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난자의 생화학적 반응 촉진하는 물질… 남성 불임 극복 등 생명공학에 이바지
성에서 자유로운 생명체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생물들에게 성은 에너지 전환 작용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먹이에 집착해 생명을 유지하듯이 사랑에 빠지면서 번식을 꾀한다. 성에 관련된 화학적 작용을 통해 삶의 희열을 만끽하고, 에너지가 침잠된 우주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청춘의 반란을 일으키는 성도 알고보면 생명체의 자연스런 현상일 뿐이다. 생물학적인 성은 단순히 새로운 개체를 생성하기 위해 별개의 근원에서 비롯된 유전자를 재조합하는 현상이다. 무수히 많은 생화학적 작용을 통해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성, 그것은 자신의 살아 있는 복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생물체 고유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섹스의 생물학적 의미는 ‘수정’(Fertilization)에 있다. 아무리 신비롭게 느껴지는 로맨스도 섹스의 부산물일 뿐이다. 섹스의 궁극적 목표는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이다. 하지만 섹스에 관련된 화학반응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성교를 통해 여성의 질 내에 들어온 정자가 꼬리를 흔들면서 자궁구, 자궁경관, 자궁강을 통해 난관으로 헤엄쳐 들어가 배란된 난자를 만난다. 정자는 난자의 표면에 있는 막을 녹이고 난자 속으로 들어가 수정에 이른다. 바로 그 수정 단계에서의 정자와 난자의 생화학적 행적은 정교한 컴퓨터 모델로도 밝혀내기 힘들었다.
화학반응 개시물질로 수정에 절대적 영향
그런데 최근 이에 관한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결정적인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 스탠퍼드대학 데이비드 에펠 박사팀은 과학전문지 <네이처> 최근호에 난자와 정자의 수정과정을 유도하는 생명현상을 규명한 내용을 발표했다. 연구팀은 세포와 조직 사이의 명령을 전달하는 물질인 ‘산화질소’(Nitric Oxide)가 정자의 두부에서 합성·분비되면서 난자 내의 각종 수정 반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지금까지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뒤에 일어나는 화학반응에 대한 연구는 이뤄졌지만, 각각의 반응을 일으키는 개시물질의 정체는 오리무중이었다.
에펠 박사팀은 성게(Sea Urchins)에서 수정 개시물질을 밝혀냈다. 성게는 정자와 난자가 상대적으로 추출하기 쉬워 수정의 연구 대상모델로 오래 전부터 이용되고 있다. 일반적인 성게의 정자는 산화질소를 합성할 수 있는 효소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수정 몇초 전까지도 이 효소는 화학반응을 활발히 일으키지 않는 불활성 상태로 존재한다. 그런데 정자가 난자에 닿으면 효소가 아주 빨리 산화질소를 만들기 시작한다. 효소의 작용에 의해 난자와 수정하기 직전 두부에서 산화질소 가스를 생성 분비하는 것이다. 이 가스는 곧바로 난자에 주입되어 30초 정도 지난 뒤에 칼슘을 방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분비된 산화질소는 난자에 직접 작용해 30초 정도 지난 뒤부터 난자 내의 칼슘농도를 높인다. 칼슘이 난자 내에서 농도가 짙어지는 것은 수정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반응인 난자와 정자 핵의 융합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수정란이 계속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칼슘농도의 증가는 산화질소의 합성을 더욱 활성화시키며 세포 내 칼슘농도와 산화질소합성 증가가 계속적으로 수정의 다양한 반응을 촉진하게 된다. 결국 산화질소의 활성화로 난자의 발달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칼슘 수치가 올라가면서 대사에 변화가 생겨 난자가 배(胚)로 발달하는 셈이다. 만일 비정상적인 정자라면 산화질소 합성작용이 떨어지기 때문에 정상적 수정현상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수정의 화학작용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물질은 바로 산화질소이다. ‘웃음기체’라 불리기도 하는 이산화질소와 혼동을 일으키기도 하는 산화질소는 질소(N)와 산소(O) 원자 하나씩으로 이뤄진 단순한 물질로 매우 불안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이너마이트의 화약 성분인 나이트로 글리세린도 산화질소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물질은 오랫동안 오존층에 영향을 주는 공해물질로 눈총을 받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람의 생리적 과정에 깊숙이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어느 날 갑자기 ‘신데레라 물질’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미국의 로버트 퍼흐곳 박사 등 세 사람은 심혈관계에 관련된 산화질소의 구실을 규명해 1998년 노벨의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심혈관계는 산화질소가 활동하는 주요 무대. 혈관은 인체의 곳곳에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하는 중요한 수송로로 이용된다. 이 수송로가 막히지 않고 원할히 흐르기 위해서는 신호를 전달하는 물질이 필요하다. 그런 구실을 하는 신경전달물질이 산화질소이다. 혈관확장은 물론 각종 물질의 대사, 신경자극 전달, 세포사멸과 인체 방어 기작 등 여러 생체반응에 관여하며 백혈구가 종양이나 박테리아 등 침입자를 죽이는 데도 커다란 구실을 한다. 뿐만 아니라 에로틱한 자극이 신경세포를 따라 음경해면체에 이르러 산화질소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남성의 성기능강화제인 비아그라도 산화질소 관련 물질로서 산화질소의 작용에 의해 남성 성기 혈관의 확장으로 발기를 촉진한다.
