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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굴착기로 김장을 담그는 친구

제 분야의 고수들인 3명의 ‘일친구’, ‘쿨’한 관계로 시작해 묘한 화학적 변환 과정을 거치며 서로를 숙성시켜주는 사이가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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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0-18 16:19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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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손’ 손준섭이 높은 조선 향나무 위에 올라 전지하는 모습. 그의 보조(일명 ‘시다’) 강명구는 밑에서 도와주고 있는 중이다.강명구 제공
반쪽이건 온쪽이건 도시에서 살다 시골로 와 살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이제는 시골도 논둑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는 시대라지만 그래도 전화 한 통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아파트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교육이며, 농사며, 자연 그리고 인간들과 관계 맺는 방식, 즉 삶의 문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생각에 도움을 구할 일순위는 ‘살아 있는 박물관’ 혹은 ‘전통적 지혜의 보고’로 여겨지는 동네 어르신들이다. 그래서 이사 오면 수건 한 장씩 돌리고, 그에 더해 이장님을 모시고 노인정에서 삼겹살이나 부침개에 막걸리라도 한 사발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를 따지자면 구구절절 사설이 길지만 안타깝게도 내 방식은 아니었다. 관광버스를 타고 흥겹게 율동하며 봄나들이에 동참할 용기가 없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하여간 내 삶의 방식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방식 또한 존중되길 바라던 내가 택할 수 있는 관계맺기 방식의 출발은 그래서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이었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아 피차 필요하면 선한 마음으로 도움을 주고받되 나름대로 제각각 삶의 방식이 존중받는 무언의 협약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번 살아보시라. ‘때로는 따로따로, 또 때로는 다 함께’라는 허언(虛言) 같은 명언(名言)이 정말이지 얼마나 정답 찾기 어려운 적정 거리 두기인지를 금세 깨닫게 된다. 적정 거리는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임을 머리는 알고 있지만 몸이 깨닫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린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 같은 마음이 들려면 마음고생깨나 각오할 일이다. 그래서 내가 택한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저절로 택하게 된) 방식은 새로운 ‘일친구’ 만들기였다. 이런 선택은 충분하고도 넘치는 보상을 내게 안겨주었다. 이곳을 개척(?)하는 일도 전문가적으로 도움을 받고 덤으로 살아가면서 오랫동안 지속할 것으로 예상되는 ‘좋은 관계’도 이루었다는 판단이다.

40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고루 분포한 3명의 일친구는 한마디로 숨겨진 제 분야의 고수들이다. 이제 곧 오십 줄에 들어서는, 모든 이가 칭하여 이 고장의 ‘맥가이버’인 소규모 (농·건설) 중고기계 수리 전문점 윤현 사장, 손만 댔다 하면 어떤 나무든 잘생긴 미목(美木)으로 가꿔주는 이 고장의 ‘가위손’인 40대 초반의 손준섭 명인, 그리고 굴착기 삽날에 칼을 달아 무채를 썰어 김장을 담그고 젓가락을 달아 라면을 먹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40대 중반의 굴착기 대가 윤주열 명인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이 3명에 더해 연재 첫 회에 소개한, 지금은 행방이 묘연해지신, 막노동 삽질의 대가 오 사장님도 계시다.

말이 좋아 일‘친구들’이지 일상적인 용어로 치환하면 그들은 내가 ‘하루에 얼마’로 고용한 ‘일꾼’들이었다. 일당 얼마를 주고받는 ‘쿨’한 시장(市場) 관계로 시작한 우리의 관계는, 그러나 그들의 프로 직업 의식에 나의 인간적인 신뢰가 보태지면서 인간살이의 묘한 화학적 변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그들에 비해 조금은 편하게 먹고산다는 미안함 때문에 되도록 후하게 대하려 애썼고, 그들이 일할 때 꼭 같이 일하거나 하다못해 눈치 빠른 ‘보조’라도 하려고 노력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밥 한술에 삽질 한 번 더’ 한다는 속담을 점심 밥상으로 실천했고, 이런 우리 부부에게 그들은 자기 전문 분야의 네트워크를 연결시켜 보답해주었다. 축대를 쌓으려고 터고르기를 하면 알아서 싼값에 좋은 돌을 한 트럭 주문하고 기술 좋은 검증된 석수를 모셔왔다. 잘 익은 맛 좋은 된장 한 바가지를 가위손 손준섭과 함께 나누면 튼실한 묘목을 농장 가격으로 구해주고, 출근길에 맡긴 고장난 예초기를 퇴근길에 찾으며 출출한 속을 맥주 한잔에 쥐포 한 봉지로 윤 사장과 나누면 그는 조금만 손보면 새것처럼 작동하는 중고 정미기를 구해주었다. 그들은, 착한 나의 일친구들은 고마워할 줄 알았고 나는 미안해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우리는 장이 익어가듯 서로를 숙성시켜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강명구 아주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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