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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가을의 전설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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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0-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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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사에 빛나는 포스트시즌 해결사들… 투수 김정수·타자 최익성·감독 김응룡

현대가 그를 택한 것은 정말로 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2000년 2월. 당초 현대가 원하던 용병은 우투 좌타자, 혹은 스위치 타자의 3루수. 바로 전해 3루수 때문에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스트를 펼쳐보니 구미에 딱 맞는 선수가 없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택한 선수가 바로 백인 용병 톰 퀸란이었다. 그는 2000시즌 초반 홈런포를 앞세워 현대의 상승세를 주도했다. 그러나 경기를 거듭할수록 정확도에서 문제점을 드러냈다. 한방은 있으나 결정적일 때 번번이 방망이가 헛돌았다. 현대는 한때 퀸란의 방출 또는 트레이드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

도깨비 방망이로 한국시리즈 MVP 뽑혀

현대는 결국 클린업트리오의 언저리에서 하위타선인 8번으로 끌어내렸다. 퀸란은 2할대의 타율에 무려 173개의 삼진을 당했다. 그러나 37개의 공을 담장 너머로 넘겼다. 퀸란의 37이라는 숫자는 현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예고한 일종의 암호였다. 퀸란의 도깨비 방망이는 마지막 가을축제인 한국시리즈에서 번쩍번쩍 빛을 냈다. 두산의 추격이 거셌던 5·6차전에서 힘없이 물러나며 실망감을 안겨줬던 퀸란은 7차전 첫 타석에서 2타점 2루타로 기선을 제압하더니 4회 3점짜리 홈런으로 현대 우승의 주역이 됐다. 게다가 8회에는 자신의 천적이던 언더핸드스로 투수 한태균을 상대로 1점짜리 쐐기포까지 날렸다. 기자들은 당연히 퀸란에게 한국시리즈 MVP의 영광을 건넸다.


그저 그런 성적, 또는 심한 기복을 보이다가도 포스트시즌의 계절 가을만 되면 힘을 200% 발휘하는 선수들이 있다. 가을 사나이. 혹은 포스트시즌 해결사. 우리는 그들을 이렇게 부른다. 앞에 나온 퀸란이 딱 그런 경우다.

사진/ 김정수는 한국시리즈 최다 출장·최다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에서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선수는 바로 한화 김정수. 기아의 전신 해태에 입단한 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해태의 V9을 이끌어온 이가 ‘황금의 왼팔’ 김정수다. 오죽했으면 별명도 ‘가을까치’(이현세 작 공포의 외인구단 주인공을 본뜬 별명)였을까.

김정수에겐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해태 시절부터 탁월한 근육 유연성 덕에 연투에도 쉽게 지치지 않았다. 에이스 선동렬(현 한국야구위원회 홍보위원)이 시즌 내내 훌륭한 성적으로 팀을 이끌었어도 유독 한국시리즈에만 가면 성적이 신통치 않았다. 그래도 걱정은 없었다. 김정수가 있기 때문. 김정수는 한국시리즈 최다 출장 및 최다승 기록(7승)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좀처럼 깨지기 어려운 기록이다.

더구나 올해로 그는 38살. 마흔을 코앞에 둔 왼손 퇴물투수가 소리소문 없는 재기 끝에 포스트시즌까지 진출한 것이다. 해태에서 SK로 옮긴 뒤 1년 만에 퇴출 통보를 받고서 김정수는 이광환 감독을 스스로 찾아가 선수생활 연장을 허락받았다. 두주불사의 김정수가 지난 겨울 애리조나 전지훈련에서 입에 댄 술은 정확히 맥주 한캔.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페넌트레이스에서 고질적인 오른쪽 어깨 부상, 밸런스 난조 등으로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하다가도 10월만 되면 펄펄 나는 또 한명의 사나이가 있다. 바로 기아 최익성이다. 그의 가을 이야기는 4년 전 삼성 시절을 되짚어봐야 한다. 97년 10월17일 LG와의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삼성 최익성은 1회초 선두타자 홈런을 터뜨렸다. 포스트시즌에서 나온 두 번째 선두타자 홈런. 99년에는 한화 유니폼을 입고 가을잔치에 참가했다.

한화 대 롯데의 한국시리즈 1차전. 6회 3-3 동점이었다. 1사1루에서 이희수 당시 한화 감독은 이영우를 빼고 최익성을 대타로 기용했다. 최익성은 기다렸다는 듯 통렬한 역전 투런 홈런을 터뜨려 팀에 1차전 승리를 안겼다. 한번 승기를 잡은 한화는 4승1패로 롯데를 몰아붙여 창단 뒤 첫 우승트로피를 안았다.

