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벙이에서 채변봉투까지’ 새롭게 인기를 모으는 그때 그 시절의 만화·음악·물건들
다음 만화들의 공통점은 뭘까? 길창덕의 <신판 보물섬>, 고우영의 <대야망>, 그리고 <유리의 성>과 <바벨2세>. 정답은 두 가지다. 첫째, 이 만화들은 모두 출판사 어문각에서 나온 ‘클로버문고’였다는 점. 둘째는 모두 1970년대 최고의 인기만화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문제의 답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어린 시절 클로버문고를 붙잡고 킬킬거리던 기억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어느새 당시 자신만한 자녀를 둔 세대가 돼버린 30대 초반부터 40대 초반까지의 세대들이다.
아련한 추억의 상징, 클로버문고
당시 어린이들, 즉 지금 30대들에게 ‘클로버문고’란 단순한 상품 이름을 넘어 어린 시절을 함께한 아련한 추억의 상징이었다. 클로버문고는 지난 1972년부터 모두 428종이 출간된 70년대의 대표적인 만화 문고판이었다. <대야망>이나 <바벨2세> 등 인기 만화들은 권당 10만부 이상, 적게 팔린 것이라도 1만부씩 팔렸고, 총판매부수가 최소 1천만부 이상일 것으로 추산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80년대 들어서면서 만화책 시장이 대본소 시장용 단행본으로 바뀌는 바람에 클로버문고는 82년 절판되고 말았다.
이 ‘클로버문고’가 20년 만에 되살아난다. 최근 출판사 어문각은 꼭 20년 만에 클로버문고를 복간하기로 결정했다. 이르면 올해 안으로 21세기판 클로버문고가 다시 등장할 예정이다. 단순히 이름만 다시 살리는 것이 아니라 1970년대 당시 책을 그대로 다시 찍어내는 것이다. 어문각 원준희 이사는 “클로버문고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는 30대 독자들과 의견을 나무면서 복간준비위를 구성해 다시 펴낼 작품을 선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클로버문고의 복간은 애초 출판사쪽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다. 올해 7월 우연히 한 만화팬이 어문각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어린 시절 즐겨봤던 클로버문고를 다시 보고 싶다는 글을 올린 것이 계기였다. 수많은 네티즌들이 동조하는 답글을 띄웠고, 어문각 홈페이지는 순식간에 클로버문고 복간을 요구하는 글로 도배가 돼버렸다. 스스로도 예상 못한 엄청난 반응에 어문각쪽이 복간 여부를 검토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팬’들에 대한 보답차원에서 전격적으로 복간을 결정했다.
요즘 들어 70년대 문화상품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클로버문고 복간을 비롯해 1970년대 어린이들에게 인기를 누렸던 다양한 문화적 아이콘들이 최근 새롭게 조명받거나 다시 문화상품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런 경향이 가장 활발한 장르는 단연 만화다. 딴지일보가 발매한 70년대 만화의 대표작 고우영의 <삼국지> 시디롬의 경우 2만장이 팔리는 대박을 기록했다. 바다출판사가 최근 출간한 70년대 한국만화 주요작 5편도 괜찮은 호응을 얻고 있다. 가장 인기가 좋은 <꺼벙이>는 초판 5천부가 발매 보름 만에 거의 다 팔려 재판을 준비하고 있다.
그 시절 교과서 한권에 1만원
10대에 점령당했던 음반 시장에서도 ‘70년대 음악’이 다시 소생하고 있다. 요즘 가요 음반시장의 주력 상품은 한 가수의 노래가 아니라 여러 가수들의 노래를 한꺼번에 싣는 이른바 ‘편집음반’. 이 편집음반 가운데 상당수가 30대 이상의 연령층을 타깃으로 삼는 것들로 70년대 노래들이 주된 레퍼토리로 수록되고 있다. <푸른 시절> <미사리에서 춘천까지> <포크송-추억과 향수의 33년> 등 70년대 노래들이 중심이 된 편집음반들이 줄지어 나왔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사고 싶어도 음반이 없어 사기 힘들었던 과거의 히트곡들이 최근 1년 사이에 여러 종 나온 것도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대표적인 것이 지구레코드가 낸 김정미, 이용복, 송골매 등의 70년대 음반들로 비록 판매량은 적지만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화제가 됐다. 대형 음반매장인 교보문고 핫트랙스의 한 직원은 “요즘 30대들은 그 이전 세대들에 비해 음반을 사는데 더 적극적인 편으로, 특정 가수의 음반보다는 70, 80년대 노래 편집음반을 선호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아예 미사리 등 서울 밖으로 밀려났던 70년대의 스타 가수들도 다시 서울로 입성하고 있다. 이런 추세에 맞춰 포크 가수들의 전용 무대도 생겼다. 지난 9월10일 개관한 인켈아트홀 라이브 포크뮤직 전용관이 바로 그것. 70년대 <장미> <바다의 여인> 등으로 인기 높았던 4월과 5월이 개관 첫 콘서트를 열었는데, 별다른 홍보가 없었는데도 입소문이 퍼지면서 30∼40대 관객이 몰려 공연당 100명 이상의 관객이 드는 좋은 성적을 올렸다.
