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길, 겨울에야 보았네
겨울나기의 즐거움 ③ 어림 반 푼어치도 없던 “산행의 진수는 겨울산행”이란 말을 실감하게 된 사연
등록 : 2014-01-24 16:03 수정 :
잣나무 숲길에 난 고라니길. 동동이가 따라나와 먼저 가고 있다.강명구 제공
이제 겨울이 한창 무르익어가고 있다. 새벽녘에 일어나 문 밖의 온도를 살피니 영하 14℃다. 추운 날씨다. 아마 영하 20℃까지 내려가는 추위가 한두 번 더 오다보면 조금 더 추웠다 덜 추웠다를 반복하며 겨울이 서서히 봄날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도시 살 때와 달리 시골에 살다보면 전문 농사꾼이 아니더라도 날씨에 아주 민감해진다. 그나마 좀 편히 살려면 자연을 거스르기보다 자연에 기대야 함을 깨닫기에 계절의 변화를 세세히 관찰하게 된다. 십 몇 년의 경험으로 계절은 우리가 봄·여름·가을·겨울로 칼같이 구분하듯 그렇게 오가지 않고 서로의 계절을 조금씩 밀고 당기며 약간은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어김없이 오고 감을 알게 되었다. 아마 우리네 어수선한 이 시절도 이런 식으로 지나갈 게다. 단기적 비관이 장기적 낙관에 자리를 내줄 게다.
요즈음은 비닐하우스다 뭐다 하여 농한기가 없다지만 아무래도 겨울은 연중 가장 한가한 시절이다. 우리 마을 어르신들도 이 시절이면 체력 단련을 겸해 지팡이에 의지해 삼삼오오 뒷산에 오르신다. 이분들 행로를 따라 나도 아내와 함께 동동이, 업둥이를 앞세우고 뒤세워가며 가끔씩 나지막한 뒷산에 오른다. 가장 아름다운 산행은 물론 두말할 나위 없이 4월 하순의 봄 산행이다. 무덤가 양지바른 곳에는 낙엽 사이로 원추리가 싹을 내밀고, 화살나무 어린잎인 홑잎 나물이 너무도 아름다운 연둣빛으로 빛나고, 그 외에도 다래 순이며 엄나무 순, 그리고 두릅까지 먹을 것이 지천이다. 이곳으로 이사 와서 팔순 고모님의 개인지도와 식물도감으로 독학한 아내의 지론에 따르자면 봄에 나는 어린잎과 나물은 잘만 조리하면 못 먹을 것이 없단다. “당신 먼저 먹어보고 탈 없으면 일주일 뒤 나도 먹겠다”고 하여 아내의 하루 세끼 맛난 밥을 배신한 천하의 순악질 남편으로 한때 매도당했던 나도 지금은 이 말을 믿게 되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산행의 진수는 겨울 산행”이라는 말을 나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에 따르자면 모든 지나가는 것들을 벗어버린 산의 본디 모습, 즉 진경산수(眞景山水)는 겨울산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귀곡산장처럼 풀이 자란 텃밭이며 정원 앞에서 ‘결초보은’이라는 고사성어가 ‘웬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리듯, 춥고 을씨년스럽기만 한 겨울 뒷산은 고작해야 낙엽 밟는 소리의 운치나 오가며 삭정이 땔감 모으는 장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군대 시절 산 중턱에 있던 탄약고 보초 서던 겨울 신새벽을 생각하면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진다. “한번 추워봐라. 입에서 그런 호사스런 얘기가 나오나!”가 내 기본 입장이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못된 사냥꾼들이 뒷산에 놓은 올무와 덫에 걸린 산짐승들이 밤새 울부짖고 이 짐승들 사냥하러 가던 우리 집 개들도 올무에 걸려 고생하던 것을 생각하면 겨울산 진경산수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만큼은 아니더라도 겨울산의 진경산수 운운 언급 한 자락 끝을 잡을 기회를 우연찮게 잡았으니, 정말로 생각지도 못했던 겨울나기의 즐거움이 지난 두 회에 걸쳐 소개한 새 관찰과 겨울밤 생나무 목공에 보태졌다. 뒷산 울창한 잣나무숲은 경사가 하도 가파르기도 하거니와 근처에 34만5천V 고압선이 지나가기에 우리 부부의 겨울 산행 기피지였다. 40여 년 전 내 손으로 심은 손가락 굵기의 잣나무들은 이제 울울창창 대낮에도 어두운 산그늘을 드리우고 둥치 아래 지천으로 고사리를 키워낸다.
산을 누비고 다니던, 지금은 작고(?)한 풍산개 들이가 올무에 걸렸을까봐 찾아헤매던 중 급한 산 경사를 사선으로 가로질러 난 폭 20cm 정도의 길 아닌 길을 발견했다. 분명 등산로는 아니었지만 간신히 밟아 오른 이 길은 그리도 편안할 수 없었다. 힘이 가장 덜 들고 가장 안전하게 잣나무 숲길을 따라 정상으로 난 길이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니 급한 산 경사면을 따라 온 군데 이런 길들이 거미줄처럼 나 있었다. 그때야 깨달았다. 아! 배고픈 고라니 가족들이 춥고 배고픈 겨울에 개들 눈치 못 채게 무리지어 드나들던 길목이었구나. 아! 고라니길, 진경산수! 시인 고은은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내려올 때 보았네”라고 읊었지만 우리 부부는 ‘봄철 산행 못 본 그 길, 한겨울에 진경산수로 보았네’라고 화답해야 할 것 같다.
강명구 아주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