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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좌절과 분노, 펑크의 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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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0-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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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오자의 감수성을 지닌 20대들의 열광… 단순히 서구문화 추종으로만 볼 수 있을까

1976년 9월, 런던의 한 클럽에 닭벼슬 머리와 쇠사슬, 잭나이프 등으로 장식한 수백명의 젊은이들이 모였다. 무대에 등장한 밴드들은 단순하면서 강렬한 연주와 함께 “영국에는 미래가 없다”고 “백색 폭동을 일으키자”고 내지르기 시작했다. 밴드들은 관중을 향해 침을 뱉고 의자를 내던졌으며 관중은 무대를 향해, 서로를 향해 맥주병을 던지며 먼지를 일으켰다. 공연이 끝난 뒤 클럽은 폐허로 변했고, 언론은 ‘개망나니들의 난동’이라고 이 소란스런 공연을 비난했다. 갈 곳 없는 청춘들의 이 난장판 해프닝은 하위문화 가운데 가장 큰 폭발력을 보여준 펑크(Punk)의 기원을 알린 브리티시 펑크록 페스티벌이었다. 정확히 20년 뒤 서울 홍익대 앞 거리에서 이와 비슷한 ‘사고’가 벌어졌다. 한국의 갈 곳 없는 청춘들은 이제 더이상 착한 아이인 척하는 게 지겹다는 듯 무대에서 ‘날뛰었고’ 몸을 부딪치며 괴성을 질러댔다. 70년대 영국에서와 같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한국의 스트리트 펑크쇼는 인디음악 또는 인디문화의 태동을 알린 문화사적 사건이었다.

70년대 영국의 불황과 펑크

70년대 후반 영국과 서구사회 전체를 흔들었던 펑크 열기는 무서운 기세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쇠락했지만 이후 청년문화와 대중음악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80년대에 싹튼 신자유주의와 풍요의 강박 속에서 펑크는 지하실로 숨어버린 듯했지만 90년대 초반 일어난 얼터너티브 록의 기저에는 펑크가 깔려 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독한 부침을 겪은 한국의 인디음악계에서 상대적으로 꾸준하게 환호를 받고 있는 장르가 펑크라는 사실은 단순한 서구 유행의 뒷북이 아닌 한국적 현실에 뿌리를 둔 펑크문화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모든 문화현상이 그렇지만 하위문화 가운데 가장 반사회적이며, 반문화적인 펑크의 탄생과 열풍은 당시의 사회 현실과 분리해 설명하기 어렵다. 70년대 중반 이후 영국사회는 만성적인 경제불황에 허덕이고 있었다. 청년실업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100만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학교를 졸업한 직후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선 줄에 합류해야 했다. 노동할 수 없는 노동계급의 젊은이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싸구려 맥주를 사들고 클럽을 전전하는 것뿐이었다.

“우리 중 누구에게도 희망이 없었다. 그게 우리를 모으는 공통점이었다” 펑크문화의 아이콘이 된 섹스피스톨스의 보컬, 조니 로튼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가난한 아일랜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학교에서 쫓겨난 뒤 패거리들과 몰려다니며 “한심하기 그지없는 유행 옷가지”나 사고 다니던 그는 일종의 오디션을 통해 섹스피스톨스에 합류하게 됐다. 그가 낙점을 받은 이유에는 침을 튀기면서 제멋대로 불러대는 그의 노래뿐 아니라 ‘나는 핑크 플로이드를 증오한다’라고 쓰여 있는 그의 티셔츠와 녹색으로 물들인 머리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에게 ‘음악성’이란 중요한 게 아니었을 뿐 아니라 이전의 록밴드들이 쌓아놓은 음악적 성과마저 다만 역겨운 겉멋에 불과했다.