문화계에서 70년대가 30대들에게 인기 코드로 떠오르는 것과 함께 ‘70년대 물건’들도 수집품으로 인기를 모으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서울 인사동 골목에는 아주 오래된 골동품이 아니라 70년대 물건들을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5년 전 처음 문을 연 ‘토토의 오래된 물건’을 시작으로 지금은 대여섯곳이 성업중이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토토의 오래된 물건’은 주인 민권규(37)씨가 스스로 자기 세대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고 싶어 문을 열었다고 밝히는 곳.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정신없이 모았던 동그란 아톰 딱지며 70년대 여자 어린이들이 이옷저옷 갈아입히며 가지고 놀았던 종이 인형은 기본. 70년대 프라모델부터 뱀주사위놀이, 못난이 인형, 박치기왕 김일 선수가 나오는 프로레슬링 포스터, 심지어 채변봉투까지 시간을 돌려놓은 듯 옛날 물건으로 가득하다. 고객들은 20대부터 40, 50대까지 다양하지만 직접 물건을 사는 층은 역시 30대가 주류라고 한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상품으로는 단연 교과서가 인기이다. 몇년 전만 해도 가격 자체가 형성돼 있지 않던 70년대 교과서가 요즘에는 권당 1만원을 호가한다.
세대별 문화가 자리잡아가는 과정
그렇다면 70년대가 되살아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얼핏 늘 있어왔던 ‘복고’의 연장선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양상과 의미는 기존 복고풍과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70년대를 반추하는 지금 30대들이 그 이전 세대들과 문화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먹고살기 바빠’ 문화적 측면에 대해 무관심한 편인 지금 40대 이상이 10년 전 30대였을 때와 분명히 차이가 있다. 지금 30대들은 문화에 대해 제대로 인식을 가지고 성장한 첫 번째 세대들로 볼 수 있다. 실제 이전 세대들에 비해 활발히 자기 문화를 찾아 나서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이 성장했던 70년대가 그 이전인 60년대나 그 이후인 80년대와는 다른 문화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60년대가 사회 전반적으로 전근대성이 많이 남아 있었던 빈곤한 시기였다면, 70년대는 비로소 산업화의 결과들이 생활 속으로 반영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어린이 장난감만 해도 대나무 등 자연재료로 만들던 60년대와는 달리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공산품으로 쏟아져나왔다. 그렇다고 80년대처럼 물품들이 다양하고 풍성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몇 가지 안 되는 대표적인 상품들이 동시대성을 가지던 시기였다. 동시대인이 공유하는 문화적 상징이 뚜렷하고 그에 대한 향수가 더욱 강한 것이 70년대의 특징이다. 클로버문고는 그런 사례다.
70년대 문화상품의 부활은 또다른 관점으로 볼 때 세대별 문화가 자리잡아가는 과정으로도 받아들여진다. 누구나 자기가 성장할 때 즐기던 문화를 평생 가지고 가게 마련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문화적 풍토가 척박해 그러지 못해왔다. 이제 요즘 30대부터 비로소 특정 세대와 특정 문화가 함께 공존해가는 변화의 싹이 트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딴지그룹 김어준 총수는 “물론 그 이전에도 이런 경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시장에서 특정 세대별 문화상품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소외감을 느끼는 30대로선 이런 변화가 반갑다”고 평했다.