현재 산화질소는 임상의학 분야에서 인체에 천천히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공여체 형태로 이용되며 마취와 임상전 실험에도 쓰이고 있다. 여기에 에펠 박사팀의 연구결과를 응용하면 의학적으로 폭넓게 활용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남성불임증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비정상적인 정자와 난자를 산화질소 가스에 노출시켜 정자와 난자의 수정 능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산화질소의 농도가 떨어져 불임에 이른 남성이라면 산화질소의 능력에 기댈 수도 있다. 시험관 수정 과정에서 산화질소가 부족한 남성의 정자에 산화질소를 주입해 결함을 보충하는 것이다. 미세주사를 이용해 정자를 난자에 직접 주입할 때 화학적 작용을 촉진하는 산화질소를 인위적으로 넣는 것도 기대할 수 있다.
복제 성공률 높여… 농도 조절이 관건
(사진/정자가 난자의 벽을 뚫고 있는 모습(위)과 정자와 난자를 체외수정하는 모습(아래).)
산화질소는 수정 단계에서만 작용하는 게 아니다. 수정란의 초기태아 발생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포천중문의과대학 해부학교실 연구진에 의해 밝혀지기도 했다. 이들은 현재 산화질소 작용 관련 수정란 및 세포배양 시스템을 개발해 미국에 발명 특허 출원중이다. 이렇듯 산화질소는 수정반응을 촉진하는 것은 물론이고 착상 전 태아의 발육을 저지하고 착상 과정을 촉진하기도 하며 임신을 유지하는 데도 주요한 구실을 한다. 산화질소가 정자와 난자의 수정에서 태아로의 성장까지 전 과정에 개입하는 셈이다.
하지만 산화질소는 때론 극약이 될 수도 있다. 만일 수정란을 키우는 배양액에 임의로 산화질소를 넣을 경우 수정란이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산화질소의 농도 조절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까닭에 연구자들은 산화질소를 불임치료 기술 개발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산화질소의 다양한 작용을 충분히 연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수정과정에서의 산화질소의 작용과 기작 등을 충분히 파악하면 용도는 무궁무진하다. 심지어 유전자 조작이나 복제에도 활용할 수 있다. 태아로 발달하기 힘든 포유류 체세포 복제 과정에서 수정된 난자에 산화질소를 주입하면 복제 성공률을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섹스의 화학작용을 인공적으로 유도하는 날이 다가오는 셈이다.
도움말 주신 분
포천중문의과대학 해부학교실 임정묵 교수
김수병 기자soob@hani.co.kr

(사진/생명체 발생에 관련된 산화질고의 구실을 밝혀낸 미국 스탠퍼드대 데이비드 에펠 박사.그는 성게를 이용해 생식의 비밀을 규명했다)

(사진/산화질소는 정자의 두부에서 분비되어 난자에서 각종 수정 반응을 일으킨다.수정을 뒤해 난자로 달려사는 정자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