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마누라>흥행을 보는 두가지 시각
문제는 영화가 아닌 현실… 조폭영화라도 깊이 해석하고 뒤집어 들여다봐야
최근 호황기를 맞고 있는 한국영화계에는 조직폭력배를 주인공으로 한 이른바 ‘조폭영화’가 일종의 하위 장르를 이루면서 시장을 주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대개 그래왔듯이 이런 사안에 대해서는 다수 관객과 여론 주도층 사이에 뚜렷한 반응 차이가 있다. 한쪽은 <친구> <신라의 달밤> <조폭 마누라> <킬러들의 수다>에 나오는 폭력배들의 모습을 즐기면서 종종 흥행기록까지 갈아치우는 반면, 다른 한쪽은 수심에 가득 차서 씁쓸한 입맛을 다신다. 후자의 견해는 폭력영화가 미학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며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많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영화의 최종 생산주체는 관객
그런데 이런 논쟁에서는 영화를 최종적으로 생산하는 주체는 제작자가 아니라 관객이라는 사실이 간과된다. 대부분의 충무로 제작자들은 관객이 무엇을 좋아할까, 어떻게 하면 관객의 입맛에 맞출까 고민하면서 하루해를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폭력영화에 대한 논의가 수용자와 사회적 맥락에 대한 고려없이 생산자의 문제로만 한정된다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또한 이런 논쟁에는 영화가 사회 폭력을 강화하거나 악영향을 끼친다는 전제가 의심의 여지없이 깔려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런 가정은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폭력영화와 사회의 관계, 즉 이미지와 현실의 관계를 일면적으로 단순화한다면 사실상 아무런 문제 해결의 수단도 찾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최근 한국영화들에 나타나는 폭력 이미지와 속절없는 개그를 보면서 안절부절못하는 이유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 때문이다. 그 불안의 본질은 현실 속의 아이들이, 현실 속의 사회가 더욱더 폭력적으로 변해가는지도 모른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폭력 영화는 폭력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든다는 주장과 달리,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폭력영화를 통해 현실의 폭력에 대해 민감해지는 것 아닌가? 이 때문에 무감각화 현상에 대해서는, 대중의 감각이 폭력성에 익숙해진다는 주장과 카타르시스 효과의 현대적인 양상이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영화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가는 개인의 차이가 있다는 의견도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더욱더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다. 다수 관객을 향해 호소하는 영화 속 폭력은 근본적으로 매우 정치적인 문제이고 공동체 전체와 관련된다. 한창 성업중인 영화 <조폭 마누라>에서 조직폭력배 집단은 ‘상가번영회’라는 간판을 단 사업 조직으로 등장한다. 조직의 목적은 ‘프로페셔널리티’를 강조하는 사업 운영이며, 집단의 배타적인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의리를 내세우고, 그에 대한 저항은 무조건적인 폭력으로 다스린다. 이러한 조직 특성을 자본주의사회 전반의 원리, 특히 오늘날 그 부패양상이 노골적으로 폭로되고 있는 정경유착의 실상으로 확대해도 별 무리가 없다. 또한 전세계를 향해 “내 편이냐 적의 편이냐”고 물으면서 “앞으로 1∼2년 동안 내리 전쟁을 치를 수도 있으니 저쪽에 서려거든 죽음을 각오하라”는 미국 대통령의 메시지는 어떤가? 혹시 대중은 영화 속의 발작적인 폭력 이미지를 통해서 이처럼 미쳐돌아가고 있는 민주주의의 허울을 쓴 야만사회의 실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 질펀한 욕망의 잔치를 노골적으로 구경하는 것은 아닌가? 영화 내적인 차원으로 보자면, 조폭영화라는 단일 장르 안에서도 각각의 영화들은 다양한 주제(이렇게 심오한 용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양한 흥행 코드)를 드러낼 수 있다. <조폭 마누라>의 경우 액션을 수반하는 폭력 이미지보다 관객에게 더 호응을 얻는 것은, 여성성을 잊고 지내던 여자 조폭이 결혼을 앞두고 남녀 관계를 시작하는 법과 섹스하는 법을 하나하나 배우게 되는 과정을 코믹하게 묘사한 부분이다. 이는 주관객층인 십대 후반부터 이십대 초반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성에 대한 수줍음과 호기심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포인트다. 젊은 여성관객은 주인공이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결혼에 의해 순치되지 않고 끝내 ‘형님’의 자리를 지킨다는 사실에 흥분하는 것으로 보였다. 폭력 이미지보다 더 호응을 얻은 건… 대중이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전제로부터 논의를 시작할 수는 없는 것일까. 