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노라들을 응원하노라
봉건과 억압에 맞선 한국 패션디자이너 1세대, 한 여성의 개인사를 통해 근대 여성문화사를 들여다본 영화 <노라노>
등록 : 2013-10-23 18:51 수정 : 2013-10-25 16:05
대문이 덜커덕, 하고 잠기는 소리가 나더니 막이 내린다. 하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저는 하나의 인간이에요, 당신과 똑같은. 그렇지 않다면 저는 최소한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어요”라고 외치고 나간 이 여인은 남편 헬메르에게 ‘종달새’로 불리며 인형 취급을 받던 노라다. 허위와 위선의 세계에서 뛰쳐나온 노라의 후일담은 쓰이지 않았지만 관객은 극장을 나서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되리라는 것을.
60년 패션사, 3년의 촬영, 93분의 영화
1940년대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을 구해 읽은 한 한국인 소녀는 집 나간 노라를 마음 깊이 응원했다. 자의식을 가진 주체적인 여성이 되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몇 년 뒤 자신도 노라와 꼭 닮은 상황에 놓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1944년 징집을 피해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열흘 만에 군의 호출을 받고 떠난 남편이 돌아오길 빌며 가혹한 시집살이를 견뎠지만 남편이 전사했을지 모른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결국 보험금 때문에 시집으로부터 이혼 통보를 받았다. 남편은 살아 돌아왔지만 다시 돌아간 시집에서 이유도 모른 채 혼나며 여성의 역할을 한정지어 강요하는 시대에 역겨움을 느꼈다. 남편과 완전히 결별했다. 하지만 이혼 여성은 친정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자의 반, 타의 반 울타리 밖에 놓이게 된 그는 1947년 한국 여성으로는 두 번째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노라, 그녀가 새 인생을 찾아 집을 뛰쳐나왔듯이, 나도 미지의 인생을 찾아 이 이름을 가지고 미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내 이름은 그때부터 ‘노명자’가 아닌 ‘노라노’였다.”(<노라노, 열정을 디자인하다>, 황금나침반 펴냄) 한국의 노라, 패션디자이너 노라노(85)씨의 이야기다.
(위부터) 2012년 노 라노 60주년 ‘라 비앵 로즈’전을 앞두고 모델 들이 노라노 디자이너 의 옷을 입고 기념 화 보를 촬영하고 있다. 85살의 노라노 디자이 너는 여전히 하루도 빠 짐없이 출근해 “시계처 럼 일한다”. 배우 엄앵 란이 1957년 서울 반 도호텔에서 열린 노라 노의 두 번째 패션쇼에 모델로 나섰다. 시네마달 제공
여성주의 미디어공동체 연분홍치마의 여섯 번째 작품 <노라노>(10월31일 개봉)는 디자이너 노라노의 패션 인생 60년을 정리한 ‘라 비앵 로즈’(La vie en Rose)전(2012년) 준비 과정을 따라가면서 시작한다. 서울 용산 참사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을 연출한 김일란 감독이 제작을 맡고 김성희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김성희 감독은 10월16일 서울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점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여성 인물의 발굴, 여성 역사 쓰기의 맥락에서 테마를 쭉 고민해왔는데, 2010년 우연히 노라노 선생님을 알게 되면서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만 3년을 쫓아다니며 반세기가 넘는 디자이너의 삶을 93분 분량의 필름에 담았다.
노라노는 1956년 한국 최초로 패션쇼를 열고, 처음으로 디자이너 기성복을 국내에 도입했다. 1950~70년대 활동했던 은막의 스타들은 “대본이 나오면 모든 배우들이 바로 노라노 선생님을 찾아갔다”고 진술한다. 당시 흥행했던 영화 의상의 대부분이 노라노의 손을 거쳐갔다. 영화배우 엄앵란씨는 영화가 나오면 사람들이 “야, 엄앵란이 뭐 입었는지 가보자. 걔는 뭘 들었는지 가보자”고 할 정도로 시대를 앞서는 패션을 선보였다고 말했다. 가수 윤복희를 통해 미니스커트를 대중화하고, 펄시스터즈에게 판탈롱(엉덩이와 허벅지 부분은 붙고 무릎부터 퍼지는 모양의 바지)을 입혀 유행을 선도했다.