70년대 초반 록음악계를 지배했던 프로그레시브와 아트록을 무시하는 듯한 이들의 단순하고 거친 연주는 런던의 젊은이들을 단숨에 매료시켰고, “파시스트 체제가 여왕의 머리에 수소폭탄을 장착했다”고 버르장머리 없이 외치는 이들의 노래 은 급기야 순위 정상에 올랐다. 의회를 비롯해 영국사회 전체가 이들을 비난했지만 펑크는 급속도로 확산됐다. 특히 스리코드라는 단순한 연주방식을 통해 의도적인 아마추어리즘을 표방한 이들의 ‘DIY’(Do It Yourself)정신은 내지를 수 있는 분노만 있다면 누구나 펑크음악을 하도록 독려했다. 이들이 노래한 ‘무정부주의’(Aanarchy in U.K.)는 젊은이들의 신앙이 됐다.

그러나 이들의 빠른 몰락은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평론가에 따르면 펑크미학의 핵심은 “모든 사회적 사실의 부정”이다. 체제와 종교와 문화와 음악에 대한 이들의 부정은 결국 자신에 대한 부정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다만 분노했을 뿐 지향점이 없었고, ‘미래’라는 말조차 거부했다. 상품으로서의 음악을 거부했던 이들이 (의도와는 무관하게) 잘 팔리는 상품이 돼버린 현실은 피해갈 수 없는 딜레마였다. 음반사와 불화를 겪고, 멤버들간의 불화를 겪고, 미디어와 불화를 겪으며 이들은 단 한장의 정규음반만 내놓은 채 해산했다. 섹스피스톨스 외에도 클래시, 와이어 등 걸출한 뮤지션들이 펑크음악의 지평을 넓혔지만 일종의 ‘반란’으로 펑크문화의 폭발은 급속도로 잦아들기 시작했다.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의 80년대 사라지는 듯했던 펑크가 다시 날개를 편 건 90년대 초다. 찢어진 청바지에 너덜너덜한 셔츠를 입고 등장한 얼터너티브록 밴드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은 거칠고 단순한 기타와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지르며 펑크록을 90년대 버전으로 업그레이드시켰다. 국내에 펑크가 착륙하게 된 것도 너바나의 영향 때문이었다.

한국 펑크음악을 향한 비난과 지지

사진/ "우리를 그냥 '또라이' 로 봐달라" 한국 펑크씬의 스타가 된 밴드 노브레인.(이정용 기자)
한국 펑크문화의 발원지가 된 홍익대 앞 클럽 ‘드럭’은 94년 문을 열었을 때 “너바나 광신도들의 집합소”였다. 드럭에서 연주하는 밴드들은 너바나의 곡들을 주로 카피하면서 거슬러 펑크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크라잉 너트, 노 브레인 등 DIY를 시작한 밴드들은 한국에서 ‘다른’ 음악의 가능성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크라잉 너트의 <말달리자>는 인디음악 사상 전무후무한 판매기록을 세웠고, 주류음악 차트에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드럭에서 나와 문화사기단이라는 펑크공동체를 만든 노 브레인 역시 지난해와 올해 낸 두장의 앨범을 2만장 이상 팔아치우며 인디음악의 스타로 떠올랐다. 대부분의 인디음반들이 3천∼4천장에 못 미치는 판매를 기록하는 가운데 이들의 성과는 놀라운 것이다. 2001년 한국에서 펑크의 의미란 무엇일까? 70년대 당시 펑크문화가 쓰레기와 혁명이라는 극단의 논란 가운데 있었듯 한국의 펑크음악 역시 다양한 비난과 지지를 동시에 받고 있다. 단적인 예로 광고 CF에까지 등장한 크라잉 너트를 태생적으로 주류가 될 수 없는 펑크 뮤지션으로 볼 것인가, 주류 뮤지션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다. 지난 여름 일본 후지록페스티벌에서 히노마루(일장기)를 찢어 구설수에 오르내린 노 브레인이 “단지 놀이였을 뿐”이라고 대답하는 데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펑크를 하나의 정신이라고 말할 때 그 정신은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지향점이라기보다는 현재에 대한 분노와 좌절이다.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에 이미 잠재실업자군 대열에 끼는 많은 젊은이들이 펑크에 환호하는 현상을 단순히 서구문화의 추종만으로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한 음악평론가는 국내 펑크문화를 “대학생 또는 20대 낙오자들의 문화”라고 말한다. 실제 낙오자이건 잠재 낙오자이건 현실에 분노하고 좌절하는 낙오자의 감수성을 지닌 20대들이 존재하는 한 펑크는 언제 어디서나 현재형의 움직임인 것이다.

