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는 이야기 2 - 우리의 도덕과 상식에 관한 한판 실험, 민간인학살 통합특별법
지난 9월6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통합특별법’이 여야의원 48명에 의해 발의되었다. 대한민국 수립과정에서 발생한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 그리고 거의 완벽하게 묻혀졌던 사건을 어떻게 우리가 풀어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한국현대사에는 두 가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기가 있었다. 하나는 친일파 청산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민간인학살이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은 서로 분리된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 연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문제가 상호 관련되어 있다 함은 친일세력이 민간인학살의 가해자나 지원자로 등장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에서 최대규모의 학살인 보도연맹원 집단처형, 크고 작은 집단학살을 숱하게 낳은 ‘공비토벌’ 전술, 그리고 학살의 주체로 등장한 군과 경찰, 청년단에서는 일제의 잔재가 짙게 묻어난다.
일제잔재와 민간인학살
일제는 1936년 12월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을 제정한 것을 시발로 사상범들에 대한 감시를 법제화하였다. 이어 일제는 1938년 7월 사상전향자들로 시국대응전선(全鮮)사상보국연맹을 결성했으며, 다시 1941년 1월에는 사상보국연맹을 대화숙(大和塾)으로 개편하였다. 대화숙은 일본정신의 현양과 내선일체 강화 및 전향자의 선도 보호 등을 주요사업으로 삼고 전향자들을 입숙시켜 군대식 기율로 관리하면서 황민화 교육을 실시했다. 일제는 이어 1941년 2월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제정하여 재범이나 도주의 우려가 있는 사상범들을 예방구금소나 감옥에 가수용할 수 있는 길을 텄다. 대화숙 등에 수감되었던 사상범들은 소련군의 대일 개전과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일본이 서둘러 항복했기에 망정이지 2차대전의 종전이 늦춰졌거나 한반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면, 일제가 이렇게 알뜰하게 관리해온 사상범들을 그대로 두었을 리가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평시에 사상범을 철저히 ‘관리’하다가 유사시에 ‘처리’한다는 일제의 숨은 계획은 불행히도 대한민국에 계승되어 한국전쟁 때 실천에 옮겨졌다. 1949년 6월 검찰과 경찰 요인들의 주도 아래 조직된 국민보도연맹은 남로당이나 민애청 등 좌익계열의 정당 및 사회단체 성원이었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대상으로 삼았다. 관의 개입에 의한 강제전향 역시 천황제 국가 일본과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제도로 대표적인 일제잔재였다.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와 공산주의 박멸을 기치로 내건 보도연맹에의 가입은 사실상 의무사항이었다. 대한민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확실히 충실한 국민이 되었다는 것’을 보증하는 장치였던 보도연맹에 가입한 전향자들의 수는 약 30여만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 ‘충실한 국민’ 대부분은 전쟁이 발발하자 국가기구에 의해 조직적으로 소집되어 철저히 ‘처리’되었다. 민간인학살에 끼친 일제 잔재의 영향은 공비토벌 전술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일본군이 범한 난징 대학살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것이 ‘무적 황군’이 행한 유일한 학살은 결코 아니다. 1920년의 간도 출병에서 약 4천명, 그리고 1932년의 간도토벌에서 약 2만명을 학살하는 등 일본군은 우리 민족 최대의 해외독립운동기지인 간도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이어 간도를 포함한 만주전역에서 전개된 항일유격투쟁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일제는 비민분리(匪民分離)에 기초한 집단부락 정책을 실시하면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고 집과 재산을 불태웠다. ‘비민분리’란 유격대를 물고기에 비유하여 물에 해당하는 주민들을 소개시켜, 즉 물을 빼버려 물고기를 잡는 토벌전술이다. 이에 기초한 비민분리 전술은 한국전쟁 전후의 유격대 토벌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을 뿐 아니라 멀리 베트남에서도 활용되었다. 일본군이 고안하여 적극 시행한 이 전술은 만주에서도, 한국에서도, 베트남에서도 집단부락으로의 소개명령에 따르지 않는 주민들을 상대로 엄청난 유혈사태를 가져오며 강력히 추진되었다. 프라이팬 벗어나니 불구덩이…
