작 준비중이다. 90년 한국영화사에서 등장했던 여성감독의 전체 수보다 많은 여성감독이 내년 한해에 등장하는 것이다.
2002년은 여성감독의 시대라고 한다면 다소 호들갑스런 표현이겠지만 이 현상은 분명 놀라운 변화다. 전문직종 가운데 유난히 남성적이고 보수적인 영화 현장의 중심에서 여성들이 대거 입성하는 것은 서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여성감독의 대규모 등장은 전문직 분야의 여성 증가라는 사회적인 흐름과 나누어 생각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큰 요인은 충무로의 시스템 변화다. 수십년 동안 충무로에서 감독으로 입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도제방식이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현장경험만이 아닌 다양한 방식으로 재능이 발굴되면서 감독 입봉의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기 시작했다. 특히 단편, 독립영화 제작이 활발해지면서 충무로보다 상대적으로 진입이 쉬운 독립영화판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감독이 늘어났다. 정재은 감독이나 변영주, 박찬옥 감독 등은 모두 독립영화판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던 인물들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버스, 정류장>을 제작했고, <질투는 나의 힘>에 투자한 명필름의 심재명 이사는 여성감독의 약진을 “놀라운 변화가 아닌 당연한 결과”라고 말한다. “이미 단편영화쪽에서 재능을 검증받은 여성감독들이 많다. 게다가 이들은 여전히 남성위주의 영화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훨씬 더 구체적으로 치밀하게 준비해왔다. 제작사들이 이들을 여성이라고 꺼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도제시스템의 해체, 남성적 통솔력의 퇴조
도제시스템의 해체에는 영화학과와 영화아카데미, 영상원 등 전문인력양성기관의 증가가 큰 역할을 했다. 남성과 같은 환경에서 교육받은 여성이 늘어남에 따라 그만큼 장벽도 낮아진 것이다. 대학 영상관련학과에서 여성의 역할 변화도 뚜렷하다. 동국대 연극영상학부 유지나 교수는 “과거에는 영화쪽, 특히 연출부문을 지원하는 여학생이 매우 드물었지만 요즘에는 거의 남학생과 비슷한 비율”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팀작업을 할 때도 전에는 시나리오나 연출보조들이 여학생들의 몫이었다면 지금은 직접 연출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와 함께 제작과정의 합리화와 전문화로 인해 남성적인 카리스마나 통솔력이 별반 필요없게 됐다는 것도 여성들이 감독의 꿈을 실현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한다. (남자)배우들에게마저 콘티를 일일이 검열받으며 감독생활을 시작했던 이미례 감독은 새 작품을 시작하면서 많은 변화를 체감한다. 84년 <수렁에서 건진 내딸>로 데뷔해 여섯 작품이라는, 여성감독으로는 전무후무한 필모그래피(작품의 연대기)를 가지고 있는 이 감독은 “당시에는 일이 지금처럼 세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감독이 많은 부분을 짊어져야 했다. 당연히 목소리 높이고 저돌적으로 밀고 나가는 힘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분야별로 전문화됐고, 감독은 일종의 조정자이기 때문에 여성이라는 게 콤플렉스가 되지 않을 것 같다”고 변화를 짚는다.
스물여덟살 처녀로 입봉해 8년 동안 감독생활을 하면서도 “제대로 감독생활을 못해 봤고 그게 진절머리가 나서 영화판을 떠났었다”는 그의 고백에는 여성감독으로서 고단했던 당시 상황이 묻어난다. 여섯 번째 여성감독으로 기록되는 그의 사정이 이랬으니 이전의 여성감독들의 고충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 여성감독인 박남옥 감독은 그의 데뷔작이자 마지막 작품인 <미망인>(1954)을 만드는 내내 아이를 들쳐업고 메가폰을 들면서 스탭들의 밥까지 직접 지어 먹여야 했을 정도다.
여성영화인들의 약진을 보는 시선은 매우 긍정적이다. 이미례 감독은 “여성감독의 등장은 단순히 여성의 위상문제가 아니라 영화의 다양성에 기여한다”라고 말한다. <고양이를 부탁해>를 제작한 영화사 마술피리의 오기민 대표는 “여성감독이 아니었으면 <고양이를 부탁해>를 제대로 찍어내기 힘들었을 것”이라면서 “새로운 스타일을 발굴하는 데 남녀를 가리지는 않지만 충무로에서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여성의 시선이 남성들이 포착하지 못했던 것을 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제대로 된 여성영화를 만나는 축복
여성감독이 모두 여성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늘어나는 여성감독들로 인해 제대로 된 여성영화를, 여성을 제대로 그리는 영화를 만날 수 있게 된 건 관객에게도, 특히 관객의 절반 이상인 여성들에게 큰 축복이다. <내 생애…> <미소> <하얀 능선>은 각각 색깔은 다르지만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영화로 여성감독에게 특별한 기대를 걸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영화평론가 김소희씨는 “여성의 시선이 없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절반의 방법이 없다는 것”이라고 평한다. 그렇지만 김씨는 “여성감독들이 보여주는 새로움을 여성적인 것으로 범주화시키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실상 많은 여성감독들이 ‘여성’감독으로 불리는 것을 꺼려하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여성감독의 재능을 여성성으로 묶을 때 오히려 그들의 재능은 주변화되고 왜소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내년 봄부터 속속 등장할 여성감독들의 작품이 어떻게 평가받고 어떤 흥행결과를 낳을지는 아직 예측하기 힘들다. 이들 작품의 스펙트럼은 멜로에서 액션, 산악영화까지 다양하다. 물론 이들 영화 모두에서 어떠한 여성성을 기대하기는 힘들며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드물게 찾아온 여성감독들의 선물에 남성감독들이 찾아내지 못했던 ‘어떤 것’들이 촘촘히 박혀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정재은 감독.(씨네21 이혜정 기자)
2002년은 여성감독의 시대라고 한다면 다소 호들갑스런 표현이겠지만 이 현상은 분명 놀라운 변화다. 전문직종 가운데 유난히 남성적이고 보수적인 영화 현장의 중심에서 여성들이 대거 입성하는 것은 서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여성감독의 대규모 등장은 전문직 분야의 여성 증가라는 사회적인 흐름과 나누어 생각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큰 요인은 충무로의 시스템 변화다. 수십년 동안 충무로에서 감독으로 입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도제방식이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현장경험만이 아닌 다양한 방식으로 재능이 발굴되면서 감독 입봉의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기 시작했다. 특히 단편, 독립영화 제작이 활발해지면서 충무로보다 상대적으로 진입이 쉬운 독립영화판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감독이 늘어났다. 정재은 감독이나 변영주, 박찬옥 감독 등은 모두 독립영화판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던 인물들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버스, 정류장>을 제작했고, <질투는 나의 힘>에 투자한 명필름의 심재명 이사는 여성감독의 약진을 “놀라운 변화가 아닌 당연한 결과”라고 말한다. “이미 단편영화쪽에서 재능을 검증받은 여성감독들이 많다. 게다가 이들은 여전히 남성위주의 영화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훨씬 더 구체적으로 치밀하게 준비해왔다. 제작사들이 이들을 여성이라고 꺼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도제시스템의 해체, 남성적 통솔력의 퇴조

사진/ 내년에 개봉하는 <버스, 정류장>을 촬영중인 이미연감독(왼쪽).(씨네21 손홍주 기자)

사진/ 이정향 감독.
![]() ![]() |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