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마누라>흥행을 보는 두가지 시각
타의 모범 될 수 없는 ‘영악한 전술’… 이런 영화 계속 유행한다는 건 피곤한 일
나는 <조폭 마누라>에 유감이 없다. 예상보다 흥행이 훨씬 잘되고 있는 게 놀랍기는 하지만 그것에도 유감은 없다. 추석 연휴에 한국의 대중이 이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에 우르르 몰려간 집단심리의 알맹이가 궁금하기는 하지만 <봄날은 간다>가 아무리 좋은 영화라 해도 친척이나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보기에는 <조폭 마누라>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것 참, 큰일이다. 할말이 없는 상황에서 글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왕정의 코미디 영화에서 얻는 교훈
다만 이런 것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성기 시절 홍콩영화계에 약방에 감초처럼 끼어들었던 왕정의 난센스 코미디영화를 다시 보는 것 같은 감회 말이다. 왕정의 코미디영화는 무협영화가 유행을 타면 재빠르게 그 무협영화의 수사학을 교란하고 나아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서 그 장르의 유행을 종식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장르의 규칙을 어기면서 웃음을 주는 ‘히트 앤 런’ 전략은 영화산업의 전성기에는 써먹을 만한 전략이지만 그것도 기댈 장르가 없으면 다 소용없다. <조폭 마누라>가 혹시 깡패영화 장르의 수명을 서둘러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 거꾸로 이런 형태의 영화가 범람하면 그만큼 다른 영화에 대한 욕구도 커질 테니 그것도 기우다. 도대체 올해 한국영화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난데없이 남성적 힘에 기초한 우정공동체에 대한 향수를 부추긴 <친구>가 유사 이래 가장 흥행한 한국영화 기록을 세운 이후 선생 같은 깡패와 깡패 같은 선생의 해프닝을 담은 <신라의 달밤>이 나왔고 남자를 갖고 노는 대책없는 말괄량이지만 마음속에 순정을 감추고 있었노라고 고백하는 <엽기적인 그녀>가 나왔다. 장르의 자가발전 속도, 규칙을 세운 뒤 그걸 비틀고 다른 것으로 치환시켜버리는 그 속도는 놀랍다. <조폭 마누라>는 이 영화 저 영화에서 빌려와 짜맞춘 상투적인 표현으로 가득하지만 그것들이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따로 노는 것이 기묘한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처럼 양식화된 액션 연출과 무협영화 분위기를 내는 비장미도 있으며 죽어가는 언니를 위해 흐느끼는 말랑말랑한 감상주의, 깡패 아내와 동사무소 말단 직원으로 일하는 꽉 막힌 남편이 벌이는 결혼생활의 해프닝이 난장판처럼 펼쳐진다. <조폭 마누라>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거들먹거리는 깡패의 이미지를 여성에게 입혀놓고 그 이미지를 가정에 옮겨와 전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신은경이 연기하는 깡패 아내 은진이 남편을 범하는 장면묘사는 이 영화의 백미다. 전통적으로 상투적인 에로영화에서 여성이 지음직한 표정, “안돼요”라고 사정하다가 고통스러워하고 이윽고 쾌락에 몸을 떠는 식의 뻔한 성묘사를 남성의 표정에 옮겨왔을 때 그만 낄낄대며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전도된 성역할의 묘사가 잘난 체하는 깡패영화의 수사학을 보기좋게 비틀어놓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불경스러운 웃음은 언제 봐도 통쾌한 구석이 있는 것이다. 장르표현 규칙의 자리바꿈에 불과 변화무쌍하게 상투적인 표현법을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 우겨넣고 감상주의와 개그와 비장미를 교대로 오가는 <조폭 마누라>는 아직 각 장르의 기반이 확실하게 자리잡지 않은 한국영화의 표현영역을 갈지자의 변칙복서 걸음걸이로 신나게 횡단한다. 그러나 한발만 떨어져 나와 바라보면, 이 변칙적인 웃음과 조롱 뒤에 깔린 가공할 감수성의 분열이 대상을 정관하고 느끼는 전통적인 영화의 역할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조폭 마누라>는 기존의 위계화된 사회질서와 심지어 이 장르가 기대고 있는 남성적 힘의 환상에 대해서도 심심치 않게 깔보고 있지만 권력자의 자리바꿈만 있을 뿐 향상된 사회적 가치를 삶에서 이뤄내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수준과 상당부분 일치하는 표정도 지니고 있다. 그저 장르표현 규칙의 자리바꿈에 불과한 것이다. 이 영화가 마구 짓밟은 장르의 규칙과 사회적 역할 구분의 우스꽝스러움에 대해 꽤 진보적인 구석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그러니 웃기는 일이다. 치고 빠지는 전략은 일회용일 뿐이다. <조폭 마누라>는 영악한 전술을 취했지만 타의 모범이 될 만한 전략은 아닐 것이다. 이것으로 한국영화의 수준이 땅에 떨어졌다고 호들갑을 떨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런 유의 영화가 거스를 수 없는 유행이 되는 것도 좀 피곤한 일이다. 김영진/ 영화평론가