막 달리는 영화제

닭벼슬 머리, 가죽옷, 체인과 괴성만이 펑크는 아니다. 사운드이자 스타일이며 철학이기도 한 펑크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펑크문화축제가 열린다. ‘조선 펑크’의 발원지 홍익대 앞 문화축제인 ‘제1회 홍대 앞 축제-달려라 홍대 앞’의 한 프로그램으로, 10월18일부터 3일 동안 진행되는 ‘막 달리는 영화제’는 펑크문화의 역사를 돌아보는 자리다. 소개되는 6편의 영화는 70년대 클래식의 태동에서 90년대 중반 한국의 펑크문화까지 조명하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들이다.

우선 눈에 띄는 작품은 알렉스 콕스 감독의 극영화 <시드와 낸시>. 상영작 가운데 유일하게 비디오로 소개된 이 영화는 전설적인 펑크 밴드 섹스피스톨스의 베이시스트 시드 비셔스와 그의 연인 낸시를 그린 영화다. 게리 올드먼이 분한 시드 비셔스는 멤버 가운데서 눈에 띄는 스타성으로 조명받다가 마약중독으로 요절한 인물이다. 젊은 시절 펑크족이었으며 전작 <리포맨>에서 펑크스타일을 영화에 도입했던 알렉스 콕스 감독은 시드와 낸시의 파괴적인 사랑과 함께 70년대 영국 젊은이들의 암울한 정서를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디렉터스컷으로, 비디오에서 삭제됐던 장면을 감상할 수 있다. 지난해 만들어진 <타락과 분노>는 섹스피스톨스를 다룬 다큐멘터리. 활동 당시의 공연모습과 시드 비셔스의 당시 인터뷰, 생존 멤버들의 증언을 통해 섹스피스톨스의 실체를 접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섹스피스톨스와 펑크의 양대산맥이었던 클래시를 다루고 있는 극영화 <클래시:루드 보이>는 클래시의 로드 매니저가 되는 청년을 관찰자로 놓아 클래시의 활동을 소개한다. 클래시의 공연현장과 함께 인종차별, 신나치주의 시위 등 당시 70년대 영국에 드리웠던 어두운 그림자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록큰롤의 역사:9편 펑크>는 타임-라이프지에서 기획한 록음악뮤직 다큐멘터리의 펑크편. 런던에서 펑크가 폭발하게 된 사회적 배경과 함께 밴드들의 활동 기록, 런던 펑크의 모태가 된 뉴욕펑크의 대표주자와 클럽들까지 상세하고 꼼꼼하게 펑크의 역사를 발췌했다. <웨인즈 월드>를 만들었던 페넬로페 스피리스의 다큐멘터리 <서구역사의 몰락>은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의 LA펑크를 조명한 작품. 밴드들의 활동을 스케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삶 깊숙이 들어가 펑크 뮤지션들의 비참한 생활과 공연장에서 쫓겨나는 그들의 슬픔과 자조까지 섬세하게 담아냈다. <아워 네이션:한국의 펑크 커뮤니티>는 클럽 드럭을 배경으로 한국 펑크의 발생과 현재를 외국인의 눈으로 관찰한 다큐멘터리. 티모시 탠절리니와 스티븐 엡스타인, 두 미국인이 찍은 작품으로 크라잉 너트와 슈퍼마켓 등 드럭의 밴드와 펑크를 즐기는 젊은 수용자들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펑크문화가 가지는 의미를 분석한다.

펑크 축제답게 상영장은 홍익대 앞의 지하클럽 감자탕&바. 영화제 기간 동안 문화사기단 펑크 밴드들의 공연을 중심으로 3일 내내 ‘광란’의 펑크파티가 벌어진다(문의 02-324-2966∼7).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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