이제는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한국군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을 중추로 하여 건설되었다. 또 조선인으로 구성된 일제의 유격대 토벌부대인 간도특설대 출신들은 한국군의 수뇌부에 대거 포진했다. 이런 과정에서 주민들을 잠재적인 유격대 동조자로 보는 일제의 토벌전술이 한국군에 그대로 전수되어 실전에 적용된 것은 당연했다. 거창사건을 비롯하여 지리산 일대에서 발생한 학살사건을 일으킨 11사단의 경우, 사단장인 최덕신은 중국군 출신으로 국민당 정부의 토벌전략인 ‘견벽청야’(堅壁淸野) 전술을 채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일제는 자신들의 토벌전략을 세우는 데에서 이 전술을 크게 참고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군의 토벌작전이나 초토화작전은 일제의 잔재를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는 또 중일전쟁을 도발하면서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세력이었던 청년층에 대한 통제를 위해 청년단 조직과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일제는 청년특별연성소 등을 설치하여 일본어 강습과 아울러 황국신민교육을 실시했다. 징병제 실시를 염두에 두고 일제가 준군사조직으로 육성한 청년단의 교육과 동원을 통해 식민지 청년들의 의식구조에는 일제의 지배논리가 침투해 들어갔다. 해방 뒤 우익쪽이 신속하게 청년들을 동원하고 대한청년단, 대동청년단 등을 조직할 수 있었던 것도 일제의 유산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보인다. 불행하게도 이들 청년단들은 해방 뒤에서 한국전쟁 시기에 우익정치인들의 폭력도구로 전락하여 학살의 행동대로 동원되기도 했다.
물론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을 일제의 잔재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일제가 남긴 유산이 이 불행한 비극에서 주된 요인의 하나로 작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민간인학살은 일제 잔재 청산의 좌절이 우리 민족에게 어떤 비극을 가져다 주었는가에 대한 생생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학살은 한국사회에서 인권문제가 결정적으로 악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한 채 일본제국주의의 권위주의적 통치의 대상이 되었던 우리 사회는 새로운 국가건설과정에서 민간인학살로 인해 인권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생명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참담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일제의 지배 역시 10만명가량의 인명이 희생된 이른바 ‘남한대토벌’이라는 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거쳐 확립되었고, 일제는 3·1운동에 대한 무자비한 유혈탄압 등 우리 민족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민간인학살만을 놓고 본다면 이민족 지배하의 학살에 비해 동족 내의 ‘빨갱이 사냥’이 규모로나 강도로 보나 훨씬 더 잔혹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은 8·15 해방이 우리 민족에게 온전한 축복이 되지 못하고, “뜨거운 프라이팬을 벗어나니 불구덩이 속이더라”는 식이 되게 만든 것이다.
거창과 제주, 명예회복의 한계
군사독재 시절 수사기관에 잡혀가면 본격적인 취조와 고문이 시작되기 전에 “너 하나쯤 죽는다고 내가 털끝 하나 다칠 줄 아느냐”는 협박이 가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100만명가량의 무고한 민간인들을 무더기로 학살한 자들도 온전하게 살아남았는데, 물 좀 먹이고, 전기 좀 통하게 하고, 관절 좀 비틀고, 공중에 매달고, 그리고 좀 두들겨팼기로서니 그게 무어 그리 대수겠는가? 당하는 사람이나 가하는 놈이나 할 것없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인권불감증도 다 민간인학살에서 연유한 것이다. 시민들의 인권을 지켜야 할 국가기구가 민간인학살의 주체였을 때, 힘있는 자들의 손가락질 하나로 생과 사가 갈릴 때, 시민들은 보고도 못본 척, 들어도 못들은 척하며 다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극도의 몸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극도의 반공주의하의 군사독재는 바로 학살의 무덤 위에서 겁먹은 대중을 향해 자행되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은 사건수로 친다면 수천건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미흡하나마 그 해결을 위한 법안이 마련된 것은 거창과 제주 두곳뿐이다. 1996년 1월에 제정된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은 한국전쟁 전후의 수많은 민간인학살사건 중 첫 번째 명예회복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이 법안은 희생자들의 명예회복만 규정하였을 뿐 진상규명,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배상, 책임자 처벌 및 재발방지 등 과거청산의 일반원칙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 법안이 민간인학살의 진상규명에 대한 광범위한 시민운동이 조직되기 전인 1996년에 제정된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거창사건은 민간인학살로서는 드물게 사건이 일어난 지 두달이 채 안 된 1951년 3월 말에 세상에 알려졌고, 학살의 책임자들 역시 곧 사면되기는 했으나 처벌을 받았다. 