물론 감독과 제작자에게는 그들이 영화를 만드는 목적 혹은 삶의 근본적인 가치를 환기시키면서 책임있는 자질과 ‘예술성’을 추구하도록 촉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폭력영화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며, 검열에 의존하려 한다면 검열이란 언제나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어 보이는 효과만을 낳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서 새로운 ‘실천’ 특히 공공영역과 관련된 실천을 산출해야 하고 거기에는 새로운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조폭영화라도 깊이 해석하고 뒤집어 해석해야 할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그런데 이런 논쟁에서는 영화를 최종적으로 생산하는 주체는 제작자가 아니라 관객이라는 사실이 간과된다. 대부분의 충무로 제작자들은 관객이 무엇을 좋아할까, 어떻게 하면 관객의 입맛에 맞출까 고민하면서 하루해를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폭력영화에 대한 논의가 수용자와 사회적 맥락에 대한 고려없이 생산자의 문제로만 한정된다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또한 이런 논쟁에는 영화가 사회 폭력을 강화하거나 악영향을 끼친다는 전제가 의심의 여지없이 깔려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런 가정은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폭력영화와 사회의 관계, 즉 이미지와 현실의 관계를 일면적으로 단순화한다면 사실상 아무런 문제 해결의 수단도 찾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최근 한국영화들에 나타나는 폭력 이미지와 속절없는 개그를 보면서 안절부절못하는 이유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 때문이다. 그 불안의 본질은 현실 속의 아이들이, 현실 속의 사회가 더욱더 폭력적으로 변해가는지도 모른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폭력 영화는 폭력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든다는 주장과 달리,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폭력영화를 통해 현실의 폭력에 대해 민감해지는 것 아닌가? 이 때문에 무감각화 현상에 대해서는, 대중의 감각이 폭력성에 익숙해진다는 주장과 카타르시스 효과의 현대적인 양상이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영화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가는 개인의 차이가 있다는 의견도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더욱더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다. 다수 관객을 향해 호소하는 영화 속 폭력은 근본적으로 매우 정치적인 문제이고 공동체 전체와 관련된다. 한창 성업중인 영화 <조폭 마누라>에서 조직폭력배 집단은 ‘상가번영회’라는 간판을 단 사업 조직으로 등장한다. 조직의 목적은 ‘프로페셔널리티’를 강조하는 사업 운영이며, 집단의 배타적인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의리를 내세우고, 그에 대한 저항은 무조건적인 폭력으로 다스린다. 이러한 조직 특성을 자본주의사회 전반의 원리, 특히 오늘날 그 부패양상이 노골적으로 폭로되고 있는 정경유착의 실상으로 확대해도 별 무리가 없다. 또한 전세계를 향해 “내 편이냐 적의 편이냐”고 물으면서 “앞으로 1∼2년 동안 내리 전쟁을 치를 수도 있으니 저쪽에 서려거든 죽음을 각오하라”는 미국 대통령의 메시지는 어떤가? 혹시 대중은 영화 속의 발작적인 폭력 이미지를 통해서 이처럼 미쳐돌아가고 있는 민주주의의 허울을 쓴 야만사회의 실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 질펀한 욕망의 잔치를 노골적으로 구경하는 것은 아닌가? 영화 내적인 차원으로 보자면, 조폭영화라는 단일 장르 안에서도 각각의 영화들은 다양한 주제(이렇게 심오한 용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양한 흥행 코드)를 드러낼 수 있다. <조폭 마누라>의 경우 액션을 수반하는 폭력 이미지보다 관객에게 더 호응을 얻는 것은, 여성성을 잊고 지내던 여자 조폭이 결혼을 앞두고 남녀 관계를 시작하는 법과 섹스하는 법을 하나하나 배우게 되는 과정을 코믹하게 묘사한 부분이다. 이는 주관객층인 십대 후반부터 이십대 초반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성에 대한 수줍음과 호기심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포인트다. 젊은 여성관객은 주인공이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결혼에 의해 순치되지 않고 끝내 ‘형님’의 자리를 지킨다는 사실에 흥분하는 것으로 보였다. 폭력 이미지보다 더 호응을 얻은 건… 대중이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전제로부터 논의를 시작할 수는 없는 것일까. 물론 감독과 제작자에게는 그들이 영화를 만드는 목적 혹은 삶의 근본적인 가치를 환기시키면서 책임있는 자질과 ‘예술성’을 추구하도록 촉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폭력영화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며, 검열에 의존하려 한다면 검열이란 언제나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어 보이는 효과만을 낳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서 새로운 ‘실천’ 특히 공공영역과 관련된 실천을 산출해야 하고 거기에는 새로운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조폭영화라도 깊이 해석하고 뒤집어 해석해야 할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