기구한 야구인생, 플레이오프서 한풀이

사진/ 올해 포스트시즌에서는 스프레이 히터로 거듭난 두산 심재학의 활약이 기대된다.
최익성의 야구인생은 어찌보면 기구하다고 할 수 있다. 트레이드로 유니폼을 갈아입는 전력이 많은 것도 그렇지만, 이적 첫해마다 공교롭게 팀이 포스트시즌에 나간다. 97 삼성, 99 한화에 이어 2000년엔 LG로 옮겨 플레이오프에 나섰다. 최익성은 정규시즌에서 주로 대타로 나가다가 막상 포플레이오프가 시작되자 선발 라인업에 포함됐다. 큰 경기에 강한 최익성을 코칭스태프가 믿어줬기 때문이 아닐까. 최익성은 지난해 플레이오프에서 좋은 수비로 팬들의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올해는 기아가 한화와의 마지막까지 가는 경쟁 끝에 4위에서 탈락, 아쉽게도 그의 플레이를 볼 수 없다.

올해 플레이오프에서 주목할 만한 선수는 누굴까. 두말할 것 없이 두산 좌타자 심재학이다. 두산이 지난해 선수협 파동의 보복에 다름없는 조처로 단행한 심정수-심재학의 맞트레이드에서 많은 이들은 두산이 ‘밑지는 장사’를 했다고 수군댔다. 열광적인 기질의 두산 팬들의 항의전화를 받느라 두산은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보니 예상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심재학은 시즌 내내 타격 5걸에 들어가는 좋은 활약으로 팀 타선을 주도했던 것이다.

심재학의 변신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우선 밀어치기가 능해졌다. 전형적인 당겨치기 타자였던 심재학은 올해 들어 부쩍 스프레이 히터로 거듭나 맹활약을 했다. 또 약점이었던 왼손 투수와의 승부 요령을 터득했다. 심재학은 올 시즌 득점권 타율도 1위를 차지했다. 그간 LG 시절 영양가 없는 타자로 팬들에게 각인됐던 심재학이 진짜 승부처인 포스트시즌에서 과연 어느 정도의 몫을 해주느냐에 따라 두산의 성패가 달려 있다. 실제로 심재학은 기자들에게 “기사 쓸 때 해결사라는 말을 꼭 써주세요. 올해는 진짜 그 정도 활약을 했잖아요”라며 자신이 진짜 4번타자가 된 것에 대해 기뻐하고 있다.

사진/ 이승엽은 지금까지 큰 경기에서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
대조적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홈런타자 이승엽은 현재 어떤 심정일까. 롯데 외국인선수 호세와의 경쟁 속에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했지만 코칭스태프는 어쩌면 못 미더워할지도 모른다. 큰 경기에서 약하다는 게 강타자 이승엽의 일반적인 인상. 실제로 김응룡 삼성 감독은 시즌 내내 이승엽 얘기가 나올 때마다 “무슨 4번타자냐. 약점이 너무 많은 선수”라며 이승엽 깎아내리기를 서슴지 않았다. 팀내 주축 타자를 헐뜯어 투쟁심을 자극하고자 하는 의도가 절반, 나머지 절반은 이승엽에 대한 김응룡 감독의 진심이다.

역대 최고의 해결사는 과연 누구인가

사진/ 해태 시절 한국시리즈 진출 100% 우승을 일궈낸 삼성의 김응룡 감독.
잠깐, ‘포스트시즌 해결사 열전’의 돌발 퀴즈. 역대 최고의 해결사는 과연 누굴까. 앞서 열거된 선수들은 물론 아니다. 답은 김응룡 감독이다. 삼성이 2년에 걸친 구애 끝에 그를 우승 청부사로 영입했고, 이제 마지막 대미 한국시리즈가 기다리고 있다. 한국시리즈 진출 100% 우승을 일궈낸 ‘코끼리’ 감독의 솜씨를 다시 한번 감상할 차례인 것이다. 선동렬의 부상을 철저히 감춘 채 빙그레와의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일궈낸 것도, 96년 심판 배정을 들먹이면서 현대와의 심리전을 승리로 이끌어낸 것도 김응룡이다. 선동렬이 일본에 진출했으니 해태는 이제 끝이라는 주위의 평가를 일축하고 96, 97년 한국시리즈 트로피를 차지하기도 했다.

김응룡 감독의 삼성은 올 시즌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선 자신이 예전 해태 시절과는 달리 스스로 하나둘씩 금기를 만들어나갔다. 우승을 하기 위해서 스스로 부정타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복어회 한 접시를 한 젓가락에 해치울 정도로 먹성 좋은 김응룡 감독이 올해부터 그다지도 좋아했던 개고기를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목표가 서면 한눈팔지 않는 프로페셔널 김응룡이다. 우승 청부사 김응룡은 과연 20년 한국야구에서는 미스터리이자 삼성 처지에서는 숙원인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뤄낼 수 있을까.

김성원/ 스포츠투데이 야구부 기자 rough@sports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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