따라서 이 사건은 숱한 민간인학살사건 중에서 국민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이 되어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거창사건에 관한 법안이 제정될 수 있었던 데에는 또다른 요인도 작용했다. 거창은 김영삼의 측근 중 측근으로 상도동계의 맏형인 김동영의 지역구였다. 김동영은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기 직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지역구의 숙원사업이었던 이 법안의 제정에 대해 당시 김영삼 정권의 요인들이 특별한 배려를 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찍이 1960년 12월 4월민중봉기의 열기 속에 전국에서 가장 먼저 위령비가 세워진 거창은 오히려 이 위령비 때문에 더 큰 상처를 안게 되었다. 1961년 5·16군사반란 이후 유족회는 반국가단체로 몰려 간부 17명이 구속되었고, 애써 만든 위령비는 파괴되어 땅에 묻히고, 합동묘역은 파헤쳐졌다. 계엄당국은 희생자명단을 내놓고 삽으로 유골을 떠서 몫을 정하여 강제배분했다. 유족들이 통곡하며 수령을 거부하자 군경은 총칼로 협박하여 다 가져가게 만들었다. 이러니 유족들이 민간인학살이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두번 세번 죽인 것이라고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온건하기 그지없는 통합특별법안
거창사건에 관한 특별법이 유족들의 끈질긴 노력을 제외하고는 조직적인 운동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한 채 정권쪽의 시혜적인 조처로 제정된 것이라면, 2000년 1월에 공포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조직적인 진상규명 운동의 산물이며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거창사건 특별법에 비해 상당히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안의 목적에 진상규명이 포함된 것은 4·3사건뿐 아니라 한국전쟁 전후의 숱한 민간인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한 교두보 확보라는 적극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법안은 배상 및 보상문제에 대한 규정이 없고, 광주민주화운동 특별법과 같은 특별재심규정이 없다. 특별재심규정이 없다함은 사건 당시에 형식적이나마 재판을 받아 처형되거나 처벌받은 사람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길이 막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천건의 민간인학살이 일어났는데, 이를 사건마다 또는 지역으로 묶어 개별적인 특별법을 제정한다면 최소 수백건의 법률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는 입법의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불합리한 낭비일 뿐 아니라, 무수한 개별적인 사건들이 모여 이루는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의 전체상을 규명하는 데에도 적절한 접근방법이 아니다. 이번에 발의된 통합특별법은 이런 폐단을 극복하고 또 앞서 제정된 두건의 개별적인 특별법의 문제점을 보완하여 만들어졌지만, 유족이나 민간인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온 시민운동 단체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온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명칭부터 종래 주장해온 민간인학살이 아니라 ‘민간인 희생’으로 완화시켰으며, 광주민주화운동과는 달리 국가배상도 거론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 책임자 처벌문제는 당연히 포함되지 않았다.
지난 9월27일 헌법재판소는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 회원들이 제기한 제주 4·3특별법에 대한 위헌심판 청구를 각하함으로써 특별법의 헌법적 정당성을 확인했다. 그러나 전국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망라한 통합특별법의 통과를 낙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번에 제출된 통합특별법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법안이 통과된다 해도 명예회복에 대해서 극우단체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며, 진상규명은 더욱 많은 장애를 맞을 것이다. 불과 십수년 전의 의문사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작업도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권한이 대단히 제약되어 있고, 활동시한도 극히 짧아 자칫 과거사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그런 마당에 진실에 대한 고백과 증언을 끌어낼 수 있는 실효성 있는 강제수단과 진실을 밝힌 증언자들에 대한 보호장치를 갖지 못한 채 반세기 전에 자행된 수천건의 민간인학살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을 전망이다. 그러나 이런 고민도 통합특별법안이 통과된 뒤의 일이고, 지금 당장은 이 온건한 법안의 통과를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는 없다.
