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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벽을 눕히면 다리

가로를 세로로, 세로를 가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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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1-01 12:54 수정 : 2014-01-03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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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무키무키만만수는 희한한 악기를 사용한다. 이 악기는 장구와 매우 유사하게 생겼다. 그러나 장구처럼 가로로 메는 게 아니라 세로로 바닥에 세워놓는다. 드럼 치듯 위에서 아래로 치면 뚜당뚜당 장구 소리가 나면서 친숙하고도 기묘한 인상을 준다. 페달과 심벌까지 갖춘, 장구이면서도 장구가 아닌 이 악기의 이름은 ‘구장구장’(그림)이다.

신문은 오랫동안 세로쓰기를 고수했다. 모든 책이 가로쓰기로 바뀐 지 오래일 때도 신문만은 세로쓰기였다. 왜 그랬을까? 꼭 그랬어야만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었다. 중앙일간지에 가로쓰기가 등장한 건 1980년대에 와서의 일이다. 2013년 현재 세로쓰기로 된 신문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가로로 누운 것을 세로로 세워보거나 세로로 서 있는 것을 가로로 눕혀보는 단순한 시도만으로도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열린다. 1940년대 잭슨 폴록은 세워져 있던 캔버스를 바닥에 눕혔다. 그는 이제 캔버스 위를 폴록폴록 뛰어다니며 물감을 흩뿌릴 수 있게 되었다. 액션페인팅이 시작됐고, 추상표현주의는 새로운 엔진을 달았다.

내가 전통 한옥에서 참 멋지다고 생각하는 시스템은 가로로 열리던 문짝을 세로로도 들어서 매달아 올릴 수 있다는 점이다. 벽이던 것이 어느 순간 뻥 뚫리고 안방·대청·건넌방이 하나로 통합되며 널찍한 공간이 생겨난다. 벽이었던 것을 접어서 없앨 수 있다는 감각은, 집이라는 개념을 얼마나 가변적으로 만드는가.

배명훈의 멋진 SF 소설 <타워>에는 ‘수직주의자’와 ‘수평주의자’라는 개념이 나온다. 높이가 674층에 이르고 인구 50만 명이 사는 건물이자 하나의 국가인 빈스토크 안에서, 기간시설인 엘리베이터를 장악하고 수직적 위계를 중요시하는 수직주의자들과, 한 층 안에서 걸어서 이동하며 짐을 나르고 수평적 권리를 중요시하는 수평주의자들은 대립한다. 이에 빗대어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1789년 프랑스대혁명도 왕정이라는 수직적 위계를 밀어서 수평적으로 넘어뜨린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본의 정리전문가 곤도 마리에는 모든 것을 세워서 정리하라고 충고한다. 그 편이 공간 효율이 훨씬 낫고 쓰기에도 편리하다는 거다. 티셔츠 하나를 개어서 바닥에 놓아보면 그것은 그렇게 누워 있는 것이 순리인 듯 느껴진다. 하지만 여러 장을 잇대어 착착 세워서 정리해보시라.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티셔츠는 꼭 누워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사실은 그 어떤 것도 마찬가지다. 누운 걸 세워보고, 서 있는 걸 눕혀보자. 1960년대에 흑인이자 여성이자 성소수자로, 자신을 억압하는 겹겹의 벽과 몸을 부딪쳐 싸웠던 앤절라 데이비스는 이렇게 말했던가.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고.

김하나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 저자·카피라이터


*카피라이터 김하나의 ‘아이디어 사칙연산’은 새로운 발상법을 독자와 함께 나누는 코너입니다. 더하거나 빼는 것만으로 바뀌는 세상을 그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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