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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현실문화연구’의 도전적 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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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0-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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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외국만화 출간 ‘예술만화의 전도사’로 변신… 열악한 시장환경에도 열광적 소수로부터 확실한 지지

사진/ '현실문화연구' 사람들. '예술만화 전도사' 로 변신한 현실문화연구의 행보가 요즘 만화계의 화제다. 가운데가 김수기 대표.
90년대 내내 ‘현실문화연구’란 이름은 단순히 출판사의 상호를 넘어서는 ‘기호’였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문화로 취급되지도 않던 것들을 문화로 인식하고 동시에 탐구하기 시작한 90년대, 넘쳐나는 문화론의 중심에는 현실문화연구란 이름이 늘 자리잡고 있었다.

애초 현실문화연구는 지난 1992년 미술운동과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한무리의 미술이론가와 미술가들의 모임으로 출발했다. 윤석남, 김진송, 김수기, 엄혁, 박영숙, 조봉진씨가 의기투합한 이 동인 그룹은 그해 겨울 <압구정동-유토피아/디스토피아>란 이름의 전시회와 책을 동시에 선보이면서 문화판에 처음 등장했다. 압구정동을 단순한 거리가 아니라 문화적 아이콘으로 파악하고 분석하는 시도는 이들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거대하고 추상적인 담론과 고급문화 대신 이들은 대중문화와 일상생활의 다양한 현상으로 눈길을 돌렸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경향이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이런 변화는 전혀 새로운 흐름이었다.

“많이 팔리지도 않을 책을 그렇게…”


사진/ 현실문화연구가 지난 1년 동안 펴낸 만화책들.
동시에 현실문화연구는 문화 활동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출판업을 병행했다. 김진송씨의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를 비롯해 <신세대 네멋대로 해라> <결혼이라는 이데올로기>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등 현실문화연구가 펴낸 일련의 책들은 모두 90년대 문화계의 주요한 이슈와 담론들을 담아낸 것들이었다. 그래서 현실문화연구 책은 판매고에 상관없이 언론과 식자층, 문화에 관심많은 이들에게 주목의 대상이었다.

이제 90년대를 보내고 2000년대를 맞은 지금, 현실문화연구(이하 ‘현문’)는 동인 그룹이라기보다 문화전문 출판사로 그 성격이 분명해졌다. 그러면서 그동안의 행보와는 다른 새로운 시도를 벌이며 파격적으로 변신하고 있다. 요즘의 모습만으로 본다면 현문은 만화전문 출판사로만 생각될 정도로 유럽 등 외국의 ‘예술만화’를 활발하게 펴내고 있다. 그래서 요즘 만화판에서 현문은 ‘예술만화의 전도사’로 불리고 있다.

현문이 만화전문 출판사로 변신한 것은 지난해 10월 유고의 만화가 엔키 빌랄의 <니코폴>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면서다. 이후 지금까지 꼭 1년 동안 현문은 무려 아홉가지의 만화를 줄줄이 출간했다. 윌레의 <임몽디스>, 알베르토 브레시아와 엔리케 브레시아 부자가 그린 <체 게바라>, 라바테의 <이비쿠스>, 프라도의 <섬>, 그리고 최근 <야수의 잠>까지 모두 화보집을 연상케 할 만큼 고급 재질로 제작한 소장용 만화책들이다. 만화라면 으레 갱지에 인쇄된 조악한 출판물로 여기는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버리는 책들이다.

만화를 사서 보는 독서문화가 전혀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것도 규모도 영세한 현문이 이처럼 과감하게 외국 우수 만화를 소개하는 것에 대해 만화전문가들은 반가움 이전에 놀라움을 먼저 표시하고 있다. “책은 좋지만 많이 팔리지도 않을 책을 저렇게 계속 찍어내서 버틸 수 있겠느냐”고 오히려 걱정할 정도다.