왜 더불어 살아야 하는가
민간인학살이 남긴 부정적 유산이야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다할 수 없지만, 꼭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박멸의 기억’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나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는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 어딘가 부족하고 힘없는 사람들, 소수자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다. 왜 더불어 살아야 하는가?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공자님 말씀이다. 인류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이루려는 것은 실은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없고, 또 쓸어버릴 때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도 참고 살아가려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주류’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 지혜와 관용 대신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을 박멸하고 싹쓸이해버린 기억을 갖고 있다. 박멸의 기억을 스스로 벗어던지는 일은 우리 사회가 더불어 사는 사회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그리고 민간인학살에 관한 통합특별법은 그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나를 편들지 않으면 모두가 적이라는 부시의 힘의 논리가 횡행하는 이 시대에 우리의 도덕과 상식은 시험을 받고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사진/ 민간인학살만을 놓고 본다면 이민족 지배하의 학살에 비해 동족 내의 '빨갱이 사냥'이 규모로나 강도로 보나 훨씬 더 잔혹했다. 지난해 5월 경남 산청군 외공리에서 발굴된 유골들.(진주신문 윤성효 기자)
일제는 1936년 12월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을 제정한 것을 시발로 사상범들에 대한 감시를 법제화하였다. 이어 일제는 1938년 7월 사상전향자들로 시국대응전선(全鮮)사상보국연맹을 결성했으며, 다시 1941년 1월에는 사상보국연맹을 대화숙(大和塾)으로 개편하였다. 대화숙은 일본정신의 현양과 내선일체 강화 및 전향자의 선도 보호 등을 주요사업으로 삼고 전향자들을 입숙시켜 군대식 기율로 관리하면서 황민화 교육을 실시했다. 일제는 이어 1941년 2월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제정하여 재범이나 도주의 우려가 있는 사상범들을 예방구금소나 감옥에 가수용할 수 있는 길을 텄다. 대화숙 등에 수감되었던 사상범들은 소련군의 대일 개전과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일본이 서둘러 항복했기에 망정이지 2차대전의 종전이 늦춰졌거나 한반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면, 일제가 이렇게 알뜰하게 관리해온 사상범들을 그대로 두었을 리가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평시에 사상범을 철저히 ‘관리’하다가 유사시에 ‘처리’한다는 일제의 숨은 계획은 불행히도 대한민국에 계승되어 한국전쟁 때 실천에 옮겨졌다. 1949년 6월 검찰과 경찰 요인들의 주도 아래 조직된 국민보도연맹은 남로당이나 민애청 등 좌익계열의 정당 및 사회단체 성원이었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대상으로 삼았다. 관의 개입에 의한 강제전향 역시 천황제 국가 일본과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제도로 대표적인 일제잔재였다.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와 공산주의 박멸을 기치로 내건 보도연맹에의 가입은 사실상 의무사항이었다. 대한민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확실히 충실한 국민이 되었다는 것’을 보증하는 장치였던 보도연맹에 가입한 전향자들의 수는 약 30여만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 ‘충실한 국민’ 대부분은 전쟁이 발발하자 국가기구에 의해 조직적으로 소집되어 철저히 ‘처리’되었다. 민간인학살에 끼친 일제 잔재의 영향은 공비토벌 전술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일본군이 범한 난징 대학살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것이 ‘무적 황군’이 행한 유일한 학살은 결코 아니다. 1920년의 간도 출병에서 약 4천명, 그리고 1932년의 간도토벌에서 약 2만명을 학살하는 등 일본군은 우리 민족 최대의 해외독립운동기지인 간도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이어 간도를 포함한 만주전역에서 전개된 항일유격투쟁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일제는 비민분리(匪民分離)에 기초한 집단부락 정책을 실시하면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고 집과 재산을 불태웠다. ‘비민분리’란 유격대를 물고기에 비유하여 물에 해당하는 주민들을 소개시켜, 즉 물을 빼버려 물고기를 잡는 토벌전술이다. 이에 기초한 비민분리 전술은 한국전쟁 전후의 유격대 토벌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을 뿐 아니라 멀리 베트남에서도 활용되었다. 일본군이 고안하여 적극 시행한 이 전술은 만주에서도, 한국에서도, 베트남에서도 집단부락으로의 소개명령에 따르지 않는 주민들을 상대로 엄청난 유혈사태를 가져오며 강력히 추진되었다. 프라이팬 벗어나니 불구덩이…

사진/ 48년 여순사건 과정에서 희생된 시신들.(이경모 사진집 <격동기의 현장>)

사진/ 민간인학살에 관한 통합특별법은 싹쓸이의 기억을 가진 우리 사회의 '주류'에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다. 경남 산청군 외공리 학살현장에서 헌화하는 시민들.(진주신문 윤성효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