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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경제학 ‘인식 지체’를 해소하려면

‘과거 경제학의 노예’들에게 보내는 현재 시장자본주의의 민주적 개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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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2-05 14:18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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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시차(Time Lag)를 중시한다. 잘못된 경제 상황을 알아챈 뒤 경제정책 처방을 수립하기까지 내부 시차가 있는가 하면, 정책 수립 뒤부터 효과를 보기까지 외부 시차도 있다. 왜 시차가 중요한가? 시차에 따라 정책 효과가 처음 의도와 다르게, 심지어 정반대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이 잘 다루지 않는 중대한 시차가 있는데 그것은 시대 변화에 대한 인식 시차이다. 일찍이 케인스는 “어떤 지적 영향력과도 무관하다고 믿고 있는 실무가들조차 대개는 과거 경제학의 노예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공공지출, OECD 중 멕시코 다음 꼴찌

민주화 이후 25년을 넘기고 박근혜 정부 시기로 들어선 한국 자본주의든, 시장만능 신자유주의 30년을 보내고 2008년 금융위기 뒤 저마다 새 길을 찾고 있는 각국의 여러 자본주의든 간에, 공통된 것은 고삐 풀린 시장자본주의의 규제 완화 논리와 함께 잘사는 사회경제 민주주의 논리 간의 밀고 당기는 시소게임 또는 ‘이중운동’이라 할 수 있다. 시민들은 이런 이중운동에 초점을 맞춘 경제학책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진화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이중운동이 ‘권력을 시장으로’ 넘겨주는 식으로 일단락된 것은 큰 역설이다. 삼성 재벌로 대표되는 경제력의 현격한 집중과 양극화 심화, 그리하여 ‘밥 먹여주지 못하는 민주주의’를 초래한 민주화의 역설은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국민적 합의로 대두되게 만들었다. 시대 흐름은 보수세력조차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대 의제를 수용하도록 강제했다. 그러나 새 정부는 공약을 저버리고 다시 시장만능주의적 ‘줄푸세’로 돌아가 소수 재벌에 의존하고 수출이 독주하는 경제 살리기를 국정 중심 기조로 삼고 있다. 이에 따라 소수 대기업의 전횡과 경제력 집중을 견제하고 강자 독식에서 공유 성장으로 가는 길은 원점에 서게 됐다.

오늘 한국 사회에는 사회적 책임 없는 부의 대물림이 너무나 쉽게 용인된다. 10명 중 대충 1명만이 취업에 성공할 뿐 전체 노동자의 50%는 비정규직으로 전락한다. 이는 특히 청년세대에게 깊은 좌절감을 안겨준다. 창조경제를 한다, 시장 생태계를 개선한다고 하지만 소수 대기업의 중소기업 수탈과 시장 지배는 여전하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지출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멕시코 다음으로 꼴찌 신세다.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려 새해 벽두 우리의 시선을 끈 것은 캄보디아 소식이었다. 프놈펜 남부 공단 지역에서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노동자들에게 군대가 무차별 총격을 가해 5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다치는 유혈 참사가 일어났다. 또 삼성전자 글로벌화의 최첨단 기지인 베트남 공장 신축 현장에서는 작업 시간에 늦어 출입구를 넘어 들어가려 한 노동자를 경비용역이 전자충격봉으로 구타해 이에 항의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다른 한편 예컨대 유럽의 독일 같은 경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이중운동은 좀 점잖고 사정도 그리 나쁘지 않다. 메르켈이 이끄는 독일 모델은 최근 한국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독일은 중소기업이 강한 ‘히든챔피언’의 나라이기도 하다.


주류 시장경제학과 혁명경제학 사이

사람들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불화와 화해, 그 다양한 발전 형태와 부단한 흔들림에 대한 이야기를 <멘큐의 경제학> 같은 주류 시장경제학, 아니면 마르크스의 <자본론> 같은 혁명경제학에서 듣지는 못한다. <사회경제민주주의의 경제학>은 이들 경제학의 ‘인식 지체’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 각국 사례나 부분적 주제를 넘어 시장자본주의의 민주적 개혁론에 대해 체계적 지식을 얻고자 하는 시민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쓰인 책이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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