여성들이여 짧은 치마를 입어라
하지만 이 영화가 빈난했던 시절,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에 둘러싸인 디자이너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60년이 넘도록 ‘일하는 여성’으로서 디자이너 노라노가 지켜온 철학은 “옷을 통해 여성의 몸의 움직임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자존심을 갖게끔 하는 것”이었다. 예술품으로서 옷을 만들기보다는 여성들을 응원하고 싶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노라노는 때로 ‘한국의 코코 샤넬’로 비견되기도 한다. 샤넬은 남성들에게 아름다워 보이는 여성복보다 여성의 움직임이 좀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옷을 디자인했다. 남성용 속옷 직물로 주로 쓰이던 저지를 여성복에 도입해 움직임을 자유롭게 했고, 긴 치마를 무릎 길이로 잘라 거추장스러운 옷에서 여성을 해방시켰다. 핸드백에 끈을 달아 여성의 한 손을 속박에서 벗어나게 것도 샤넬이었으니 샤넬은 1900년대 초반 패션계의 혁명 혹은 반동분자였던 셈이다.
1920년대 샤넬이 잘라놓은 무릎 길이의 치마는 한참 동안 그 길이에 머물러 있다가 1960년대가 되어서야 점차 무릎 위로 올라왔다. 1960년대 중반, 영국에서부터 미니스커트 광풍이 불어왔다. 대중의 욕망을 빠르게 포착한 노라노는 가수 윤복희를 통해 치마 길이를 깡총하게 잘랐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서 미니스커트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감추고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에 반동할 수 있다는 자체로 여성들은 해방감을 느꼈다. 하지만 초미니스커트를 입었다고 유치장에 20여 일 동안 구류되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1967년 4월20일치 <동아일보>에는 이런 글도 실렸다. “남들이 (미니스커트를) 입으니까 나도 입는다는 아가씨가 있다면 그야말로 민족반역자.” 그러나 여성들은 아랑곳없이 짧은 치마를 입고 거리에 나섰다. 배방훈 경운박물관 간사는 “양장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여성들이 미니스커트를 입었다”고 회고한다. 노라노는 그 시대 미니스커트 부대의 사령탑이었다.
영화 는 한 인물의 개인사를 통해 근대 여성문화사를 조명했다. 촬영 중인 김성희 감독(왼쪽)과 노라노 디자이너.씨네21 최성열
치마를 잘라 한 차례 한국 패션계에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기 전인 1963년, 노라노는 한국 패션 역사에 이미 한 줄을 추가했다. 최초로 디자이너 여성 기성복을 제작했던 것. 1960년대 초반 한국에 기성복 제작이 도입되었으나 아직 사이즈가 통일되지 않는 등 미비한 점이 많았다. 노라노는 직장을 가진 여성을 위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드는 맞춤옷 대신 고급스러운 기성복을 만들어 고객으로부터 환호를 받았다. 집안일을 할 때 마땅한 작업복이 없어 한복 속바지 같은 걸 입는 여성을 위해 홈드레스를 개발한 것도 그다. 노라노는 여성들이 어디에 있든 원하는 옷을 입고, 자신의 욕망을 외면하지 않고, 활동하기 편한 옷을 입기를 바랐다. 여성주의 칼럼니스트 박희정씨는 “더 많은 여성들이 패션을 향유해야 한다는 철학”을 지닌 디자이너로서 노라노를 말한다.
“패션디자이너는 중노동자예요”
그러니 지난해 후배들이 기획한 ‘라 비앵 로즈’ 전시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그가 한숨부터 먼저 내쉬었던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슨 장밋빛 인생….” 디자이너는 고단하다. “패션디자이너는 중노동자예요.” 돌이켜보건대 삶은 장밋빛 인생이라기보다는 “비틀비틀해서야 못 살아남는” 한판 아수라장이었다. “장밋빛 인생이라고는 도저히 생각이 안 된 거죠. 사회생활을 하려면 쉬운 일이 있나요. …우리 시대에는 여자 직업이라는 것이 별로 없었잖아요. 남성들이 직업인으로 보기 전에 여자로 보죠. 그게 문제예요, 요는.”
영화는 그렇게, 격동의 시대를 살아오며 일평생 옷을 만든 한 여성의 철학과 신념을 조명한다. 누구는 미국에서 이미 미래를 보았기 때문에 혹은 유복한 가정 출신이라는 안전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세상의 요구에 굴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는 배경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수많은 굽이들이 녹아 있다. 특히 그래서 이것은 거창하게 한국 여성 패션의 민주화에 기여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틀비틀해서야 못 살아남는” 시절을 꿋꿋하게 건너온 한 개인의 고군분투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봉건적이었던 사회의 요구와 여성의 욕망 사이에 서서, 당대가 요구하지 않는 여성으로서 당대를 대표하게 된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