실제 현문이 낸 만화들이 거둔 성적은 아직 부진하다. 초판 2천부 제작비만 2700여만원이 들어간 <니코폴>이 2천부 가까이 팔린 것이 최고 성적. 가장 적게 팔린 <임몽디스>는 500부에도 못 미치고 있다. 9종 가운데 손익분기점을 넘긴 책이 하나도 없다. 최고수준으로 인쇄하는 것을 고집하다보니 제작비가 많이 드는 것도 이유지만, 아직은 성인 만화팬층이 엷은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그나마 열광적인 소수의 지지자들에게는 확실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이 다소나마 위로를 해주는 실정이다.

언더만화 잡지 <코믹스>까지 펴내

사진/ 현실문화연구가 새로 펴내는 인디·언더만화 계간지 <코믹스> 창간호.
이런 상황인데도 현문은 최근 우리나라 언더그라운드·인디만화들을 다루는 계간지 <코믹스>까지 펴내기 시작했다. 언더만화 그룹 ‘코믹스’가 잡지 출간을 제의해오자 김수기 대표가 받아들인 것이다. “이 친구들은 지원해줘야 한다”는 것이 김 대표가 밝힌 출간 이유. 언더만화 잡지는 지금까지 나오는 잡지마다 족족 폐간되고 말았을 만큼 만화출판계에서 가장 ‘장사 안 되는’ 아이템. 그런데도 일을 벌이고 나선 것이다.현실문화연구가 이처럼 무모해보일 정도로 과감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김 대표는 현문이 만화쪽으로 눈을 돌린 것이 우연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현실문화연구의 가장 큰 관심분야는 늘 시각문화였고, 그 가운데서 만화를 주력 대상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만화로 방향을 잡았으니 제대로 내보겠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분명히 무모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만화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출판으로 실험해보고 싶다. 무엇보다도 만화가 한번 보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곁에 놓고 두고두고 보는 것이라면 마땅히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이런 결정에는 김 대표 개인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김씨는 지난 95년 유럽만화 전문가 성완경 인하대 미대 교수가 가지고 있는 유럽만화를 보고 난 뒤 이른바 ‘예술만화’에 빠져들게 됐다. 처음으로 유럽만화라는 것을 접했던 충격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기절하는 줄 알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양하고 실험적인 그림들, 상상력이 넘치는 이야기, 그리고 예술성까지. 그동안 봐왔던 만화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만화들이 먼 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김 대표는 오랫동안 만화 출판을 계획해왔고, 지난해 비로소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어느새 만화 출판 1년을 맞았지만 이 작은 출판사의 열정은 아직 식지 않고 있다. 아니, 더 뜨거워지고 있다. 현문이 요즘 준비중인 책은 ‘벼룩만화’ 시리즈. 우리에겐 아직 생소하지만 외국에서는 이미 선보인 방식이다. 손바닥에 들어가는 아주 작은 만화책으로, 수준높은 만화를 싸게 널리 보급하자는 것이다. 역시 상업적 가능성은 불투명하기 짝이 없지만 이달 말쯤 선보이기로 결정했다.

손바닥 만화책 ‘벼룩만화’도 준비중

얼핏 요즘 우리는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미국과 일본 이외 지역의 훌륭한 만화들을 만날 수 있는 시절을 맞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그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곳은 현문이 거의 유일하다. 현문과 함께 외국 걸작만화 출판을 시작했던 거대자본 교보문고는 단 세권만을 낸 뒤 만화 출판을 접었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과지성사 역시 예술만화를 다루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아스테릭스> 등 검증된 유명 만화를 들여오는 정도다. 그래서 현문의 이런 ‘무모함’은 더욱 돋보인다.

문제는 결국 투자만큼의 대가를 거둘 수 있느냐는 점이다. 열정만으론 극복하기 어려운 본질적인 어려움이다. 하지만 작품성과 선구안으로 대중성까지 건져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현실문화연구는 중단없는 전진을 계속하고 있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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