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가장 최근의 사건인 ‘안녕들 하십니까’는 가장 진화한 저항적 역능일까. <나·들>은 이 사건이 단순히 자신과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안녕을 묻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 최초의 발화자가 언급한 것은 철도노동자 대량 해고를 비롯한 공적 의제들이었지만, 자신의 개별적 안녕과 관련한 문제로 연결짓고 있다. 요컨대, 개인적 주체가 공적 의제를 ‘내부화’한 것이다. 이후 다른 대자보들도 분야만 조금씩 다를 뿐 모두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개인과 공공의 경계를 횡단해 자신의 신체 안으로 통합함으로써 공적 의제에 관한 하나의 중심이 해체되는 대신 모두가 중심인 거대한 무정형의 형식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체제 지속되는 한 그들도 진화할 것” 조직에 진입하려야 진입할 수 없는 배제된 세대의 급진화는 어쩌면 필연적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이 사건의 끝이 어디일까를 성급하게 물을 이유는 없다. 그들은 체제 안에서 길러졌기에 체제가 지속되는 한 그들도 진화할 것이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그렇다면 가장 최근의 사건인 ‘안녕들 하십니까’는 가장 진화한 저항적 역능일까. <나·들>은 이 사건이 단순히 자신과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안녕을 묻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 최초의 발화자가 언급한 것은 철도노동자 대량 해고를 비롯한 공적 의제들이었지만, 자신의 개별적 안녕과 관련한 문제로 연결짓고 있다. 요컨대, 개인적 주체가 공적 의제를 ‘내부화’한 것이다. 이후 다른 대자보들도 분야만 조금씩 다를 뿐 모두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개인과 공공의 경계를 횡단해 자신의 신체 안으로 통합함으로써 공적 의제에 관한 하나의 중심이 해체되는 대신 모두가 중심인 거대한 무정형의 형식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체제 지속되는 한 그들도 진화할 것” 조직에 진입하려야 진입할 수 없는 배제된 세대의 급진화는 어쩌면 필연적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이 사건의 끝이 어디일까를 성급하게 물을 이유는 없다. 그들은 체제 안에서 길러졌기에 체제가 지속되는 한 그들도 진화할 것이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