문화평론가 박인하씨는 이렇게 분석한다. “요즘 놀잇감, 또는 엔터테인먼트라는 것들이 일회적이고 소모적인데 비해 70년대에는 변화의 속도가 느리고 공유의 폭이 넓었다. 요즘에는 세대가 조금만 바뀌고 유행이 조금만 지나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비해 70년대는 굉장히 폭넓은 세대의 트렌드와 기호가 맞춰져 있었다.” 당시 어린이들이 서른살이 넘어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나자 이제 문화에 눈을 돌려보지만, 이들이 즐기던 것은 사라졌고 현재 유행하는 문화는 이들에겐 낯설기 그지없는 것들이다. 결국 자기에게 가장 친숙한 것들을 다시 찾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로봇태권V 2002>, 요즘 아이들에게도 먹혀들까
이런 흐름 속에서 세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시험하는 문화상품들도 있다. 단순히 지금 기성세대들의 어린 시절 추억이 아니라 그들 자녀세대들에게도 매력적인 장수상품으로 변신하려는 것이다. 지난달 제작발표회를 열고 제작에 착수한 <로봇태권V 2002>가 대표적인 예다. 지난 1976년 개봉했던 한국 애니메이션의 대표작 <로봇태권V>를 디지털 애니메이션으로 새롭게 만든다. 제작자쪽은 지금 어린 세대들이 태권V를 전혀 보지 못했지만 이들의 손을 잡고 극장에 가는 것은 결국 태권V를 보고 자란 30대 부모들이란 점을 믿고 있다. 내년 개봉하는 태권V가 과연 25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부모세대들에게는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면서 일본 캐릭터에 빠져 있는 요즘 아이들에게도 먹혀들 수 있을까. 70년대 문화의 부활 속에서 눈길을 끄는 또다른 흥밋거리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꺼벙이, 두심이. <도깨비 감투>의 혁이 등 70년대 명랑만화의 주인공들. 요즘 다시 복간돼 만만찮은 인기를 누리며 오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클로버문고를 돌라다오." 70년대 어린이문화의 상징적 코드였던 어문각의 클로버문고. 이제는 30대가 된 당시 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절판 20년 만에 복간된다.(강창광 기자)

사진/ 70년대 교과서들이 요즘 인기를 끌면서 수요가 부쩍 늘었다.(박승화 기자)

사진/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다시 소유하고 싶은 이들이 늘어나면서 골동품이라고 부르기엔 덜 오래된 30년 안팎의 낡은 물건을 파는 곳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인사동에 자리잡은 '토토의 오래된 물건'.(박승화 기자)

사진/ 새로 만들어지는 로봇태권V 시안(왼쪽)과 76년도 개봉 당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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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토이를 아십니까.” 70년대를 대변하는 추억의 상품으로 새롭게 ‘마니아’들을 거느리기 시작한 것이 바로 ‘틴토이’(Tin Toy)다. 틴토이는 이름 그대로 양철로 만든 깡통 로봇 장난감들이다. 지난 60년대 일본에서 흔한 보통 장난감이었는데 30년이 지나 당시 일본의 30∼40대 마니아들이 수집에 열을 올리면서 인기 수집품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가을 뉴욕 소더비 경매장에서는 65년산 틴토이가 4천달러(500만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이 틴토이가 일본과 정확하게 10년의 시차를 두고 우리나라에서도 요즘 서서히 인기를 끌고 있다. 틴토이는 60∼70년대 전세계적인 유행상품이었고, 우리나라에서도 70년대 드물지 않던 장난감이었다. 올해 들어서 각종 인터넷 경매사이트를 중심으로 틴토이 주문과 경매가 늘고 있다. 아톰 등의 인기 품목이라도 아직은 몇만원선이지만 값이 점차 오르는 추세다. 재미있는 점은 틴토이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와 일본의 30년 전 물건 인기 붐이 꼭 10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근대화가 늦어진 우리가 70년대 경제성장기에 진입했고, 일본은 60년대부터 고성장기에 접어든 탓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6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지금의 40대들이 30대가 된 지난 90년대 ‘60년대 붐’이 일었다. 우리나라에는 <바벨2세>로 잘 알려져 있는 요코야마 미스테루 등 60년대 인기 만화가들의 만화가 90년대 일제히 복간됐고, 역시 60년대 장난감 등 생활용품들 수집 붐이 일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30년 전 물건은 의외로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토토의 오래된 천국’ 민권규 대표는 “꼭 한 세대 이전, 즉 30년 전 물건은 골동품이라고 보기엔 덜 오래됐고 그렇다고 고물도 아닌 어중간한 물건이어서 사람들이 쉽게 버리기 때문에 오히려 남아 있는 것이 적다”고 설명한다. 너무나 흔하고 누구나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귀해진 것들. 그래서 당시를 떠올리는 이들은 사라진 물건들을 더욱 구하고 싶어하는 것 아닐까. |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