다만 이런 것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성기 시절 홍콩영화계에 약방에 감초처럼 끼어들었던 왕정의 난센스 코미디영화를 다시 보는 것 같은 감회 말이다. 왕정의 코미디영화는 무협영화가 유행을 타면 재빠르게 그 무협영화의 수사학을 교란하고 나아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서 그 장르의 유행을 종식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장르의 규칙을 어기면서 웃음을 주는 ‘히트 앤 런’ 전략은 영화산업의 전성기에는 써먹을 만한 전략이지만 그것도 기댈 장르가 없으면 다 소용없다. <조폭 마누라>가 혹시 깡패영화 장르의 수명을 서둘러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 거꾸로 이런 형태의 영화가 범람하면 그만큼 다른 영화에 대한 욕구도 커질 테니 그것도 기우다. 도대체 올해 한국영화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난데없이 남성적 힘에 기초한 우정공동체에 대한 향수를 부추긴 <친구>가 유사 이래 가장 흥행한 한국영화 기록을 세운 이후 선생 같은 깡패와 깡패 같은 선생의 해프닝을 담은 <신라의 달밤>이 나왔고 남자를 갖고 노는 대책없는 말괄량이지만 마음속에 순정을 감추고 있었노라고 고백하는 <엽기적인 그녀>가 나왔다. 장르의 자가발전 속도, 규칙을 세운 뒤 그걸 비틀고 다른 것으로 치환시켜버리는 그 속도는 놀랍다. <조폭 마누라>는 이 영화 저 영화에서 빌려와 짜맞춘 상투적인 표현으로 가득하지만 그것들이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따로 노는 것이 기묘한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처럼 양식화된 액션 연출과 무협영화 분위기를 내는 비장미도 있으며 죽어가는 언니를 위해 흐느끼는 말랑말랑한 감상주의, 깡패 아내와 동사무소 말단 직원으로 일하는 꽉 막힌 남편이 벌이는 결혼생활의 해프닝이 난장판처럼 펼쳐진다. <조폭 마누라>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거들먹거리는 깡패의 이미지를 여성에게 입혀놓고 그 이미지를 가정에 옮겨와 전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신은경이 연기하는 깡패 아내 은진이 남편을 범하는 장면묘사는 이 영화의 백미다. 전통적으로 상투적인 에로영화에서 여성이 지음직한 표정, “안돼요”라고 사정하다가 고통스러워하고 이윽고 쾌락에 몸을 떠는 식의 뻔한 성묘사를 남성의 표정에 옮겨왔을 때 그만 낄낄대며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전도된 성역할의 묘사가 잘난 체하는 깡패영화의 수사학을 보기좋게 비틀어놓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불경스러운 웃음은 언제 봐도 통쾌한 구석이 있는 것이다. 장르표현 규칙의 자리바꿈에 불과 변화무쌍하게 상투적인 표현법을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 우겨넣고 감상주의와 개그와 비장미를 교대로 오가는 <조폭 마누라>는 아직 각 장르의 기반이 확실하게 자리잡지 않은 한국영화의 표현영역을 갈지자의 변칙복서 걸음걸이로 신나게 횡단한다. 그러나 한발만 떨어져 나와 바라보면, 이 변칙적인 웃음과 조롱 뒤에 깔린 가공할 감수성의 분열이 대상을 정관하고 느끼는 전통적인 영화의 역할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조폭 마누라>는 기존의 위계화된 사회질서와 심지어 이 장르가 기대고 있는 남성적 힘의 환상에 대해서도 심심치 않게 깔보고 있지만 권력자의 자리바꿈만 있을 뿐 향상된 사회적 가치를 삶에서 이뤄내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수준과 상당부분 일치하는 표정도 지니고 있다. 그저 장르표현 규칙의 자리바꿈에 불과한 것이다. 이 영화가 마구 짓밟은 장르의 규칙과 사회적 역할 구분의 우스꽝스러움에 대해 꽤 진보적인 구석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그러니 웃기는 일이다. 치고 빠지는 전략은 일회용일 뿐이다. <조폭 마누라>는 영악한 전술을 취했지만 타의 모범이 될 만한 전략은 아닐 것이다. 이것으로 한국영화의 수준이 땅에 떨어졌다고 호들갑을 떨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런 유의 영화가 거스를 수 없는 유행이 되는 것도 좀 피곤한 일이다. 김영진/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