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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일단 행동하고 계획은 다음에

앞을 뒤로, 뒤를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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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1-29 16:09 수정 : 2014-02-03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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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제공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제일 슬픈 구절들을” 이것은 정현종 선생이 번역한 파블로 네루다의 저 유명한 시 첫머리다. 스페인어는 원래 동사가 앞에 오고 목적어가 뒤에 오니까 “오늘밤 나는 제일 슬픈 구절들을 쓸 수 있다”라고 평범한 우리말 어순으로 번역해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절묘한 도치 때문에 시적인 울림이 생긴다.

서울 홍익대 근처 카페 ‘미카야’의 팥빙수를 좋아한다. 맛도 맛이지만 이 팥빙수의 독특한 점은 그 순서에 있다. 보통의 팥빙수는 간 얼음을 먼저 넣고 그 위에 팥을 끼얹는데 이곳의 팥빙수는 그 반대로 한다. 팥을 먼저 넣고 보송보송한 우유얼음을 그 위에 빠짐없이 덮는 것이다. 팥빙수를 받으면 눈처럼 흰 얼음 위에 흰 떡만 보여서 온통 새하얀 것이 깨끗한 느낌을 준다. 이 느낌은 끝까지 유지되는데, 보통의 팥빙수는 팥이 얼음을 누르며 녹아들어 먹다보면 질척해져버리는 반면 이 팥빙수는 얼음이 팥에 눌리지 않아 끝까지 보송함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순서를 뒤바꿔보는 것은 때로 아주 강력하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사진)에서 설경구는 달려오는 기차 앞에 서서 “나 돌아갈래!”를 외치고 영화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다. 이 영화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됐다면 이 마법 같은 강렬함은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메멘토>는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려 10분이 지나면 기억을 잃는 주인공을 내세워 이야기를 거꾸로 전개해나간다. 역행캐논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지점은 사건의 내용에 있는 게 아니라 순서를 뒤집은 형식에 있다.

톰 피터스와 로버트 워터맨은 기업에서 무엇보다 ‘실행’이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표현을 썼다. “준비! 발사! 조준!”(Ready! Fire! Aim!) 기존의 준비-조준-발사에서 조준과 발사의 순서를 뒤바꾼 것이다. 계획만 세우면서 행동을 늦추지 말고, 일단 행동한 뒤 오차를 파악해서 다시 조준하라는 뜻이다. 국토가 파괴되더라도 일단 행동을 앞세웠던 공사판의 제왕, 전임 대통령이 떠올라 좀 오싹하긴 하지만, 순서를 뒤바꾼 이 어법은 무척 신선하고 인상적이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순서는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일상의 작은 것에서, 순서를 한번 바꾸어보자. 라면을 끓일 때 면을 먼저 넣는 게 아니라 수프를 먼저 넣으면 끓는점이 높아져 더 맛있다고 하지 않던가.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재킷이나 코트 위에 조끼를 입은 스타일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래, 꼭 조끼를 먼저 입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런 것이 재미있다.

김하나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 저자·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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